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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6)

*


눈을 떴을 때 나는 공장 안에 갇혀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씨씨티비는 천장 뿐만 아니라 벽까지 점령해 나를 비롯한 작업자들을 감시했다. 그것들은 몇 초마다 빨간색으로 변하며 소름돋는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위잉, 위잉. 집중하지 않으면 전혀 의식하지 못할만큼 작은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렸다. 씨씨티비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빳빳이 작업대에 고정시켜 놓았다. 인형의 분홍빛 살갗에 일미리도 안 되어보이는 지름의 아주 얇은 핏줄을 붙였다. 핏줄은 너무 가느다랗고 물렁거려서, 손을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크게 떨리며 예상치 못한 허공으로 날아갔다.


피부에 핏줄을 붙이는 작업은 끔찍한 것이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핏줄은 지네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핀셋을 벗어났고, 그럴때마다 손이 더 심하게 떨려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아직 붙여야 할 실핏줄이 쌓여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삐이-하는 소리와 씨씨티비의 움직이는 소음이 변칙적으로, 아주 빠르게 반복됐다. 발작적인 이명처럼 소음이 귀를 파고들어 바닥에 핀셋을 놓치고 말았다. 핀셋을 줍기 위해 상체를 아래로 숙였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충동적인 욕망으로 몸이 꿈틀거렸다. 내 고개는 제멋대로 위를 향해 쳐들어졌고 시선은 뚜렷하게 씨씨티비를 쏘아봤다. 그러자 이내 씨씨티비의 작은 소음이 들리며 눈 앞의 씨씨티비가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불과 몇 초만에, 천장에 붙어있는 모든 씨씨티비들이 기괴한 소음을 내며 나를 쳐다봤다.


머리가 아팠다. 눈 앞의 씨씨티비들이 허공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현기증일까.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이번엔 인형이 움직였다. 아직 핏줄을 덜 붙여서 속살과 핏줄이 훤히 드러난 인형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 작업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눈동자와 피할 길이 없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인형의 눈동자는 사람의 눈동자가 가진 특유의 물기 없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내가 놀라 뒤로 주춤하자, 씨씨티비들이 나를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고 인형 역시 작업대에서 내려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걸어오고 있는 인형의 피부에서 핏줄들의 끄트머리가 떨어져 핏줄들이 덜렁거렸다. 아무리 뒤로 물러서봐도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작업대 사이 틈으로 기어들어갔다. 몸을 일으켜 전력을 다해 뛰었다. 눈 앞에 바로 문이 보였다. 버튼을 누르자 찬바람이 스며 들어오며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보자 더 이상 아무것도 날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지만 더 끔찍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체의 여성 인형들과 남성 인형들이 빽빽하게 전시되어있는 가운데, 갑자기 한 남성 인형이 중앙으로 걸어와 여성 인형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어색하게 만지며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인형들을 본 다른 인형들도 그들을 따라 똑같이 행동했다.


어지러울만큼 많은 인형들이 마치 사람처럼, 그러나 어색하게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기계적인 신음 소리들이 들렸다. 곧 씨씨티비가 회전하는 소리와 알 수 없는 소음이 더해져 고막을 자극했다.


그때, 차가운 인형의 손이 내 양 손목을 잡았다.


*


잠에서 깨어보니 차는 멈춰있었고, 해가 완전히 사라져 주변이 온통 어둠이었다. 소름이 돋는 쓸쓸함에 벌떡 몸을 일으키자 손목에 닿은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손목을 쳐다봤다. 나무의 손이었다.


"괜찮아? 자면서 계속 땀 흘리고 힘들어하길래 깨워야할 거 같았어."

"그랬구나.“


나는 순간 멍해져 마땅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무의 눈동자만 쳐다봤다. 나무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꿈에서 봤던 인형의 메마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금방 흐릿하게 머릿속으로 사라졌다. 금방 잊혀질 것 같았다.


"무슨 꿈 꾼거야? 악몽이었어?"

"응, 그냥….“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다행히도 깨어나자마자 이미 많은 조각들이 사라져버린 꿈. 나는 나무에게 뭐라 설명하려다가 가만히 멈췄다. 고개를 내려놓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내게 나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빠랑 아저씨는 경찰서로 들어갔어."

