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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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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나무네 가족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이제는 집일 수 없는 곳. 놀이공원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차 두어대와 포크레인이 세워져 있었다. 안에는 사람도 없었고 주변에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무는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찾아와 자신들을 위협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무와 나무의 엄마가 놀이공원을 몇 번이나 돌아다니며 아이를 찾았지만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별 수 없이 둘이서 인형 가게로 돌아가자 나무 아빠와 그의 친구가 아이를 찾았냐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나무의 옆에 아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무 아빠와 그의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나무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목구멍이 부풀어올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울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참으며 버텼다. 엄마와 아빠 또한 자신처럼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무네 가족은 인형 가게에 널린 짐들을 옮기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로지 거친 숨소리와 왔다갔다하는 발소리, 짐을 옮기는 사소한 소음만이 가득했다. 짐들을 전부 모아 단단히 묶어 가게 앞에 옮겨두었지만 한번에 다 옮길 수는 없었다. 나무 아빠 친구의 차로 한번에 옮기기에는 나무네 가족이 꾸리고 있던 살림이 많았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처음 짐을 옮길 때 나무 아빠만을 데리고 출발했다. 나무의 엄마가 자신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나무 아빠와 그의 친구가 둘이서 먼저 빨리 옮겨 놓는게 훨씬 편하다며 나무의 엄마를 말렸다. 결국 나무의 엄마와 나무는 가게 앞에 놓인 짐 옆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게 되었다. 나무의 엄마는 출발하는 나무 아빠의 친구에게 연신 천천히 운전하라며 주의를 줬다.


하늘을 올려다 본 나무의 눈에 별 몇개가 보였다. 나무의 엄마는 그런 나무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별이 꽤 많이 보이네."

"응."

나무는 온통 아이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무의 머리 속에는 아이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자주 떠올랐다. 아이가 자신의 아빠를 죽이고 왔다고 했던 그날, 아이의 얼굴에서 봤던 표정이었다. 나무는 그날 아이의 표정을 보고 아이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차라리 아이가 집에 무사히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무가 초조하게 다리를 흔들자 나무의 엄마가 나무의 손을 잡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아빠 친구의 차가 가게 앞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열심히 짐을 차에 옮겼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나무의 얼굴에서는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머리 속에 가득차면 땀줄기가 흐르면서 차가워지길 반복했다.


짐을 다 옮기고 나서야 나무는 전율하며 주저앉았다. 그때서야 몸에 한기가 조금 돌기 시작했다. 몸에 들러붙은 습기가 차가운 공기로 빠르게 식었다. 바람이 불면 뼛속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전부 끈적한 몸이 되어서야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무 아빠 친구의 집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났다. 짐을 전부 옮기자 방의 크기가 반 정도는 넘게 줄어든 것 같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 때문에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나무는 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눈꺼풀을 위로 올려떴다.


"지금 나가면 해뜰 때까지 집에 못 올 수도 있어. 괜찮겠어?"

"응. 괜찮아요."

"너무 피곤할 거 같으면 여기서 자. 엄마랑 아빠가 다녀와 볼 테니까."

"갈 수 있어요. 제가 가야 해요.“


나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나무의 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무의 아빠는 두꺼운 외투를 하나 더 입고 방 구석에 쌓아둔 짐을 뒤적거렸다. 몇 번 짐을 들춰보다가 가방을 꺼낸 나무의 아빠는 가방 안에 지갑과 손전등을 집어넣었다.


"나도 같이 가."

"뭔소리야. 너는 여기 있어. 우리 여기 와서 신세지는 것만으로도 미안해 죽겠는데, 어디까지 쫓아올라고?"

"무슨 일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그런다. 너를 내가 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나무 아빠의 친구는 투덜거리며 허리춤에 양 주먹을 갖다댔다. 나무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두 사람이 시도때도 없이 티격태격 싸우는게 신기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각자의 물건을 챙겼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차 키가 있는 걸 확인하고 현관 앞에 발을 내밀었다.


