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두운 통로의 입구 안으로 들어와 다시 이를 앙다물고 책장을 반대쪽으로 끌었다. 얼마간 끙끙거린 후에 다시 책장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서재에서 들어오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커튼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이 더욱 밝게 보였다.
커튼을 젖히자 처음 보는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몇개의 문과 아주 커다란 모니터, 그리고 커다란 컴퓨터 본체가 있었다. 빛은 아마도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빛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실행되고 있지 않았지만, 모니터의 전원이 켜진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힐끔 바라보고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도 없고 버튼도 없는 문은 마치 붙박이장처럼 생겼고, 굳게 닫혀있었다. 손으로 눌러보기도 하고 몸으로 부딪혀보기도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곧이어 나는 모니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몸을 더듬었다. 칩 리더기. 어디 갔지? 기억을 더듬어보자 나무 아저씨 친구의 차에 리더기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상의를 위로 벗어올렸다. 속옷의 안쪽에 끼워둔 칩들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세 개의 칩은 속옷 안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칩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책상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살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잔뜩 놓여있었다. 그 틈에 리더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여러개의 얇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역시 손을 더듬어가며 구석까지 꼼꼼히 만져봤다.
책상의 구석에서 작은 상자 모양의 윤곽이 손에 잡혔다. 손을 더듬어 아래쪽을 만져보자 동그란 버튼이 만져졌고, 그걸 톡 누르자 네모난 상자가 위쪽으로 튕겨나가며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그 안을 더듬거렸다. 익숙한 것들이 손에 닿았다. 그러나 한 개는 아니었고, 여러개였다. 나는 손을 넓게 펼쳐 그것들을 모조리 집어 꺼냈다.
밝은 책상 위에 손에 든 걸 전부 내려놓자 비슷하게 생긴 리더기들이 여러개 보였다. 나는 일일이 리더기의 홈을 들여다보며 내가 가진 칩들을 끼워넣을 수 있는 리더기를 찾았다. 몇 개의 리더기를 확인하길 반복하고 나서야 나무 아저씨의 친구가 빌려줬던 리더기와 똑같은 모양의 리더기를 발견했다.
나는 망설임없이 리더기를 본체에 연결한 후, 칩을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칩을 넣을 수 있는 홈이 두 개가 있었다. 무작위로 두 개의 칩을 잡아 홈 안에 끼워넣었다. 본체에서 기계 소음이 들리더니 화면에 폴더가 열렸다.
하나는 아빠에 관한 폴더였고, 나머지 하나는 나에 관한 폴더였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괜히 아빠의 이름이 보이는 폴더를 몇 번 클릭해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내 이름이 적힌 폴더로 마우스 커서를 가져갔다. 커다란 모니터 화면에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이름의 폴더들과 내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강 아 이'.
폴더를 열고 들어가자 엄마, 아빠의 것과 동일한 형식의 파일이 보였다. 그곳으로 마우스 커서를 곧장 가져갔지만 열어볼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미동없이 화면만 계속 쳐다보자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이 점점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움에 눈을 꽉 감았다가 화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움직임 때문에 손가락에 힘이 실려 자연스레 파일을 클릭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화면을 살펴봤다. 엄마, 아빠의 파일에서처럼 여러장의 이미지들이 시간순서대로 나열되어있었다. 계속해서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그 안에는 내가 여러명 있었다. 아주 어릴 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가장 최근까지. 나의 모습은 나이대별로 다르게 찍혀 저장되어있었다. 가장 마지막 사진은 중학교의 학생증을 만들기 위해서 찍었던 증명사진과 엄마, 아빠와의 외식 때 사진. 밥을 먹고 있는 사진은 한 눈에 보기에도 누군가가 몰래 찍은 것 같은 구도였다.