"경찰서? 어디?"

"여기서 오백미터는 걸어가야 돼.“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경찰서는 보이지 않았다. 차 바깥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주차장으로 지정된 공터인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세워진 차는 보였지만 어둠 때문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차들이 세워져있는지 알 수 없는 공터의 주차장에, 차들의 틈에 끼어있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나무에게 말도 하지 않고 차문을 열어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호흡을 의식적으로 조절하자 다행히도 호흡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나무는 놀랐는지 어느새 나와 내 옆에 서 있었다.


"왜 그래?“


나무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주변을 둘러봤다. 밖에 나오자 주변의 간판에서 퍼져 나오는 빛들이 주차장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졌어."

"이제 괜찮아?"

"응. 미안해, 걱정했지? 자면서도 걱정시키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나무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하고 나무는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유독 차가운 나무의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괜찮아'라는 말은 분명 나무가 가장 잘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차가운 감각 때문에 몇번이나 나무를 유심히 살폈다.


나무의 얼굴에 가득 찬 긴장감이 보였다. 그때서야 우리가 경찰서에 온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된 나는 한숨을 쉬다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도 가자."

"안돼, 여기서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

"걱정 안 돼?"

"…당연히 되지. 근데 차 열쇠는 아저씨가 가져갔을 거야. 문을 잠그지 않으면 못 가.“


나무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간 나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작은 서랍을 열어봤다. 한참을 더듬었지만 열쇠처럼 느껴지는 건 없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던 나무도 운전석 쪽으로 와서 여기저기를 손으로 만져보기 시작했다.


"어,“


나무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나무가 열쇠를 찾아낸 곳은 운전석의 의자 틈새였다. 아주 교묘하게, 또 왠지 우스꽝스럽게 의자와 등받이 사이에 열쇠에 끼워져 있었다.


"아저씨들은 원래 다 거짓말쟁이들이야. 여기 있지?“


나는 나무가 들고 있던 열쇠를 가리키며 말했다.


겁이 나는 걸까. 꿈틀거리는 그 눈썹은.


열쇠를 나무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주고 나무의 손을 잡았다.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 금방 환한 빛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어깨동무를 한 중년의 남성들, 짝 지어 걸어가는 커플들, 잔뜩 취해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사람들. 거리는 시끄러웠다.

"있지."

"응?"

"술 마시면 어떨까?“


돌아본 나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해, 어떤 느낌일지.“


경찰서에 가까워질수록 나무의 손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나무의 손바닥에서 생겨나는 축축한 땀이 내 손바닥에 엉겨 붙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야하는 건가?“


바로 근처까지 와서 골목의 방향이 헷갈린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눈 앞에 보이는 전봇대에 설치된 화면이 화려한 이미지들로 장식된 광고를 재생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미지가 멈추더니 화면이 바뀌었다. 나는 왠지 그 장면에 시선을 빼앗겨 전봇대 쪽으로 다가갔다. 바뀐 화면에는 '실종자 정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이름, 강아이. 직업, 중학생. 나이, ….


그건 나였다. 글자들이 쭉 보이더니 다시 화면이 바뀌고 내 얼굴이 크게 화면에 나타났다.


"이게 뭐지?"

"모르겠어. 내가 왜 실종자가…."

"죽였다고 했잖아."

"엄마가 한 걸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일인지 한참 생각해보다 여기가 경찰서 코 앞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나무의 등을 앞으로 떠밀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다시 차로 돌아가야할 것 같아. 경찰서에 들어가면 붙잡힐 거야."

"혼자 갈 수 있겠어?"

"당연하지. 엄청 가까운데. 얼른 다녀와. 아저씨랑 아주머니랑 같이. 알았지?"

"응.“


나무는 걱정되는 얼굴로 나를 한참 쳐다봤다. 내가 인상을 쓰며 가라는 듯이 빠르게 손짓하자 나무는 그때서야 뒤를 돌아 걸어갔다. 나무가 골목을 벗어나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전봇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봇대의 화면에는 아까 봤던 것과 다른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의 옆에 달린 작은 상자를 열자 이어폰 두 개가 보였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자, 귀를 찌르는 시끄러운 광고 소리가 들렸다.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실종자 정보, 이름, 강아이, 직업, 중학생 ….‘


기계적인 음성은 빠르고 정확하게 화면에 보이는 글자들을 전부 읽어냈다. 그리고는 이어서 화면에는 없는, 나에 대한 상세한 특징을 말하기 시작했다.