턱, 턱, 턱.


바깥에서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신발을 신으려다 말고 가만히 멈춰서 현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여러 개의 소리로 나뉘어서 들렸다.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걷고 있는 소리였다.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를 넘겼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경계하는 몸짓을 보였다. 덩달아 나무네 가족도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발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긴가?"

"더 들어가봐, 저….“


꽤 가까운 곳에서 남자 두 명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맨발로 현관문 앞에 바싹 붙었다. 이 골목에 있는 집들은 전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서 누군가가 찾아올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이런 깜깜한 새벽 시간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질리는 만무했다.


쿵, 쿵, 쿵.


현관이라기에는 얇은 알루미늄 현관문이 세게 흔들리며 파열음을 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방문객이 나무 아빠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네 사람은 동시에 숨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봤다. 전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새에 다시 한 번 파열음이 들렸다. 쿵 쿵 쿵. 곧이어 낯선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나무 아빠 친구와 나무네 가족은 낯선 이의 방문에 응답해야할지, 없는 척 숨어있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이어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쿵.


"경찰입니다!“


문을 살며시 열자 경찰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사복 복장의 남자 세 명이 현관으로 불쑥 몸을 내밀며 들어왔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그들 중 누군가가, 혹은 그들 전부가 경찰증을 내밀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경찰증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들을 급히 막아 섰다. 그러나 남자 셋의 힘을 한 번에 버텨내기는 쉽지 않았다.


나무 아빠의 친구가 현관 안 쪽의 방바닥으로 넘어지듯 뒤로 물러서자 남자 셋은 아예 현관 안 쪽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마치 바깥에 소란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듯, 이미 충분히 고요한 주변에도 경계를 하는 눈치였다. 나무는 아빠의 등 뒤에 서서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다.


"윤경미 씨?"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네 사람을 차례대로 훑어보더니 나무의 엄마를 보고 말했다. 그때부터는 남자 셋의 시선이 전부 나무의 엄마에게로 꽂혔다. 나무 엄마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윤경미인데요."

"십 년도 더 전에 아이를 훔쳐가셨죠?"

"네?"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윤경미 씨가 아이를 훔쳐가셨다고요."

"그게 무슨….“


한 발 물러나 있던 나무 아빠의 친구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낯선 남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나무 아빠는 낯선 남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무를 더 깊이 숨기려고 했다.


"당신들 경찰 맞소?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경찰증도 없이!“


나무 아빠의 친구가 가슴팍을 내밀며 그들에게 다가가자 낯선 이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가벼운 손짓만으로 나무 아빠의 친구를 뒤로 넘어뜨렸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경찰증을 내놓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괴로워하는 나무 아빠의 친구를 나무의 엄마가 옆에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 그들을 면밀히 살폈다.


"무슨 일 때문에요? 저를 잡아가기라도 하시려고요?"

"뭐, 협조만 잘 해주면…."

"그니까 무슨 협조요?“


나무 엄마의 말을 듣고는 맨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밤인데도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아이를 돌려받았으면 합니다.“


나무의 엄마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놀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나무 엄마를 향해 선글라스를 벗어보였다.


"오랜만이죠? 우리 본 적이 있을 텐데.“


그 남자였다. 나무가 말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했던 때, 나무를 버리고 갔던 남자. 남자의 얼굴에는 그전에 없었던 주름살이 가득했다. 그리고 오른쪽 눈썹 아래에 오래되어보이는 흉터가 있었다.


나무 엄마가 뒷걸음질치며 나무 아빠에게 손짓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나무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제 애를 찾으러 왔어요. 이놈들 이거 경찰 맞아요. 야, 보여드려.“


남자가 나머지 두 사람의 어깨를 툭 밀었다. 그때서야 그들은 외투 안쪽에서 경찰증을 꺼내 내밀었다.