나는 한참동안 페이지들을 샅샅이 뒤지며 다른 무언가를 찾았지만, 내 이름으로 된 폴더 속 PDF 파일에는 엄마, 아빠에게 있었던 것이 없었다. 설계도. 내게는 부여된 설계도가 없었다. 내가 로봇이 아니라는 걸까, 아니면 엄마와 아빠랑은 다른 무언가가 또 있는 걸까. 여러번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기를 반복했지만 똑같은 이미지들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댄채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 외에는 공간을 밝혀줄 빛이 없어 허공이 어두웠다. 문득 책상쪽으로 몸을 세우고 책상 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이 어디 없을까. 한참동안 손을 더듬거리다가 용도를 알 수 없는 뾰족한 막대를 찾았다. 끝이 조금 뭉툭했지만 옆선이 꽤 날카롭고 차가운 촉감이었다. 아무래도 금속으로 만든 무언가인 것 같았다.
나는 막대를 쥔 손에 힘을 가득 주고 손목에 막대를 가져갔다. 슥, 슥, 슥. 살결에 스치는 얇은 마찰 소리가 작게 몇번 반복됐다. 처음에는 하얀 자국만을 남기다가 빨개지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 막대가 살 사이로 깊이 스며 들었다. 나는 작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막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상처가 난 손목에서 피가 맺히다가 살결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는 분명한 붉은색이었다. 검붉은색. 손목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았다. 막대를 쥔 손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비린내가 풍겼다. 나는 다시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옷에다 닦았다.
별안간 알 수 없는 경고음이 짧게 울리기 시작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해석할 수 없는 코드로 된 알림창이 켜져있었다. 누를 수 있는 버튼은 단 두 개였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섣불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고 마우스 커서만 움직이자 경고음이 짧게 반복적으로 울리며 똑같은 창이 계속 켜졌다.
경고음이 위협적으로 들리기 시작한 순간, 나는 충동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누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일은 벌어졌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알림창은 꺼졌다. 그러나 곧바로 화면이 하얗게 변하더니 삐익-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시작되었다.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덜커덩. 투둑.
귀를 찌르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붙박이장처럼 생긴 안쪽의 문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빨라졌고, 커졌다. 무언가가 안에서 요동치며 부딪히는 소리인 것 같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무언가가 재빠르게 걸어나왔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란 몸이 덜덜 떨려왔다. 문에서 나온 무언가는 소리없이 방 안을 빠른 속도로 걸어 다녔다. 방 안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의 몸이었고, 똑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다 벽에 부딪히면 방향을 바꿔 움직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빛은 하얗게 바뀐 모니터 덕분에 더욱 밝아졌다.
그 빛에 비친 형상은 아빠였다. 다시 확인해도 틀림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굴까지 분명 아빠였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빠의 눈에 보이는 곳에서 아빠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아빠는 고장난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빠에게 점점 다가가도 아빠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혹시 방금 열린 문 안쪽에 서재와 연결되는 통로가 있나 싶어 확인해봤지만 문 안쪽은 막혀있었다. 나는 의심스럽게 아빠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다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아빠의 얼굴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린 내게 바나나향 액체를 먹였던 날, 눈에서 빛이 나오던 그 얼굴. 내가 아빠를 죽였던 날, 초록색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아빠의 얼굴. 아빠는 그 얼굴로 반복해서 방 안을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바로 옆의 문에서 또 다시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반복되더니 다른 사람이 뛰쳐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주춤했다. 엄마였다. 엄마는 아빠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곳을 맴돌았다. 앞으로 걸어가다가 벽을 만나 부딪히면 방향을 바꿔 다시 앞으로 걸어가고, 또 다시 벽에 부딪히면 방향을 바꿔서 또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나는 아빠에게 다가가 발을 걸어 아빠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바닥에 넘어진 아빠는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버둥거렸다. 나는 그런 아빠의 손짓을 피해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상체에 입혀진 옷을 위로 올려 몸 안을 꼼꼼히 살폈다. 바지도 골반까지 내려 살피자, 엉덩이 위쪽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나는 그 구멍을 잠시 쳐다보다가 책상 쪽으로 걸어가 손목에 상처를 냈던 막대를 다시 주웠다. 막대를 아빠의 몸에 있는 구멍에 끼워넣자 아빠의 움직임이 멈췄다.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막대를 손에 쥐고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입구인 책장 앞에 부딪혔는지, 입구 근처에서 방향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계속 몸짓을 하고 있었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입구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천천히 책장이 열리더니 한자리에서 허튼 몸짓만 하고 있던 엄마가 문 바깥쪽으로 쓰러졌다. 열린 입구에서 환하게 빛이 들어왔다.