'짧은 숏컷의 헤어스타일에 키가 작습니다. 걸음의 보폭이 좁은 편이며 실종 당시 신발의 색깔은 하얀색이었지만 아마도 그 위에 초록색 액체가 묻어있을 것입니다. 옷에는…’


나는 피부에 한기가 스쳐지나가는 걸 느끼며 내가 신은 신발을 쳐다봤다. 이미 빨래가 된 신발에는 더 이상 초록색 액체가 묻어있지 않았다.


이상하다.


정체불명의 초록색 빛이 뒤에서 내 신발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어떤 형체가 보였지만, 그보다 빠르게 검은 비닐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눈 앞이 깜깜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3부 뿌리가 없는 나무



*


기억할 수 있겠니?


아니, 기억할 리가 없을 거야. 네가 겨우 두 살이 되었던 날이었으니까.


너는 포대기에 둘둘 말려서 얼굴만 내놓은 채 잠들어 있었어. 널 안고 들어온 남자는 네가 두 살을 먹어도 걷지를 못한다고, 덜떨어진 바보 녀석인 게 분명하다고 투덜거렸어. 그러면서 그 남자가 널 소파 위에 거칠게 내려 놓으니 네가 잠에서 깨어나 아주 커다란 소리로 울기 시작하더라.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인상을 팍 찌푸렸어. 주름살이 근육이 되어 미간이 깊게 패인, 인상이 정말 좋지 않은 남자였지.


그에 비해 네 얼굴은 환한 달덩이처럼 순하기만 했어.


남자는 아버지에게 연신 '실수'라는 단어를 되풀이해서 말했어. 모든 것이 실수였다고. 아버지의 말을 들었어야만 했다고. 그 여자는 멍청하고 쓸모없는 년이라고 거친 말투로 쏘아붙이더니 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구나.


저 애가 그 년을 닮아 아직 걷지를 못하는 거예요. 어디 장애가 있는게 분명해요.


나는 바닥을 닦는 척하며 소파에 버려져 애매한 자세로 울고 있는 네게 다가갔어. 고개가 아래쪽으로 고꾸라져있던 네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어.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두피쪽으로 흐르는데, 그게 갑자기 왜 그렇게도 슬퍼보였는지. 커다란 거실의 끝에서 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너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잊은 채, 나는 걸레를 바닥에 버려두고 널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끌어안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질 않더라. 특유의 기분 나쁜 표정. 두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어.


내가 너를 안아올리자마자 너는 마법처럼 울음을 멈췄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는데 그게 어찌나 귀엽던지. 아직도 그때의 그 얼굴이 선명해.


너는 모르겠지만 다 자란 너의 얼굴엔 아직도 그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단다. 널 보고 애기 같다고 말하면 싫어할까봐서, 이젠 다 큰 어른이라고 반항할 네 목소리와 표정이 뻔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금덩이.


나는 항상 널 그렇게 부르고 싶었어. 그 커다란 거실의 노란 조명 아래에 비춰진 너의 피부는 잘 다듬어진 금덩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어. 그래서 몇 번이나 네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지. 보드랍고 따뜻했단다. 그런 감각은 오로지 너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어.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끝에 네 할아버지는 널 두고 가라고 말했어. 어쩔 생각이신데요, 하고 남자가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지. 남자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은 것 같았어. 들어올 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을 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잠시 후에, 남자는 그대로 집을 나갔어.


그 남자가 널 쳐다봤냐고? 아마도, 그랬을 거야. 몇 초 동안. 널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


남자가 나가자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불편한 분위기가 주위를 맴돌았어. 나는 별 수 없이 너를 다시 예쁘게 소파 위에 눕히고 걸레를 집어 들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퇴근 시간이 다가와 있었어. 평소 같았으면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날은 도저히 네가 눈에 밟혀서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어.


가다가 버려줄 수 있지?


