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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9)

*


"아이야, 일어나봐라.“


어깨를 잡고 흔드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방안은 햇빛으로 완전히 밝았다. 나무는 이미 잠이 다 깬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몇시야?"

"열한시 정도야.“


나무는 상냥하게 대답해주고 아저씨를 쳐다봤다. 나는 그때서야 몸을 일으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아저씨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안 잤어."

"정말요?“


아저씨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할 일이 있었어."

"피곤하시겠어요."

"그것보다도, 너한테 보여줄게 있어.“


아저씨는 옆에 몇 개의 선이 연결된 노트북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를 썼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아저씨가 가리킨 곳으로 천천히 기어 갔다.


"그 남자 말이야. 내가 좀 찾아냈는데….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것 중에 종이서류를 제외하고는 다 가져왔거든. 뭐, 애초에 가져올 수 있는 짐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 이게 다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거예요?"

"응. 지금 연결되어 있는 이 칩이 그 남자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라나, 실험이라나. 아무튼 그거에 관한 정보인 거 같아. 근데 거기에….“


아저씨는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힌 듯 갑자기 입을 닫았다. 아저씨가 무엇 때문에 이야기하기를 망설이는지 알 것 같았다.


"알아요. 제가 실험 대상이라는 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나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였대요. 어쩌다보니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애들 중에 제가 그 실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냥 운이라고 설명하더라구요. 그 남자는 이게 행운인 것처럼 얘기했어요. 적당히 여유로운 집안에서, 여유로운 부모한테서 자라게 됐다구요. 원래는 버려진 아이였는데….“

"그게 진짜야?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

"네."

"그리고 또 뭐라고 말하더니?"

"그 외에는 별 얘기가 없었어요. 제가 예상한대로 엄마와 아빠는 로봇이 맞았어요. 인공지능 로봇이요. 아, 이상한 건… 그 남자의 생김새가 제가 아빠로 알고 있었던 그 로봇하고 똑같다는 거였어요."

"그럼 그 이상한 작은 방에 버려져 있던 그 로봇이 네 아빠였단 말이야?"

"네. 아저씨도 보셨어요?"

"봤지. 그 남자를 묶어놓고 짐을 뒤지는데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있어서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어.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하네요. 왜 자기랑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 걸까요? 그 남자가 말하는 걸 들어봐서는 저처럼 실험 대상인 아이들이 몇 명 또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아이들의 아빠 로봇도 다 똑같은 생김새인 걸까요?“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아닌 거 같아. 너희가 자는 동안 저 남자가 하는 실험에 대한 데이터를 다 찾아봤는데, 자기랑 똑같이 생긴 로봇은 딱 하나였어. 나도 보고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럼 다른 로봇들은 다 다르게 생겼어요?"

"응. 다른 로봇들은 전혀 다른 생김새야. 그보다도 로봇과 실험에 대한 보고서를 몇 개 읽었는데… 좀 이상해."

"왜요?"

"뭐랄까….“


아저씨는 잠시 생각하는 듯 입술을 깨물며 천장을 쳐다봤다. 적당한 단어와 문장을 생각해내는 것 같았다.


"자기 로봇에 대한 집착? 그런 게 좀 느껴졌어."

"아무래도 자기가 만든…아, 만든 건 아니라고 했지. 자기가 주도하는 실험의 주인공이라서 그런 걸까요?"

"단순히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

"제가 한 번 읽어봐도 될까요? 다는 아니어도 몇 개만요. 아니면 한 개여도 좋아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망설였다.


"네가 이런걸 봐도 되는지 잘 모르겠네."

"괜찮아요. 이미 알게 된 게 많은걸요.“


내가 기운없이 웃자 아저씨는 말없이 노트북에 시선을 옮겼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던 아저씨가 내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한 번 읽어볼래?“


아저씨가 보여준 보고서는 내가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꽤 심각해보이는 전문 용어들이 가득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자 아저씨가 화면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이 부분을 보면 돼.“


아저씨는 보고서의 마지막 문단까지 스크롤을 쭉 내렸다.