아빠가 서 있었다.
놀라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아빠가 여기에 있지. 분명히 방금 아빠의 전원을 껐는데.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가만히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숨을 몰아 쉬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놀라서 자리에 넘어진 나는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다시 방 안 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웃옷이 벗겨진 채 엎드려있는 아빠의 모습을 한 로봇이 보였다. 나는 다시 멈춰 섰다.
혹시 이것도 꿈인 걸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천천히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발걸음 소리가 불규칙했다. 미세하게 한 쪽 발이 닿을 때만 더 큰 소리가 났다.
나는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빠는 점점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컴퓨터 화면이 비추는 곳 중앙에 아빠가 멈춰 섰다. 아빠의 얼굴이 낯설었다. 얼굴이 비대칭적으로 뒤틀려있는 표정. 그는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빠가 아니었다. 내 숨소리가 긴장한듯 점점 더 커지자 그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왜 이렇게 사고를 칠까?“
그가 내 앞에 바짝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낯선 이의 숨냄새가 느껴졌다.
"아이야. 너 원래 말 잘 듣는 애잖아."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야, 네 아빠잖아.“
그 남자는 한 번 더 웃었다. 이번에는 더 크고 긴 웃음이었다. 날카로운 웃음 소리가 작은 방 안을 울리며 퍼졌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엎드려있는 아빠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아빠를 일으켰다.
"아, 이게 네 아빠인가?“
그는 아빠를 양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더니 관절을 굽혀 앉는 자세로 바꾸었다. 바닥에 아빠를 앉힌 남자는 비뚤어진 아빠의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어때, 이제 좀 익숙하지?"
"…누구에요?"
"누구? 나? 아니면 이거?"
"아저씨요."
"아저씨?“
남자는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웃었다.
"너 생각보다 꽤 똑똑하구나.“
그러더니 남자는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에 손등을 가져갔다. 남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손등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빨간색이었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뭐가요?"
"얌전히 잘 컸잖아, 여태. 근데 갑자기 왜 이러냐고."
"당신이 누군지부터 말해요."
"어쭈."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 말할게요.“
최대한 목에 힘을 주며 말했지만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의 눈은 아빠의 눈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웠다.
"나는 네 아빠의 주인이지. 아, 네 엄마도."
"주인…이라뇨?"
"봤잖아. 네 엄마 아빠 말이야. 내가 네 엄마랑 아빠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거든."
"로봇을 만든 사람이에요?"
"만든 건 다른 사람이고, 정확히는 로봇이 어디에 쓰일지 기획하는 사람이지."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야,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 다 기억해요."
"뭘 말이야?"
"엄마가 이상하다고 했던 날이요."
"…정확히 말해.“
남자는 한순간에 짐승 같은 눈빛과 말투를 하고 덤벼들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나한테 이상한 걸 먹였던 날."
"뭐? 네가 어떻게 그걸 기억해?"
"그날 뿐만이 아니야. 아빠는 종종 그 이상한 액체를 나한테 먹이려고 했죠. 바나나향이 나는 액체. 그걸 먹으면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든게 사라져버리잖아요."
"너, 어떻게 그걸 다….“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표정이 굳은 채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 약이 네게 안 먹혔구나?"
"약?"
"…어쩐지…. 너는 그 약을 먹고도 이상하게 멀쩡했어. 보통은 잠이 많아지거나 혼란스러워해야 정상인데."
"왜 나한테 그런 걸 먹인거죠?"
"넌 아무것도 알면 안 되거든. 머리속에 든 걸 다 지워야해. 네 기억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라기보다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나를 점점 채우고 있었다.
"대체 왜 날….“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태어났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람인지 로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 진실이든 이젠 중요하지 않았다. 난 더욱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되뇌이고 있었다. 대체 난 왜 만들어졌을까, 이 세상에.
사랑받고 싶었어.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말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다가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언제나 내가 원했던 건 그것 뿐이었다. 따뜻한 웃음과 나만을 바라봐주는 눈빛. 나는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내게는 그 눈빛과 웃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나는 마치 물을 먹지 못하면 말라죽어가는 식물 같았다. 나는 견딜 수 없을만큼 건조했다.