네 할아버지가 날 보고 그렇게 말하더구나. 새하얀 포대기에 둘러싸인 너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마치 아주 성가신 존재를 만나버렸다는 얼굴이었지. 한 치의 죄책감이나 미안함도 없이, 널 베이비 박스에 버려달라고 말했어. 그럼 누가 알아서 널 데려갈거라고.


난 떨리는 소리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어. 아주 천천히. 사장님에게 반항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몹시 떨리고 긴장됐지. 네 할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작게 웃더니, 나를 노려봤어.


내일부터 그만두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서는 싸늘하게 웃고 있었어. 소리도 없이.


어쩔 수 없이 나는 너를 안아들고 그 집을 나섰다. 추운 겨울날이었어. 작은 눈발이 휘날려서 네 코와 입만 내놓고 포대기로 너를 꽁꽁 싸맸지. 그리고 집으로 걸어갔다. 이 추운 날에 버려진다면 금방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네가 너무 뽀얗고 예뻐서였을까. 겨울날 집까지 안고 가기에 너는 꽤 무거웠지만 나는 너를 한번도 놓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나는 그 집에 출근하지 않았어.


그 집에서 잘리는 게 무서워서 널 데려온 게 아니었으니까. 난 애초부터 널 버릴 생각이 없었다. 너를 데리고 나왔던 건 나 같이 하찮은 사람을 잘라내면서까지 널 버리려고 하는 사람에게 널 하루라도 맡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소파에 고꾸라져서 먹을 것을 달라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어댈 네 얼굴이 계속 상상 속에 떠올랐거든.


그래서 너는 우리 집에 오게 되었지. 통통하고, 복스럽고, 잘 웃고 또 잘 울기도 하는 네가.


그 날부터 나는 네 엄마가 되었고 내 남편은 네 아빠가 되었다. 남편도 너를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몰라. 갑자기 이런 어린 애를 어떻게 키우냐고 내게 핀잔을 늘어 놓으면서도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구나. 입꼬리도 씰룩 씰룩 자꾸만 위로 올라가고 말이야.


그때의 우리 집은 난방을 하지 않으면 발에 동상이 올 정도로 추웠어. 나는 너를 이런 집에 데려오게 되어서 네게 정말로 미안했다. 네가 이런 추위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건강히 잘 자라기를 진심으로 바랐기에, 우리는 네 이름을 나무라고 지었단다.


우리 예쁜 나무.


**


경찰서에 들어서자 삭막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무 아빠의 친구가 나무의 손을 잡았다.


"차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저씨의 손을 잡고 걸어갈 뿐이었다. 경찰서 건물 앞에서 나무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몇 분동안 고민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건 아저씨였다. 나무는 엄마 아빠 곁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난감해하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무 앞에 나타난 아저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무는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이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책상 몇 개를 눈으로 건너가자 나무 아빠와 나무 엄마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의 아빠와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가끔씩 입을 움직이며 어떤 말을 하고 있었다. 나무는 멈춰선 아저씨를 끌고 앞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아저씨는 나무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 아빠는 지금 바빠. 네가 가면 방해만 될 거야.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봤으니까 괜찮지? 아저씨랑 나가서 기다리자.“


나무는 괜히 고집을 부리며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사소한 반항의 표시였지만 아저씨는 나무를 타이르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나무는 아저씨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가 끝났다. 나무의 엄마는 나무를 보자마자 나무를 아주 세게 끌어안았다. 나무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무 말 없이 엄마를 같이 끌어안았다.


"나무야. 우리 이제 새로 살 곳을 찾아야 해.“

"왜요?"

"놀이공원에 주인이 있었대."

"주인이 누군데요?"

"그건 우리도 정확히 몰라. 경찰 아저씨들이 안 알려주거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돼요?"

"글쎄, 그건 아직…."

"우리 이제 연극도 못 하는 거예요?“


나무의 말에 아빠가 나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빠는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듯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아예 새로운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그래도 우리 잘 할 수 있을 거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것 같다고, 나무는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꽤 오래전부터 정착해왔고 익숙해진 삶이었다. 나무에게 놀이공원 바깥에서의 삶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어쩔 때 나무는 자신이 놀이공원의 가게에 진열된 인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나무는 도시의 삶을 잠깐씩 경험할 때마다 숨이 막혔다. 넓지만 조용하고, 알록달록한 놀이공원에서의 삶은 나무에게 가장 안전한 삶이었고 위로가 되는 방식이었다.