'그렇다면 생각해봐야할 것은 로봇과 인간의 공통점보다도 다른 점일 것이다. 현재까지 지켜봐온 바로는 인간과 로봇 사이에 큰 차이점이 없다. 어쩌면 로봇이 훨씬 위대한 쪽에 속한다. 물론 학습의 방향에 따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서 아직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균 수준을 웃돌지 못하는 미달의 인간들은 로봇들이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달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능력이 없는 인간을 말한다. 몸이 아픈 인간들이나 정신이 건강치 못한 인간들은 노동을 할 수 없으며 사회의 인적 자원으로서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로봇은 언제나 자기의 몫을 할 수 있다. 로봇의 인간 대체 문제에 관해 회의적인 연구자들은 인간이 아프다면 로봇 역시 고장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병과 로봇의 고장은 해결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 인간의 병은 신체의 개별적 차이가 심해 고치기 난해하지만 로봇의 몸체는 일률적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오류 탐지기를 통해 하자를 찾아내서 즉시, 빠르게 수정할 수 있다. 따라서 로봇은 인간보다 사회에 더욱 유익하고 유리하다.

인간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나약하고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봇은 나약하지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다. 얼마나 우월한가. 얼마나 쓸모있는가. 나는 이 로봇들이 아주 위대한 물건들이라고 생각한다.‘


"어쩐지 소름이 돋네요.“


아저씨는 다시 노트북을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 화면을 몇 번 터치했다. 노트북 주변에 연결된 선들이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그러나 연결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도 읽어볼래?“


나무가 내 어깨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로봇과 인간의 차이점. 수명에 대하여.

우리 연구진들은 로봇의 학습에 한계가 있는 이유가 정해진 수명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온다고 추측하고 있다. 우리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인공지능 로봇을 사회화시켜서 완전한 인류의 대체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의 여부다. 여태 아쉬웠던 부분은 인공지능에 아무리 많은 정보를 학습시켜도 정보의 패턴화가 완전히 인간과 유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마치 제 3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괴물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는 어디에서 오는가.

로봇들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으니 관심사 또한 없다. 죽지 않으니 살아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삶에 대한 욕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기'가 부족하다. 온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살아남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발휘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른 구성원들과 경쟁하고 계급을 이루며 원만한 사회를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 로봇들은 이런 문제에 관련해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즉, 그들에게 죽음과 삶의 문제는 바깥의 문제이고 이것과 직결되는 자아 역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한정된 수명을 설정하고 인공지능에 한정된 수명, 즉, 자신은 언젠가 죽을 것이며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고 방식과 두려움을 학습시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반작용은 그들을 인간처럼 만들어줄 것이다.

만약 이 실험이 성공적일 시, 진정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것은 완벽해질 것이다.‘


나무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읽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읽은 기분이었다.


"비슷한 내용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어디에서?"

"아빠 서재에 있는 컴퓨터에서요. 그때도 이런 논문들이 있었거든요."

"그럼 그 남자가 네 집을 자주 드나 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럴지도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끔찍한 기분이 들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곳에서 멀쩡히-결코 완전하게는 아니었지만-빠져나온 것이 대단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들 외에도 정말 많아. 거의 사적인 일기 수준의 보고서들도 많은데, 그건 더 가관이야. 뭔가에 미친 사람 글을 보는 것 같았어."

"왜 이런걸 생각하게 된 걸까요?"

"그래서 이 사람 짐을 뒤지다가 발견한 이거.“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목걸이에 매달린 작은 카드였다. 카드의 뒤쪽에는 바코드가 있었다.


"아마 그 남자의 사원증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나봐. 이걸 바코드 리더기에 인식했더니 남자에 대한 정보가 뜨더라고.“


아저씨는 난생 처음 보는 특이한 기계에 카드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경고음이 크게 뜨더니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창들이 몇 개 떴다.


"으음, 이게 불법 개조 프로그램이라….“


아저씨가 난감해하며 몇번 화면을 두드리자 창들이 사라지고 남자에 대한 정보가 담긴 화면이 떴다. 칸이 나누어져 있는 하얀 면 위에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었다.


"여기 봐.“


이번에도 아저씨가 가리킨 손가락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작은 글씨로 적힌 남자의 부모님의 이름이 보였다. 윤명호. 백지현. 두 사람의 이름 앞에는 '故'라는 한자와 '2014'라는 숫자가 붙어있었다.