남자가 뒤를 돌아서 어딘가로 걸어 가려다 다시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기분 나쁜 얼굴로 웃었다. 입꼬리가 기이할만큼 길게 찢어졌다.
"너,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네 엄마 아빠가 로봇이라는 게 그렇게 궁금했어?“
나는 대답없이 남자를 노려봤다.
"너에 대해서 재미있는 거 알려줘?“
남자는 다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대신에 우리 거래를 하는 게 어떠냐. 동의하면 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걸 다 알려줄게."
"무슨 거래요?“
"나는 오늘 너한테 아주 강력한 약물을 주사할 거야. 그런데 만약 네가 잘 협조해주면 기억을 지우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게 해줄게. 온전하고 분명한 네 정신으로 말이야. …대신 조건이 있어. 네가 모든 걸 안다는 거, 그걸 비밀로 해야해. 모든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 그게 조건이다.“
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네 엄마 아빠는 꽤 부유하고 너를 부족함 없이 키울 수 있지. 오히려 간섭이 심한 부모보다 낫지 않겠어? 그냥 로봇이다, 생각하고 너는 네 할일만 하면서 살면 돼.“
"왜 그렇게 해야하는데요?"
"…내 실험이 성공적이어야 하거든. 너는 착하고 똑똑하고 현명한 어른이 될 거야. 난 어차피 널 해칠 생각이 없어. 내가 널 죽일 거라고 생각해? 아니, 난 널 죽이지 않아. 내가 널 죽여서 득이 될게 하나도 없거든. 오히려 난 네가 아주 필요해. 그러니까 네가 협조만 잘 해주면 난 네가 원하는 걸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응?“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 기분 나쁜 손길에 나는 남자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남자가 다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너는 내 실험에서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 될거야. 엄마, 아빠가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자란 아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 내 제안에 협조하겠어?“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말이야. 부모가 없는 애야."
"혹시 나, 로봇인가요?"
"뭐?“
남자는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배를 잡으며 한참을 자지러질듯 웃더니, 눈을 비비며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역시 어린 애들은 상상력이 좋구나. 아니, 너는 로봇이 아니야."
"…근데 왜 부모가 없어요?"
"넌 부모가 버린 애거든. 너는 베이비박스에 버려졌어. 누가 버린지는 알 수 없어. 어쨌든, 넌 그때부터 부모 없는 애가 된거지."
"근데 왜… 내가 이런 실험에 대상이 된거예요?"
"그건 그냥 운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남자는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머나먼 이야기를 얘기하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버려진 많은 아이 중 몇 명의 실험 대상에 포함이 되었다. 실험은 인공지능의 사회화였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아빠의 서재에서 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부모가 없는 애들이 아주 골칫덩이거든. 책임질 사람이 없는데 사고라도 쳐봐. 너, 뉴스에서 나오는 범죄자들 본 적 있지? 걔들 중 대부분이 부모가 없거나 부모한테 문제 있는 애들이라고. 괜히 이런 실험이 생겼겠어?“
남자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에는 혐오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화살이 겨누는 곳이 나인 것 같아, 두려웠다.
"제 진짜 엄마 아빠에 대해서는 정말 알 수가 없는 건가요?"
"알 방법이 없어.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면 부모를 추적하지 않으니까.“
남자는 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자신의 실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만약에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세상에 얼마나 큰 혁명적 변화가 일어날지. 그가 처음 했던 말과는 다르게 이 실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저 로봇들인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아빠의 로봇을 바라봤다. 이렇게 아빠와 남자를 비교해서 보니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아빠가 로봇이었다는 걸 왜 늦게서야 깨달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이 실험이 그저 악랄한 눈속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말을 듣고서도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내가 버려진 아이였다는 것만이 확실해졌을 뿐, 내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자는 위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실험에 협조해달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나는 그의 말에 거절할만큼 그에 반하는 어떠한 의지나 의욕이 없었다. 그저 내 삶이 끝난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지만, 모든게 변했다. 이런 내 삶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세상은 너무 잔인했다.
나는 로봇을 증명하기 위한 이용품이었다.
"부모님이 있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미세하게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게 보였다.