"놀이공원 주인들한테 찾아가서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난 아직 어리니까 내가 부탁하면 거기서 계속 살 수 있게 해줄 지도 모르잖아요."

"나무야.“


이번에는 아빠가 나무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빠를 마주봤다.


"놀이공원이 곧 사라질 거래. 놀이공원의 주인들이 놀이공원을 전부 밀어버리고 큰 아파트 단지를 만들거래. 그래서 우리가 나가야 하는 거야."

"미안해, 나무야.“


나무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나무의 엄마가 나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무는 엄마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건 지금 나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무는 자리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아저씨와 엄마, 아빠는 그런 나무를 둘러싸고 서서 연신 한숨을 쉬어댔다.


"그러게, 그냥 평범하게 살자고 했잖아. 고집부리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아저씨는 화를 내는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나무의 아빠를 향해 꾸짖었다. 나무의 엄마는 그런 아저씨를 손으로 툭 쳤다.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무의 옷 소매가 눈물로 축축하게 물들었다. 나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움직이지 못하고 그곳에서 울기만 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가끔가다 복도를 지나가는 남자들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다.


"뭔일이래?"

"폐놀이공원에서 몰래 숨어들어가서 살았다잖아. 참내.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나 몰라. 관리가 제대로 안 된거지.“


혀를 끌끌 차며 나무네 가족들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을, 나무는 분명히 보았다.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눈물 사이로.


*


언젠가 함께 가정부 일을 했던 동료한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애를 낳는 건 믿기지 않을만큼 행복에 겨운 축복이라고. 물론 출산이라는게 몸이 두 동강나는 것처럼 몹시 아프고 고단한 일이지만서도, 갓 태어난 자식의 얼굴을 보면 너무나도 신기하고 또 신기해서 그런 고통이 금방 잊혀진다고 말이야. 마치 어릴 때 어디선가 돈을 주고 사온 새끼 강아지를 보고 귀엽고 신기해서 자꾸 쳐다보게 되는 그런 것과 비슷한 마음이랄까. 처음에는 순수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이런 아이가, 눈과 코와 입, 통통한 볼을 가진, 피부결도 놀랄만큼 부드러운 이 인형 같은 아이가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정말이지 믿기지를 않았다고 했어. 내 자신이, 이 세상이 마치 마법처럼 느껴진다고 했었지.


그 친구는 그렇게 말했어. 태어난 아이가 힘차게 우는 걸 보고 있으면 배가 부풀어오르는 것이나, 그 부풀어오른 배에서 발길질을 하는 걸 느끼는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감정이 솟아오른다고. 나는 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꿈을 꾸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단다.


엄마가 된다는 것.


글쎄,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그걸 꿈꿔왔다. 어릴 때는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지. 어쩔 땐 그게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나는 여자를 사랑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우연히도 네 아빠를, 내 남편을 만나게 됐지. 모든 것은 우연과 상상으로부터 시작됐어. 처음에는 부족하고 모자른 날 채워줄 완벽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저 상상만 해왔을 뿐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정말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네 아빠는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어. 내가 가진 모든 결점을 아무런 오해 없이 받아들여주고 보듬어줬지.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더구나. 너무 행복해서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그래, 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렇게 생각할 거야. 삶이 행복하니까, 이 행복한 삶을 아이에게도 선물해주고 싶어서 아이를 낳고 싶어지는 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난 내 삶이 불행하다고 느꼈어. 어릴 때부터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단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지. 장학금 덕에 어찌해서 겨우 대학은 들어갔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온갖 알바를 해오며 버티던 몸이 망가져 버린 탓에 한동안은 제대로된 일상도 살아내기가 어려웠어. 결국 난 졸업도 하지 못한채 대학을 그만뒀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어. 정말 좋게 변해 갔지. 나와 알고 지냈던 친구들은 좋은 직업을 얻어 자기들의 삶으로 하나 둘 사라졌어. 그 자리에 늘 그대로 똑같이 서 있는 건 나뿐이었어. 변변치 않은 일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한없이 불행의 늪으로 빠져갈 때, 누군가가 내게 물었어. 아는 분이 일할 사람을 구하는데 해보지 않겠냐고. 좋은 조건이라고 나를 설득했지.