"엄연히 경찰 업무라기에는 좀 그렇고… 사적인 업무랄까요?"

"그게 무슨 얘기에요?"

"그니까, 지금 우리가 얘기가 잘 되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거다 이 말이에요."

"나는 아이 못 돌려줘요."

"예?“


남자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무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자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곧이어 남자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감정의 변화가 노골적으로 느껴질만큼 격렬한 변화였다. 나무 엄마는 똑바로 남자의 눈을 쳐다봤다. 보이지 않는 실랑이가 이어지다가, 나무의 엄마가 남자의 어깨를 거센 힘으로 밀쳐내며 바깥으로 나뒹굴었다.


"못 돌려준다고!“


그러더니 양팔로 남자의 목덜미를 세게 조였다. 남자는 바닥에서 뒹굴며 켁켁거렸고, 당황한 나머지 둘은 어찌할 줄 몰라하다가 나무 엄마의 등 위로 덤벼들었다. 그걸 본 나무 아빠는 나무의 손을 나무 아빠의 친구에게 넘겨주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나무 아빠의 힘에 밀려 현관 너머 골목으로 나자빠지는 동안, 열린 문 틈으로 나무 아빠의 친구가 나무의 손을 잡고 뛰쳐나갔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으로는 허리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나무의 손을 꽉 붙잡은채 전력을 다 해 뛰었다. 나무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아저씨의 손아귀 힘에 괴로워하며 팔을 흔들었지만, 그들은 그 상태로 멀리 뛰어갔다. 나무는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가며 폐가 터질 것 같은 고통에 눈물이 났다. 숨이 차오르고 무릎이 발걸음마다 강한 충격으로 진동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결코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그들은 멈췄고, 그들의 눈 앞에는 나무 아빠 친구의 차가 있었다. 본능처럼 차가 있는 곳까지 뛰어온 것이었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숨을 몰아 쉬며 운전석에 올랐다. 나무 역시 훌쩍이며 말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엄마 아빠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에 나무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무는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까지 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모르는 상황에 대한 긴장감으로 나무의 몸이 떨렸다.


"아저씨, 그 사람들은 다 뭐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해요? 잘못되면 어떡하냐구요."

"나무야. 엄마랑 아빠는 무사할 거야. 분명히. 아저씨도 그렇게 믿으니까 너 데리고 나온거야. 아저씨가 이유없이 너네 엄마 아빠 버려두고 나올리가 없잖아.“


나무 아빠의 친구는 나무의 얼굴을 몇번 쓰다듬어주고 안전벨트를 맸다.


"아이네 집 주소 어딨어?“


나무는 휴대폰을 꺼내 아이와의 문자 내역을 켰다. 발신된 문자 기록만으로 가득한 최근의 페이지로부터 스크롤을 쭉 올리자 아이가 보내준 주소가 보였다.


"여기요.“


나무 아빠의 친구는 휴대폰 화면에 적힌 주소를 그대로 자신의 휴대폰에 옮겨 지도 어플에 위치를 검색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경로 탐색이 완료되자 나무 아빠의 친구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되는 거예요?“


만약 경찰에 신고하는게 가능했던 거라면, 이미 아저씨가 신고를 했을 거라는 걸 나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없어도 나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나무의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대답 없이 한숨만 쉬었다.


"미안하다, 나무야.“


그 뒤로 나무와 나무 아빠의 친구는 아이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무는 조수석에 앉아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묵묵히 운전만 할 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뜨고 나무 아빠의 친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기 직전 골목 한쪽의 빈 공간에 차를 세웠다. 시동이 끊기자 아주 미세한 차의 소음이 멈췄고, 어색한 고요함이 시작됐다. 그 상태에서 나무 아빠의 친구는 울고 있는 나무의 어깨를 잡고 한참동안 나무를 쳐다봤다. 나무가 눈물을 그치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무야."

"네."

"너한테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 이야기들이 있어. 만약에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오히려 네 엄마랑 아빠한테 안 좋은 일이 될지도 몰라."