"이게 죽었다는 뜻이야."

"아…."

"근데 이름이 어딘가 익숙해서 찾아봤거든.“


아저씨는 또 다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저씨가 검색한 화면에는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몹시 닮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그 사진은 어떤 기사에 첨부된 사진이었다. '충격적인 죽음. 어느 부부의 사연'. 기사의 제목이 크게 보였다.


"그 남자의 부모야. 젊었을 때 이쪽에서 일을 했었는데, 전해듣기로는 유명한 사람들이었어. 부부가 같이 뇌과학 쪽을 연구하는 교수였거든. 성과도 잘 냈고… 어렴풋이 아들 하나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지. 근데 이 사람들이 유명한 이유는 단지 연구 성과가 좋아서가 아니야. 동반 자살. 너희들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만, 두 사람은 아내가 일하던 교수 연구실에서 같이 목을 매고 죽었어."

"…왜 죽은 건가요?"

"이유는 모르겠어.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죽은 얘기가 마치 신화처럼 돌아다녔지. 유서도 없이 동반 자살한 부부라…. 아, 그리고 이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숨이 차는 듯 숨을 두어번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목을 매려고 천장에 걸어둔 밧줄이 세 개였대. 한 사람이 더 죽었어야 했다는 거지. 소문으로는 경찰에 신고한 게 아들이라고 하더라고."

"그럼 그 남은 하나의 밧줄이 그 남자의 몫이었다는 거예요? 세 사람이 같이 죽으려고 했던 걸까요?“


나무가 깜짝 놀라며 물었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어린 아이가 뭘 안다고 죽으려고 하겠어. 기껏해야 초등학교도 못 들어간 나이였을 텐데. 아마도…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같이 죽으려고 했던 거 같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빠져나온 거겠지."

"어떻게 그런 일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그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자 묘하게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와 사진 속 두 사람. 셋은 놀랄만큼 많이 닮아 있었다.


"닮았어요."

"뭐가?"

"저 사진 속 남편 분이랑 제 아빠. 아니, 아빠였던 로봇이요."

"맞아. 그리고 그 남자랑도 아주 닮았지.“


나는 말없이 사진만 쳐다봤다. 어쩌면 아빠의 모습은 그 남자가 아닌 그 남자의 아버지를 본 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얌전해보이는 인상과 두꺼운 눈썹, 눈꼬리의 모양과 미소 짓는 얼굴이 내가 봤던 아빠의 모습과 많이 비슷했다. 나는 마치 내가 모르는 아빠의 예전 모습을 몰래 들여다본 것처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빠가 그리워서 아빠를 닮은 로봇을 만든 걸까요?“


허공을 쳐다보며 던진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무와 아저씨도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한숨을 내뱉었다.


"실험 대상이 된 아이들의 엄마 로봇 중에 저 분을 닮은 사람도 있겠죠?“


나는 손가락으로 사진 속 아내를 가리켰다.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모르는 거야. 네 엄마는 어땠니?"

"엄마는 아니었어요. 분명 다르게 생겼거든요."

"그냥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어. 맨 처음에 만드는 로봇은 자연스레 익숙한 사람을 본 떠서 만들게 되기도 하니까.“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아저씨는 노트북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가 켜져있던 창을 전부 손으로 터치해 껐다. 깨끗한 배경화면이 보이자 아저씨는 내 눈을 쳐다봤다.


"아이야. 네가 결정해야할 게 있어.“


내가 말없이 아저씨를 쳐다보기만 하자 아저씨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방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을 열고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엄마랑 아빠를 어떻게 할지 한 번 생각해봐라."

"어떻게 하다니요? 이제 다 끝난 거 아니에요?"

"글쎄, 끝났다기엔… 너도 갑자기 당황스럽지 않겠니."

"그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우선 실험을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봐. 나도 그 실험이 어디까지 깊이 연결되어있는 실험인지 알 수 없어서 뭐라고 확실하게 말은 못하겠다만, 그런 실험에 모든 걸 알고 있는 네가 계속 대상으로 남아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다만 네가 그 실험에 남아있고 싶다면…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 같긴 하지만…“


아저씨는 내 눈치를 보며 말을 하기를 망설였다.