나는 알겠다고 했어. 처음에는 남의 집에 들어가 일을 한다는 게 불편하게도 느껴졌지만, 글쎄, 결국엔 그런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져버릴 정도로 무뎌지더구나. 


그 거대하고 호화로운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나는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이른 시기에 너무 많이 한 고생 때문에 망가진 몸은 주기적으로 말썽을 부렸고,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아본 적이 없었어.


내게도 꿈이 있었는데. 그땐 살아볼만 했는데.


이 말만 습관처럼 되뇌일 뿐이었지. 못된 마음일지는 몰라도, 이 말은 어느 순간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으로 번져갔어. 내가 아이를 낳고 싶었던 건 내 삶이 행복하고 충만해서가 아니었어. 불행하고 실패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 대신 성공한 삶을 살아줄 다른 존재가 필요했던 거야. 나의 원함을 이뤄줄 사랑스러운 작은 존재.


사람은 정말로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야.


네 아빠에게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한 이후로 일 년을 넘게 노력했지만 좋은 소식은 찾아오지 않았단다. 우리는 그때서야 병원에 갔어. 누가 문제일지 모르니 함께 검사를 받았지. 초조한 시간들이 지나고 받아든 결과는 암담했단다. 내 몸에 아주 커다란 혹이 있었어. 그것도 세 개나. 난소와 자궁에 퍼져있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어. 운이 좋으면 임신을 할 수 있겠지만, 수술을 하고 나면 아이를 가지기가 힘들 거라고 의사는 말했지. 수술을 반드시 해야만 하냐고, 애원하며 의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어. 수술을 하지 않아도 혹의 크기가 커서 아이를 가지긴 어려울 거라고 하더구나.


결국 나는 배를 열고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했어. 어차피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크기가 커서 악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혹은 없애는 게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지. 수술이 끝나고 입원해있던 삼일동안 매일 같은 꿈을 꿨어. 꿈속에서 나는 만삭이었고, 진통을 겪다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땐 눈도 못 뜨는 핏덩이 같은 작은 아이가 내 품에 있었고, 네 아빠가 옆에서 날 보고 웃어주고 있었어. 그러다가 아랫배에 칼이 들어오는 통증에 몸을 잔뜩 움츠리다가 잠에서 깨어났어.


깨어났을 때 나는 여전히 병실에 누워있었어. 그럴 때면 꼬맨 수술 자국이 남은 부위가 욱신욱신 아팠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염원이 더욱 커지는 건 못된 욕심인걸까, 안쓰러운 바람인걸까. 나는 늘 헛헛한 배를 끌어안고 세상에 영영 없을 나와 남편의 아이를 상상했어. 만약 그 아이가 태어난다면 누구를 닮을까. 머리속으로 아주 자세히 그려보기도 했지. 그러다가 자주 울었어. 이제 나의 삶의 빈 곳을 채워줄 무언가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몹시 쓸쓸하고 허망한 기분이었지. 하루 아침에 죽음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된 것 같았어. 다음 날 눈이 떠지면 그대로 살아가고, 그 다음 날에도 더 큰 걸 바라지 않고 그저 이렇게만 살아지기를 가볍게 바라면서.


그러던 와중에 널 만난 거란다, 아가야.



*


너는 우리에게 찾아온 선물이야. 신이 있다면 나를 안쓰럽게 여겨 널 보내주신 게 분명해. 너는 내가 신이 있다고, 세상에도 공평함이라는게 존재한다고 믿게 해 준 존재였단다. 나는 그런 너를 애지중지 아껴서 키우고 싶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서 키우려고 했고, 세상의 때는 최대한 묻히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네가 사는 만큼 나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너를 지켜야 하니까.


너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무서웠어. 어쩌면 너는 운이 나빠 너를 때리거나 괴롭힐 누군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또 어떤 사고의 현장에 네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너를 세상의 운에 내맡길 자신이 없었어. 다른 사람들은 이게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 아이는 역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라는 걸 배울 수 없다고 말이야.