"…왜 그런 거예요? 엄마랑 아빠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그건 지금 당장 말하기가 어려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어찌됐든, 엄마랑 아빠가 너를 엄청나게 사랑하신다는 거야. 그건 나무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나무 아빠의 친구가 나무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 괜찮아질 거야. 엄마 아빠를 잘 믿고 기다리면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우리는 기다리면 돼. 아저씨랑 아이 찾아서 같이 기다리자. 엄마랑 아빠도 그걸 제일 원할 거야.“


나무는 처음 들어보는 아저씨의 자상한 말투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오며 느꼈던 엄청난 불안한 감정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무 아빠의 친구는 나무의 안전벨트를 풀어주고는 나무의 등을 톡톡 두드려줬다. 나무는 아저씨의 따뜻한 손길이 몸에 머물렀다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나무는 겁이 났다. 나무에게 엄마와 아빠는 곧 세상이었고, 나무는 그 세상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초로 그 세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무는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렇게도 갑작스럽게 흔들리는 걸까.


나무는 한참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자신의 작은 발등을 바라봤다.



4부 재생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에 뜨는 해는 익숙하지 않은데.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듯 몸이 뻐근했다. 팔과 다리의 관절들이 묵직했고 근육은 한동안 쓰이지 않았던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뚜둑, 하는 작은 소리들과 함께 몸이 움직여 졌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부터 천천히 유연성을 되찾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방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양말을 신은 발이 작고 둔탁한 마찰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형광등을 켜자 바깥의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던 창문 밖의 가로등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바로 눈에 들어온 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나는 볼을 만지작거리며 거울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게, 뭐지.


핏줄이 비칠 만큼 아주 얇은 피부에 마치 사람 손가락 모양처럼 생긴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자국을 없애려고 손가락으로 볼을 문질렀다. 그러나 빨간 자국은 점점 더 커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무언가에 눌려있던 것 같았다.


볼을 만지기를 그만두었다. 나는 금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목덜미. 목덜미에도 역시 빨간 자국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얇고 긴 자국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묶었던 걸까. 정확히는 내 목에 무언가를 묶어놓았던 것 같았다. 얼굴에 뭘 씌워놓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역시 손가락으로 목의 자국을 문질러봤다. 목에 있는 자국은 빨갛게 흔적이 남은데다가 꽤 깊은 굴곡의 궤적으로 남아있었다. 언뜻 멀리서 보면 목에 주름이 생긴 것 같았다. 심상한 표정으로 자국을 만지다가 우연히 시선이 발로 향했다.


양말. 양말이 새카맣게 더러웠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 쭈그려 앉아 발을 들어 자세히 들여다봤다. 무슨 흔적일까. 발 뒤꿈치 쪽에는 양말의 천이 닳아 구멍이 나 있었다. 잠든 채 끌려온 걸까. 발이 바닥에 끌려서 이런 구멍이 났나. 구멍 안 쪽의 발 뒤꿈치를 살펴보니 쓸린 상처가 보였다. 그때서야 욱신욱신,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했다. 손에 힘을 주어 뒤꿈치의 상처난 부분을 양쪽에서 꾸욱 눌렀다. 그러자 송골송골 작은 핏방울들이 맺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양말을 벗어 맺힌 핏방울들을 닦아냈다. 닦은 피를 확인하려고 양말을 쭉 펼쳤다. 새카맣게 더러운 자국들과 아주 작게 남은 핏자국. 그리고 발목 부분에 또 다른 색의 자국이 보였다. 새벽이라 잠이 덜 깬 탓인지 무슨 색인지 곧바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양말을 얼굴 앞까지 가져와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초록색.


초록색 얼룩이 양말에 찍혀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갑자기 목 뒤가 뻐근해지며 기분 나쁜 두통이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고통이 맥박을 따라 목 뒤에서 관자놀이까지 천천히 올라왔다.