"아닐 수도 있지. 그냥 아저씨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엄마랑 아빠를 어떻게 해볼지 생각해봐. 너도 알다시피 키는 우리한테 있어.“


아저씨가 다시 한 번 그 남자에게서 뺏어온 것들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게 있는 한 모든 선택권은 너한테 있는 거야."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천천히 고민해봐라. 널 위해서 뭐가 가장 좋은 일일지.“


아저씨는 혼란스러워하는 나의 팔을 붙잡고 힘을 주었다. 나는 그게 힘내라는 아저씨만의 표현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나무 역시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되는 얼굴로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선택이 내게 달려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떤 선택이 의미있는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로봇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만 생각했다. 그저 탈출을 하는 것,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목표일 뿐이었다. 만약 진실을 전부 알게 됐다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 문제는 그동안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


"배고프지? 도시락 먹을래?“


아저씨가 냉장고를 열자 겹겹이 쌓인 도시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아저씨 돈이 많으신가봐요."

"전혀. 혼자 살다보니 몇 가지에만 쓸모없이 돈을 많이 쓰는 거지.“


아저씨와 나무는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 도시락을 함께 꺼냈다.


입 안에 가득 넣고 씹는 도시락의 음식들은 나무와 엄마가 해준 음식들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나는 옆에서 급하게 도시락 반찬들을 집어삼키는 아저씨의 얼굴을 몰래 지켜봤다. 빠른 속도로 둥그렇게 올라온 볼과 턱을 움직이는 아저씨는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


사진 속에서 본 그 사람, 남자의 아버지의 얼굴은 여러날동안 내 머리속을 지배했다.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미소와 경직되어있는 표정. 그것은 내가 아빠로 알던 로봇의 것과 아주 비슷했다. 나는 그를 사진 단 한 장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후로도 계속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어떤 아버지였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왜 죽었을까. 그것도 스스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병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습관적인 두통이 주기적으로 날 찾아왔다. 강한 햇빛을 보거나 느지막한 오후가 되면 뒷머리와 관자놀이가 욱신욱신거리며 나를 바닥까지 축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럴때면 나는 강박적으로 똑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그 남자는 누굴까. 그리고 그의 부모님. 그들은 누굴까. 그들은 왜 죽었을까.


어차피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 질문에 더욱 매달렸다. 때로는 그날 봤던 남자의 강렬한 눈빛들이 떠올랐다. 나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러나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분노에 가득찬 눈빛. 남자의 눈동자 안에는 그런 열정에 가득찬 분노와 동시에 칼날처럼 차가운 냉소가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열렬히 갈구하다가도 그 갈구하는 마음이 진심이 될까 두려워 그것을 내던져버리는 눈빛이었다.


남자에 관한 이런 생각들이 나를 괴롭게 만든 건 분명했다. 나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아빠를 죽이고 집에서 나온 그때보다 나는 훨씬 더 약해지고 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몸이 쉽게 일으켜지지 않았고, 식욕이 돋질 않아서 무엇이든 양껏 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도때도 없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졸음이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잠을 자기 위해 누우면 정작 정신이 멀쩡하게 깨어나 깊은 잠에 빠져들 수도 없었다.


그 남자는 대체 뭘까.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러나 이걸 어떠한 말이나 분명한 무언가로 묘사할 수가 없었다. 그저 혼자 조용히 병들어갈 뿐이었다.


나무의 부모님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나무는 나무 아빠의 친구에게 많은 걸 묻고 싶어보였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궁금한 걸 참는 나무의 얼굴은 무척 쓸쓸해보였다. 아저씨가 사소한 일로 나무의 이름을 부를 때, 기대하면서도 생각한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곧장 실망하는 그 얼굴은 나의 마음마저 힘들게 했다.


나는 나무의 아픔을 함께 이해하면서, 함께 아팠다.