그렇지만 난 그렇게 하고싶지 않았어. 내게 배신감과 상처를 안겨준 세상. 모든 것을 그저 운이라는 흐름에 맡겨버리는 그런 곳에 널 보내는 게 두려웠어.


나는 너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키우기 위해서 오랫동안 남편을 설득했어. 남편은 처음에 날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를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함께 결심했던 건 네 할아버지가, 그러니까 네 아버지의 아버지가 예상치도 못한 사고로 돌아가신 직후였어.


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줘야 할게 있다고 찾아오셨었지. 함께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탔다가, 술에 취한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크게 치여 정신을 잃으셨단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셨어. 우리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온 몸이 망가진 그 모습을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게 됐지. 남겨진 건 할아버지가 쥐어주고 간 두툼한 돈봉투 뿐이었어.


우리는 그때부터 널 위한 우리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어서 살아가자고 결심했어. 그 누구도 너를 위협하고 해칠 수 없는 그런 작은 온실. 네 아빠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했단다. 언제부터 이렇게 끔찍해졌는지, 누구를 원망해야할지 알 수 없는 삶보다 차라리 온실 속에서 자라나는 화초의 삶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글쎄, 어쩌면 그건 위험한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어찌됐든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에 익숙해져야만 했던 걸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길을 선택했던 것처럼 말이야.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봤어. 그런 길을 선택하는게 오히려 용기 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아무도 해보지 않아서 그 길을 가보지 못하는 거라고.


그때부터 우리는 버려진 곳을 찾아서 헤맸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곳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우리는 우연히 소식을 들었단다. 네 할아버지가 아주 오랫동안 일했던 놀이공원이 오래전부터 문을 닫은 채 버려졌다는 소식을. 우리는 널 데리고 당장 그곳으로 찾아갔어.


아주 더럽고 쓸쓸하고 황량한 곳이었지. 바닥에는 정체 모를 쓰레기들과 전단지들이 뒹굴고 있었고, 놀이기구들은 멈춘지 오래되어서인지 그새 색이 바래있더구나. 군데군데 비가 여러번 내렸지만 아무도 청소하지 않아서 빗자국이 남아있었어. 덜 마른 비의 물기 위에 새카만 먼지들이 오랫동안 쌓이고, 다시 그 위에 비가 내리고. 그렇게 점점 낡아가고 있었어.


우리는 그 틈으로 걸어들어가 가장 깨끗한 곳을 발견했단다. 맞아, 우리가 오랫동안 지냈던 인형 가게였어. 그곳 역시 오래된 먼지들로 가득했지만 자물쇠로 잠겨있어서인지 조금만 청소해도 지낼 만할 것 같았지. 사람의 흔적도 가장 희미하게 남은 곳이었어.


네 아빠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몇 번을 울었어. 아마도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였을까.


우리는 그곳에서 네게 동화 같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망가진 놀이공원을 청소했단다. 그곳을 깨끗이 쓸고 닦는 동안 내 마음의 무언가도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았어. 내 손으로 직접 만지며 관리한 곳에는 늘 나의 흔적이 남았고, 그렇게 그 공간에 대한 정이 쌓이고 익숙함이 생기더구나. 처음엔 낯설고 낡아보이기만 했던 그곳은 점점 우리의 공간이 되어갔어.


우리는 네게 할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가 이곳에 왜 살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어. 아니,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지. 내가 널 태어나게 한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네가 벌써부터 많은 것에 실망하고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따가운 햇빛을 받아도 늘 부드러운 피부로 힘차게 뛰어다니는 네게 우리가 어떻게 그런 걸 말할 수 있었겠니.


그러나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고 언제까지나 확신하기가 어렵겠구나, 이제는.


**


"내일 오전까지 짐들은 전부 치워야 됩니다. 부지 주인이 요구한 사항이에요. 어차피 곧 있으면 공사도 시작되고요.“


성가시다는듯 날리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경찰을 나무는 힐끗 쳐다봤다. 그 앞에서 나무의 엄마와 아빠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무는 괜히 엄마의 손목을 꽉 잡았다. 의식적으로 힘을 세게 주었지만 엄마는 나무를 쳐다보지 않았다.