나는 강박적으로 양말을 눈으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초록색의 얼룩은 발목에만 남아있는 게 아니었다. 양말의 곳곳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흔적으로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눈이 빠질듯이 양말만 쳐다보자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심각한 두통은 구역감으로 이어졌다. 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입을 틀어막고 다급히 방문을 붙잡았다. 빠른 손길로 문고리를 돌렸지만 문고리는 힘없이 돌려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잠금 장치로 잠긴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문을 강제로 막아둔 것 같았다. 좌절할 틈도 없이 구역질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침대 옆에 놓인 휴지통으로 간신히 기어간 나는 휴지통에 얼굴을 쳐박았다.


목구멍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몸 안의 장기들이 쏟아질 것처럼 몸이 강하게 들썩였다.

어지러운 시야를 겨우 붙잡고 휴지통에서 얼굴을 꺼내자 휴지통 안에 초록색 액체가 보였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다시 구역질이 시작됐다.


끄으으윽. 끄윽. 끄으윽.


이상한 소리가 가슴통을 울렸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구역질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속이 가라앉아서 토악질이 멈춘건지, 숨을 쉴 수 없어서, 더 이상 올려낼 게 없어서 억지로 멈춰진 건지 알 수 없었다.


휴지통에서 고개를 들자 강한 현기증이 머리를 스쳤다. 눈 앞에 보이는 방 안의 풍경이 순간 순간 엉뚱한 곳으로 움직이며 시야를 벗어났다.


그것들을 쫓아 가려 시선을 열심히 움직였지만 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이 감겼다.


*


다시 눈을 떴다. 처음에는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속눈썹의 위 아래로 찐득한 것들이 말라 붙었는지 눈꺼풀을 움직이는게 힘들었다. 눈을 비비자 눈에서 노랗고 진득한 눈물이 묻어나왔다. 억지로 눈을 뜨자 시야가 흐려지면서 한참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통스러웠다.


소매가 젖을 정도로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내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이 나서 벌떡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또 다시 아까와 같은 강한 현기증이 찾아올 것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 나자 오랜만에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 났다.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허공을 바라봤다.


언제 내가 불을 껐나. 방 안은 어둑했다. 그렇지만 방 안에 스미는 빛의 양이 꽤 되었다. 이 정도면 오후쯤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잤어?“


놀란 몸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고개가 잠깐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유연하게 다시 몸을 움직여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창문 바로 앞에서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간접적인 빛들이 그의 얼굴을 오히려 더 어둡게 만드는 듯했다.


"잘 잤어요."

"아픈 데는 없고?"

"몸이 조금 뻐근해요. 아참, 잠에서 깨고 나서 눈에서 눈물이 났어요. 눈에 염증이 생겼나봐요."

"그러니?“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코앞에 다가올때까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한참 흘리고 난 뒤 건조해진 눈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방 안은 충분히 어두웠다.


그러나 곧이어 남자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앞에 가까이 다가선 그의 옷에서 아주 미세하게 바나나향이 풍겼다. 나는 티나지 않게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표면이 거칠게 올라온 니트가 코 끝을 자극했다.


"지금은 괜찮은가본데.“


남자는 거칠게 내 고개를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가 멈칫하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쥐었다. 그리고는 두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열어젖혔다.


아빠였다. 나는 벌려진 눈꺼풀 사이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어느 순간 나의 그런 눈길을 알아챈듯 손가락을 떼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웃었다. 천천히, 여유롭게.


나 역시 아빠를 향해 웃어보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빠의 몸을 끌어안아 니트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긴장감을 숨기기 위해 느슨한 자세로 아빠를 안았다.


"밥 먹어야지. 너무 오래 잤잖아."

"배고파요.“


여전히 니트에 고개를 박은채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가슴에 힘을 주고 소리를 냈다. 허벅지에서부터 상체가 점점 떨리기 시작하자 나는 아빠에게서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괜히 발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려와. 준비 됐을거야.“


아빠는 활짝 웃더니 뒤돌아 방문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 아빠의 움직임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아빠."