"아이야, 너한테는 부모님이 있어. 나를 봐.“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거칠게 감쌌다. 남자의 두 눈이 이유 모를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넌 축복받은 거야. 혼자 버려진 애들이 얼마나 망가져가는지 아니?“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축 쳐진 어깨로 앉아있자 남자도 떠들기를 멈췄다.
"그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거지? 여태 네가 사라졌던 건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니….“
갑자기 바깥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릴 힘마저 없는 나는 그저 남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벨소리가 연속해서 두 번 다시 울렸다. 남자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바깥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방 안에서 사라진 뒤에도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일까. 또 다른 실험자일까. 모든 걸 알고 나자 모든 것이 조작된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서재 문을 열고 나간 이후로 한동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곧이어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방의 입구 쪽을 쳐다봤다.
아이야, 아이야!
바깥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의 목소리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무거운 책장 입구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다가, 끝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이야!
바깥으로 나오자 나무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무야!"
"아이야! 너 괜찮아?“
방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나무 아빠의 친구 옆에 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 뛰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제서야 멍했던 마음 속에 무언가 무거운 것이 불쑥 올라오며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커다란 소리로 서럽게 악을 쓰며 울었다.
"다친 데는 없어? 걱정 많이 했단 말이야.“
나무는 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그런 나무를 끌어안고 계속 울었다. 나무의 어깨가 내 눈물과 콧물로 젖어갔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아빠의 친구가 우리를 껴안고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무는 나무 아빠의 친구를 향해 웃어보였다. 나무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얼른 나가야 해. 저 사람, 기절한 거라서 곧 깨어날 거야.“
나는 울음 때문에 떨리는 몸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시 일어나야 한다.
"먼저 나갈래? 아저씨 집으로 가 있어. 갈 수 있지?"
"아저씨는요?"
"나는 혹시 몰라서 여기 좀 정리하고 갈 테니까 걱정말고 먼저 가. 아무 일 없을 거야.“
우리는 손을 잡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나무와 눈을 마주치자 심장이 시큰거렸다. 그때서야 불안한 몸의 떨림이 멈췄다. 아무렇지 않게 두 다리가 앞으로 뻗어져 나가며 비로소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을만큼 잔인한 현실에도 아무렇지 않게 숨을 쉴 수 있는 나 자신이.
5부 초록색 꽃
나무 아빠 친구의 집은 문이 열린 채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무는 집에 들어가서 몇 번이나 엄마와 아빠의 흔적을 찾았지만 현관 앞에 찍힌 몇 개의 신발 자국 외에는 남은 흔적이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모두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된 걸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우리는 나무 아빠의 친구를 두고 단둘이 집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한참을 말없이 뛰기만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라서 더 이상 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두 다리가 문득 자리에 멈췄다. 내 바로 옆에서 뛰던 나무 역시 나를 보고 자리에 멈춰 섰다. 우리는 잠시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서서 숨을 고르던 내가 자리에 주저앉자 나무가 가까이 다가와 나를 안아줬다. 우리는 몇 번이나 서로를 끌어 안아줬을까.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안쓰러워하고 그리워 했을까.
나무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건 길고 긴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고 나서였다. 말 없이 서로를 진정시켜주다가 다시 걸어가던 중 나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엄마와 아빠가 사라졌다고, 모르는 남자들이 아저씨의 집에 쳐들어와서 엄마와 아빠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나는 말을 더듬어가며 나무에게 많은 질문을 꺼내놨지만 나무는 대부분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무가 입을 닫자 나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아이야."
"응?"
"나도 너랑 같을지도 몰라."
"뭐가?"
"그냥… 다. 그러니까 혼자라고 생각하지마. 우리, 비슷한 처지잖아.“
나무가 그저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나무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나무는 말하고 싶은 것, 혹은 말해야할 것 같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나무와 만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나무의 순수함은 언제나 마음 속의 많은 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여줬다.
나는 나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텅 빈 나무 아빠 친구의 방에서 억지로 잠을 청하던 그 밤, 내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나무를 위해서 기도했다. 나무가 잠들어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무가 푹 자고 일어나서 많은 것들을 다시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선잠을 자고 일어나자 어두운 전구 조명 아래에서 누군가가 작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하자 옆에서 나무가 팔을 움직였다. 나무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이미 나무 역시 눈을 꿈뻑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무가 일어난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 아빠의 친구가 돌아와 있었다. 걱정되었던 마음이 갑작스레 커지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어, 깼냐."