"일단 임시로 우리 집으로 와. 방은 두 칸이지만 잘 곳은 있어야지."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지금 미안한 거 따질 때야? 나무 생각해서라도 군말없이 쫓아와. 차로 옮기는 거 도와줄 테니까.“


나무 아빠의 친구는 여전히 화가 난 말투였다. 나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빠는 여태 나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삭막한 건물을 빠져 나오자 겨우 숨이 트였는지 나무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무의 엄마는 그런 나무를 잠시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지만 곧 나무의 숨소리가 원래대로 돌아가자 안도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어디 있어?"

"차에 있겠다고 했어요.“


나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있잖아요,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뭘?"

"여기로 오는 길에 아이랑 같이 본 건데, 전봇대에 달린 모니터에 아이를 찾고 있다는 실종 전단이 나오고 있었어요. 아이에 대해서 엄청 자세하게 적어두었더라구요."

"뭐? 어디에?“


나무는 엄마와 아빠의 손목을 양손으로 잡고 그들을 이끌었다. 나무 아빠의 친구도 그들의 뒤를 따라 자연스레 쫓아왔다.


"여기에서요.“


나무는 아까 아이와 함께 한참을 서 있던 그 전봇대 앞에 섰다. 전봇대에 달린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아이와 함께 봤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찾는 실종 전단이 나오길 기다렸다.


"여기서 나왔던 거 맞아?"

"네. 분명해요. 여기서 뿐만 아니라 저기랑 저기, 근처에서도….“


나무는 손가락으로 주변에 세워진 전봇대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전봇대의 모니터들에서는 동일한 광고 영상들만 차례대로 반복해서 재생될 뿐,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의 실종 전단은 나오지 않았다.


"잘못 본 거 아냐?"

"그럴리가 없어요. 심지어 여러 번 봤는 걸요."

나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움직이다가 입술을 물었다.


"차로 가보자.“


문득 나무의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불안함이 담겨있었다. 나무의 아빠는 곧바로 그 불안함을 알아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에서 네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이야!“


차에 돌아왔지만 아이는 없었다. 나무의 엄마와 아빠는 예상했다는 듯 탄식하고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나무는 초조해진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주차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아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무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울부짖었다.


"나 때문이에요. 아이를 혼자 두고 오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런 거 아니야. 아이 괜찮을 거야.“


나무의 아빠가 나무를 끌어안았다.


"경찰서에 가서 이야기할까요?“


나무가 훌쩍이며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나무의 엄마와 아빠는 나무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리다 서로를 바라봤다.


"아냐. 그건 아이가 바라지 않을 거야. 게다가 우리가 가족이 아니라 아이와 무슨 관계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실종신고를 하는 것도 좀 복잡해질 거고."

"아빠 생각도 마찬가지야."

"그럼 어떡하죠?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어떡해요. 이렇게 말 없이 사라질리가 없는데.“


나무가 울먹이자 나무 아빠가 다시 나무의 등을 토닥였다.


"일단 집으로 가보자. 아이가 거기로 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 만약 가서도 아이를 못 찾으면 아이의 집에 찾아가보자. 아이네 집 어딘지 아니?"

"…네. 저번에 아이가 집으로 갔을 때 혹시나 싶어 주소를 알려줬어요."

"빨리 가보자.“


나무는 불안한만큼 아빠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옷의 가장자리가 나무의 손바닥 안에서 주름을 만들며 한없이 오그라들었다. 나무의 손가락이 새하얗게 변했다. 힘을 줘서 피가 통하지 않은 탓이었다. 나무의 아빠는 나무를 잠시 내버려둔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 나무의 손을 가져와 펼쳤다. 나무의 손바닥에는 손톱 자국이 나 있었다.

나무 아빠의 친구와 나무의 엄마, 아빠는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나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급하게 운전대를 잡았고, 나무의 아빠는 조수석에서 스쳐지나가는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의 엄마는 나무의 어깨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나무는 흔들리는 차의 진동을 느끼며 몰려오는 피곤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천천히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몸과 마치 붓으로 막 칠한 것처럼 번져서 흩어지는 바깥의 풍경.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을 현실이 아닌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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