"응?"

"저 얼마나 잤어요?"

"글쎄. 거의 이틀?“


아빠는 다시 웃더니 곧바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일어났어?“


거실로 나가자 주방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음이 들렸다. 식탁 앞에는 엄마가 앞치마를 맨 채 두 개의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나에게 눈인사를 건넨 엄마는 다시 뒤돌아 분주히 움직였다. 나는 말없이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의자는 방금 누군가가 꺼내 놓은 듯 한 사람이 앉을만큼 밖으로 나와있었다. 빈 공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아빠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자리에 앉았다. 곧 모든 음식이 차려지고 엄마가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엄마의 뒤에 열린 창문에서 오후의 강한 빛이 스며 들었다. 눈을 찌푸리자 엄마가 나를 보고 웃었다.


"눈부셔?"

"괜찮아요.“


그것은 해가 지기 직전의 빛이었다. 해가 지평선 밑으로 사라지기 전, 가장 붉고 밝게 발하는 빛. 나는 그 빛을 쳐다봤다. 순간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강한 두통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하얀 빛은 여전히 눈 안에서 어른거렸다.


식탁 위에 차려진 밥은 따뜻하고 맛있었다. 엄마와 아빠, 나는 언제나처럼 말 없이 밥을 먹는데에만 집중했다. 밥을 먹다가 가끔씩 엄마와 아빠를 쳐다봤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과 젓가락만 번갈아 들며 입을 우물거렸다.


밥을 먹는 동안 창문 너머로 보이던 강렬했던 빛이 빠르게 잦아들더니 곧 어둑해졌다. 꽤 오랫동안 젓가락을 들고 몇 개의 그릇을 왔다 갔다했지만 밥은 거의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먹을 것을 입에 집어넣고 한참을 씹어도 목구멍 안으로 넘기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밥을 먹다가 줄어들지 않은 내 밥그릇을 힐끗 바라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다 먹은 그릇을 들고 개수대로 향할 뿐이었다. 곧이어 아빠도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은한 바나나향이 다시 풍겨왔다.


"아빠."

아빠는 대답없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에요.“


내가 고개를 숙이자 아빠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고 점점 멀어졌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 건지, 왜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와 있는건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걸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 속에 존재하는 듯한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 나는 공포감과 일종의 혐오감을 느꼈다.


방으로 다시 들어온 나는 방문을 닫고 휴지통을 확인했다. 잠들기 전, 정확히는 쓰러지기 전 토해냈던 초록색 액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문득 한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나도 아빠나 엄마와 같은 존재인 걸까? 아니, 이건 의심해야할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인 걸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이 온몸을 지배했다가도, 동시에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만 같다는 답답함이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럴때면 심장과 팔, 다리가 폭발할 것처럼 경련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몸을 식히기 위해 창문 앞으로 뛰어가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문 밖의 하늘이 완전히 까맣게 변해있었다. 이제는 피부가 찬공기 때문에 열기를 잃은 상태였다. 나는 양손으로 반대쪽 팔을 문지르며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똑, 똑, 똑.


사려 깊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올려진 트레이를 든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해?“

"…달을 보고 있었어요.“


엄마는 트레이 위에 있던 잔과 작은 병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웃었다.


"이거 먹어. 약이야. 아직 많이 아플거야.“


엄마가 가까이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불쾌할만큼 손이 차가웠다.


"어서.“


엄마는 나를 침대에 앉히더니 작은 병을 입 가까이까지 내밀었다. 엄마를 힐끗 쳐다봤지만, 엄마는 내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익숙한 액체였다. 느끼한 향이 코를 타고 넘어왔지만 나는 눈을 꽉 감고 병 안에 든 걸 삼켰다. 엄마는 빈 병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깥으로 나갔다.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울렁거림이 계속되자 쓰러지기 전 몸의 감각이 떠올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머리로 뜨거운 열이 오르고 작은 소리들이 귀 안에서 크게 울렸다.