가끔 아저씨는 어디서 오는지 모를 전화를 받았고, 그럴때면 우리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럴때마다 현관문 앞에 붙어서서 전화 내용을 엿듣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지만 정작 나무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나무가 대단해보이면서도 안쓰러웠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서 아저씨에게 따져묻고 싶을텐데, 나무는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그저 언젠가 답변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인걸까, 아니면 두려움인걸까. 그 마음이 어느 쪽이든, 나는 나무를 보며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도 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건 이런 지지부진한 패턴이 얼마든지 계속될 것 같다고 느껴갈 때 쯤이었다.


"나무야. 엄마 아빠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갈래?“


깜짝 놀라며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장 내 시선은 나무에게로 향했다.


나무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처럼 위태로워졌다. 나무에게는 유일하게 기다려온 말이면서도 가장 두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나무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몇 분이나 지속된 고요 끝에 나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오전에 볼 수 있을 거야.“


어디서 나무의 부모님을 볼 수 있는 건지, 어떻게 볼 수 있는 건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나무나 나는 슬프게도 이런 쪽에서는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아이도 같이 가줄거지?"

"그럼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되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


눈을 뜬 채로 꿈에 잠겼다. 분명 눈을 뜨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머리속에서는 다른 영상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맥락없이 파편화된 환상적인 이미지들이었다. 조각난 살덩어리와 여러군데가 끊긴 전기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칩들. 그리고 눈이 부셔 도저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을 내는 모니터. 이후에는 갓난 아기가 울고 있다. 아이보리색 담요에 손발이 숨겨진채로 꽁꽁 둘러싸인 아기는 숨이 넘어가라 운다. 그러나 아무도 아기를 돌보지 않는다.


아이의 머리가 목에서 똑, 떨어져서 바닥으로 천천히 굴러간다. 피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울음 소리가 더욱 커진다.


그렇게 목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만 남은 아이들이 바닥에 셀 수 없을만큼 많이 방치되어있다. 울음 소리는 참기 어려울만큼 귀를 자극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고 뒤로 물러서자 이번엔 복도 저 끝에서 나체의 사람들이 걸어온다.


아니, 저것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다. 걸음 걸이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늘 똑같은 걸음으로 걷는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아이야.“


정신을 차린 순간에 나는 낯선 건물 안에 들어와있었다. 아저씨가 걱정스레 내 손목을 잡고 나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려 아저씨가 던질 질문에 대답을 했다. 아저씨는 내 손을 자신의 옷깃에 조심스럽게 닦았다.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도착한 곳은 대리석으로 사방이 장식되어있는 건물이었다. 뚜걱, 뚜걱. 아저씨의 구둣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꽤나 크게 울렸다. 고개를 빼서 옆을 바라보니 아저씨의 다른쪽 손에 나무의 손이 들려있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법원이잖아. 아까 얘기해줬는데, 기억 안 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눈을 굼뜨게 움직이는 나를 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까부터 나무는 말이 없었다.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커다란 문을 열자 바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규칙적으로 놓인 의자에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나와 나무는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가장 앞 쪽으로 가 앉았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갈수록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나무의 얼굴은 거의 하얗게 질려있었다. 금방이라도 깊은 숨을 토해내고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나무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나무는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곧이어 분위기가 금방 웅성웅성해지더니 나무의 엄마가 등장했다.


나무의 엄마는 낯선 옷을 입고 있었다. 칙칙한 옷의 색깔이 나무 엄마의 얼굴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입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나무 엄마가 고개를 들었고, 어딘가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시선의 끝에는 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입술을 떨며 자신의 엄마를 마주보고 있었다.


앞에는 각자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얼마 안 있어 중앙에 앉은 나이 든 여자가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전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사나운 얼굴을 한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알 수 없는 말들을 뱉어냈다. 아주 작은 무질서도 없는, 마치 기계의 톱니 바퀴가 차분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증인 나와주십시오.“


엄숙한 목소리 이후 등장한 사람은 총 두 사람이었다. 첫번째 증인은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전동 휠체어에 올라타 있는 할아버지였다.


"증인은 피고인이 아이를 훔친 것을 목격한 것이 확실합니까?“

"…예, 그렇죠, … 제가 분명히…봤어요….“


할아버지는 곧 잠에 들 것처럼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힘겹게 글자 하나하나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나이가 많아보였다. 그렇게 느린 속도로 할아버지는 나무의 엄마를 꾸짖었다. 저 여자가 자신의 손주를 몰래 데려가서 키웠다고.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손주가 저 여자 손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자신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냐고. 나무의 엄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 할아버지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언성을 높였다.