"괜찮으세요?"
"응. 별 일 없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나무가 나무 아빠 친구의 손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저씨는 또 처음 보는 칩들과 작은 기계 장치들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 남자한테서 가져온 것들이야."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요?"
"묶어놓고 협박했지."
"협박이요?"
"그럼. 나무 아빠랑 나는 인형 만드는 일을 하니까 사람 몸에는 아주 빠삭하거든. 그니까, 어디가 약점인지 잘 안다는 거지. 일할 때 배운 걸 이럴 때 써먹을 줄 알았나."
"그 사람은 그럼 아직도 묶여있어요?“
나무가 놀란 얼굴로 묻자 나무 아빠의 친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묶어놓고 왔어."
"정말요? 그러다 밥도 못 먹고 그대로 죽어버리면…."
"몸을 묶어 놓았다는 게 아니라,“
나무 아빠의 친구는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위로 들어 우리에게 보여줬다.
"이게 그 남자를 묶어둔 거야. 이게 그 사람 명치보다 더 큰 약점이거든.“
나무와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나무 아빠의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저씨의 얼굴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기다려봐라. 잠을 좀 더 자도 되고. 시간이 아직 일러.“
아저씨의 말을 듣고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고나서야 아직 시간이 새벽 다섯시 무렵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나무의 표정을 살폈지만 나무 역시 더 이상 잠을 자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래 걸릴 거야. 너희 잠 못 자면 피곤해. 해야할 것들이 많을텐데."
"저, 아저씨.“
나무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엄마랑 아빠는요? 어떻게 된 거예요?"
"엄마랑 아빠는.“
아저씨는 기계를 만지던 손을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걸 보던 나무와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봤다. 어두운 전구 불빛 때문에 아저씨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어둠에 가려진 눈 때문에 희미하게 얼굴의 옆선만 보일 뿐이었다.
"무사해. 내가 장담할게."
"지금 어디에 계신 거예요?"
"그건 나도 정확히 알지는 못해. 추측만 할 뿐이지.“
나무는 엄마 아빠가 무사할 거라는 아저씨의 말에 눈을 반짝 빛내다가 아저씨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 나서는 금방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나무야."
"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말이야, 너무 생각을 많이 하지마."
"…네."
"그냥 엄마랑 아빠를 믿으면 돼.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그리고 엄마랑 아빠도 너를 믿고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아저씨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아이 너도 마찬가지야. 나무 엄마랑 아빠가 아이 네 부모님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나무를 아끼는 만큼 너도 소중하게 생각할 거야. 나무가 데려온 친구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도망치지 말고 서로를 믿으면 돼.“
아저씨의 눈빛만큼은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알겠어요, 아저씨."
"너희는 이제 그냥 맺어진 평범한 인연이 아니야. 서로 남매라고 생각하고 힘들 땐 서로를 감싸줘야 해. 알았지?"
"네.“
나무와 나는 동시에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은 우연에 우리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신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올 수가 있다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하고 어두운 길 앞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아이 너한테도 결정해야할 것들이 있을거야.“
아저씨는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내게 해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듣다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를 반복했다.
나무와 나는 결국 한두시간 정도 더 잠들기로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잠과 밥은 해결할 수 있을 때 무조건 해결해야 한다는 아저씨의 당부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까 일어났던 자리로 그대로 돌아가 구겨진 담요를 각자의 몸에 덮었다. 담요가 힘없이 몸에 엉겨 붙었다. 담요를 발끝까지 다리로 밀어내며 눈을 감았다.
만약 이 모든게 내 꿈이라면 어떨까. 내 상상이라면. 내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인공 시뮬레이션 같은 거라면. 차라리 그쪽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왠지 나무에게 일어난 나쁜 일도 내 탓인것만 같아 마음이 울적했다.
나무는 의외로 곧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작은 인기척을 내도 꿈쩍 않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잠에 빠져든 나무의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다,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에 나도 잠에 빠져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