창문 바깥 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나는 창문 가까이로 다시 다가섰다. 다리가 떨렸다. 


멀리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계속 같은 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연히 그들을 발견한 이후로부터 그들은 몇 발자국 이상을 벗어나지 않고 같은 곳만 맴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들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실루엣이 낯설었지만 두려움이나 불쾌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점점 다가왔다. 3층 높이의 집 창문에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한 발자국씩 다가올수록 훨씬 더 커다랗게 보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얼굴이 더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나무와 나무 아저씨의 친구였다. 놀라며 두 눈을 계속 비볐지만 그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무로 보이는 실루엣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무가 한발자국 다가오자 가로등 불빛이 나무의 얼굴을 비춰 나무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무는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쭉 내밀고 나무의 입모양을 가만히 살폈다.


'나 가 자, 같 이’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고개를 세게 끄덕이고는 뒤돌아섰다. 속이 울렁거려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먹은 걸 전부 토해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비틀거렸지만 아무도 곁에 나타나지 않았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곧장 아빠의 서재로 다가갔다.


벌컥. 망설임 없이 문을 열자 책상 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는 열린 문 앞에 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거렸다. 곧 아빠의 얼굴 위를 하얗게 비추던 모니터 화면의 불빛이 사라졌다.


"아빠."

"무슨 일이니? 갑자기."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아빠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모든 게 다 기억이 나요."

"무슨 소리…."

"나는 분명 아빠를 죽였어요. 아빠 몸에서는 초록색 액체가 나왔고… 분명, 내가 아빠를 쓰러뜨렸어요. 그리고 난 도망쳤는데, 이렇게 집에 돌아와있어요. 뭔가 이상한 게 맞죠?“


흔들리는 아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더 이상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었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처럼 심장 소리를 연료 삼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는 당황한 듯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있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을 꾼거야."

"아뇨, 그렇지 않아요."

"요즘 들어 너 정말 이상하구나. 아무래도 병원 의사 선생님한테 약 용량을 더 늘려달라고 해야겠어."

"병원이요?“


아빠는 책상 옆의 서랍장을 열고 손을 움직였다. 곧이어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약 먹고 있잖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빠의 손에는 투명한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그 안에는 처음 보는 색의 알약이 몇 개 들어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갈색병이 있었다. 갈색병. 내게는 익숙한 병이었다. 아빠가 내게 가까워질수록 바나나향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하지 마요."

"약 먹자.“


아빠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자국 쯤 앞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몸을 수그려 재빨리 책상 쪽으로 뛰어갔다. 아빠가 내 팔을 잡으려고 빠르게 뒤돌아 섰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나는 사방이 책장으로 가득 둘러싸인 궁지에서 아빠가 가까워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빠는 갈색병을 앞으로 내밀며 다가왔다.


쾅.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옆에 세워져 있던 작은 책장을 넘어뜨렸다. 다가오던 아빠의 하반신 위로 책장이 쓰러지며 아빠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책장의 꼭대기에 높게 쌓여있던 묵직한 책들이 아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갈색병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바닥에 병 안에 든 액체가 빠르게 퍼졌고, 바나나향이 진동했다.


아빠는 책장 밑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컴퓨터를 쳐다봤다.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책상 앞으로 걸어가려고 발에 힘을 줬지만 발 뒤꿈치가 어딘가에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뒤를 확인하자 벽에 붙어있는 줄로만 알았던 커다란 책장의 사이가 조금 벌어져있었다. 그 틈을 들여다보자 희미한 빛이 보였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있던 책장이 한번 힘을 받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옆으로 밀려났다. 열린 통로 안에는 아주 짧은 입구와 그 입구에 쳐진 커튼이 있었다. 희미한 빛은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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