나무의 엄마는 울고 있었다.


이어서 나타난 또 다른 증인은 나무의 아빠였다. 나무의 아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증인석에 앉아 양복을 입은 사람이 하는 질문에 아주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내가 들어본 목소리 중 가장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제 아내는 아이를 훔친 적이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난임이었던 것은 맞습니다만…그것 때문에 아이를 훔치려고 했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던 겁니다. 우리 애는 저들이 버리려고 했던 애였습니다. 아내는 애를 버리라는 사장님의 말에 차마 애를 버리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온 거였습니다. 어떻게 품에 안겨서 울고 있는 아이를 버리고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나무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굳은 표정으로 그런 나무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온몸이 가시로 찔리듯 숨막히는 상황과 말들이 반복됐다. 나무가 느낄 고통은 얼마나 더 심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숨막히는 공기 끝에 누군가의 시선이 자꾸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어떤 남자가, 아주 찝찝한 눈빛을 하고 이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질문과 답변들이 오고 갔다. 나무 아빠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방청석으로 물러났다. 곧이어 나무 엄마에게도 이야기를 할 기회가 돌아갔다.


"저는 남의 아이를 훔친 적이 없습니다. 나무는 제 아이입니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저와 제 남편만이 나무의 부모님이 되어줄 수 있어요."


그렇게 모든 시간들이 끝났다.


나무의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무는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뛰쳐나갔다. 나무 엄마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나무를 떼어내려 했지만, 나무는 힘으로 매달린채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 엄마.“


엄마의 옷을 가득 적시며, 나무는 울고 있었다. 울음 소리가 처절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나무는 웅얼거리며 울었다.


"나무야, 괜찮아. 엄마 곧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엄마."

"응."

"나 안 버릴거죠?“


나무의 질문 이후 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나무 엄마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절대 안 버려. 누가 말려도 평생 나무 엄마 할거야.“


나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더욱 세게 엄마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이제는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나무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나무는 엄마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나무는 나와 아저씨 곁으로 돌아왔다. 나무는 아저씨에게 안겨서도 한참을 울었다.


"얘야.“


뒤에서 낯설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나무를 계속 쳐다봤던 남자가 있었다.


"내가 네 아빠다.“


남자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나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의 그런 행동을 보고 있던 나무의 눈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무는 남자의 손을 주먹으로 세게 밀어낸 후에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남자는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우리는 나무를 뒤따라 뛰어갔다.


"나무야, 다 괜찮을 거야.“


들썩이는 나무의 어깨를 양팔로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나무는 엄청나게 강한 힘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힘으로부터 나무를 지켜내야한다는 의무감에 나무를 더 세게 붙잡았다. 떨리는 나무의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휘청거렸다.


*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되었다. 며칠동안은 비가 계속 내렸다. 그 탓인지 온몸의 근육이 축 늘어져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방까지 해가 들지 않아 늦은 오후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내가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나무는 우두커니 방 안에 홀로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냐고 물으면 늘 똑같이 여덟시, 라고 대답했다. 나는 늘 오후 열두시쯤 되어 일어났다. 그럼 넌 여태까지 몇시간동안 혼자 그러고 있었니? 묻고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내 일상이 멈춘만큼 나무의 일상도 멈춰있다는 걸 나는 알아야만 했다.


"나무야. 배 안 고파?"

"배고파."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나무는 대답없이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눈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문득 나무를 처음 봤던 날, 나무의 밝게 빛나는 눈빛이 떠오르며 가슴이 찌릿하니 쓰렸다.


"아저씨가 오시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어."

"맞아."

"우리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밥 먹을래? 아저씨가 용돈 주셨잖아. …산책도 좀 하고.“


나무는 한참 나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양말만 신고 우리는 바로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힘없이 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우산 위에 먼지가 가득 앉아, 우산을 펼치니 빗방울과 함께 먼지가 근처로 튕겨나갔다. 나는 우산을 들어 나무쪽으로 기울였다. 나무는 여전히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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