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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10) 完

나는 아저씨와 나무와 함께 간 적이 있었던 칼국수 집으로 나무를 데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손바닥만한 작은 지갑 안에 지폐를 확인하고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우리는 유리창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주문한 음식이 나올 즈음에는 다시 빗줄기가 얇아졌다. 우리는 거의 삼십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당 아주머니는 우리가 싸움을 한 남매인 줄 알았는지 서빙을 하며 우리를 힐끗 쳐다보다가 웃고는 했다.


"요즘 기분은 어때?"

"글쎄, 별다른 건 없어."

"내 눈에는 엄청 달라보이는데."

"그런가? 역시."

"역시?"

"어쩔 수 없나봐. 난 아직 어려. 표정에서 다 드러나나보네."

"당연하지. 우리 아직 어리잖아.“


나무는 젓가락으로 소리없이 칼국수 면을 입에 집어넣었다. 몇번을 젓가락질 했는데도 면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건 내 그릇도 마찬가지였다.


"나무 넌 어쩔거야? …아니, 어떻게 해야할까?"

"…달리 방법이 없을 거 같아.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는 동안 마음이 괴롭잖아."

"그래서 어른이 되려고 해, 기다리는 동안. 그게 내가 엄마랑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우리는 거의 반 이상의 면을 국물 속에 남겨둔 채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있었다. 나는 배를 문지르며 나무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비가 멈춰서 차갑고 습기 가득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나는 나무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좀 더부룩해."

"나도."

"좀 걸어야겠다.“


우리는 동네를 걸었다. 이 동네는 내가 나무가 살던 놀이공원으로 처음 갔던 날, 중간에 지나쳐 갔던 동네와 꼭 닮아 있었다. 바닥이 울퉁불퉁 혼란스럽고, 곳곳에 흙이 많은 곳. 비탈길을 여러번 오르내리자 더부룩했던 속이 가라앉았다.


"어, 이거봐."

"이게 뭐지?“


나무가 가리킨 곳에 작은 꽃이 피어있었다. 물기에 가득 젖은 흙 위에 위태롭게 핀 꽃은 불어오는 바람에 계속해서 살랑거렸다. 작은 잎과 작은 줄기. 그것들은 모두 초록색이었다.


"꽃잎이 초록색이야. 풀 같아. 분명히 꽃 모양인데. 신기하다."

"응. 무슨 꽃일까? 처음 보는 꽃인 거 같아.“


아직 개화를 덜 한 꽃잎이 잎의 안쪽을 웅크린채 가만히 바람을 맞아내고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쭈그려 앉아서 꽃잎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꽃이 양쪽으로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야, 넌 어떻게 할 거야?"

"…엄마 아빠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지?"

"응."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말을 하다가도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어떤 결정을 해도 나랑 아저씨랑 다 같이 있어줄 거니까. …엄마랑 아빠도."

"고마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지.“


나는 나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미소 지었다.


조심스레 꽃의 주변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며 꽃에 묻은 이슬을 털어냈다. 꽃은 물방울들 때문에 더 버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멈추면 이 꽃도 활짝 필까.


"이 꽃 말이야, 왠지 덜 익은 과일색 같아. 활짝 필 때는 색깔이 달라질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렇게 푸릇한 초록색인 채로 활짝 피어나는 것도 아름다울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 밤, 아저씨와 함께 나무의 아빠가 돌아왔다. 나무네 아저씨는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눈 밑은 거뭇하게 더 어두워졌고, 양볼은 마지막으로 봤던 날보다 훨씬 홀쭉해져 있었다.


함께 밥을 먹는동안 나무네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무와 나의 안부를 물었다. 나무는 평소처럼 아빠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나 역시 나무네 아저씨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우리는 떨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내가 입을 열자 나무 아빠의 친구 아저씨가 밥을 먹다가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무슨 대답이 나올 줄 알겠다는 생각이 드러나있었다. 아저씨는 요며칠 줄곧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랑 아빠를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요."

"잘했다."

"그 사람을 만나게 해주실 수 있어요?"

"직접 만날 거냐?"

"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고요.“


아저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같이 가도 괜찮은거지?"

"네.“


나무네 아저씨는 이미 아저씨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들었는지 우리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나는 일부러 입을 크게 움직여 밥을 씹어삼켰다. 여러번 입을 움직이자 침이 가득 고여 목구멍이 축축해졌다. 그렇게 여러번 밥을 씹다가 삼키기를 반복했다. 두려움과 불안함을 잊기 위한 강박적인 행동이었다.


*


아저씨가 말하기를, 남자는 곧장 답장을 해왔다고 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되려 우리에게 어서 만나자고, 그날 가져갔던 것을 빼놓지 말고 전부 가져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남자를 또 다시 만나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 남자가 한동안 나를 지배했기 때문일까. 또 다시 나를 감쪽같이 속여서 알 수 없는 수렁 속에 나를 집어넣을까봐?

아니, 그런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에 더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남자에게 이상한 연민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 남자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것. 이것이 두려웠다. 내 짧은 삶을 모조리 악몽처럼 만들어버린 사람이, 나라는 사람 자체를 거짓말로 만든 사람이 불쌍해 보인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연민의 감정은 상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그 사람도 나처럼 괴롭도록 맞서서 똑같이 갚아주고 분노를 쏟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게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연민 때문에 마음 속에 남아있는 원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내가 평생을 아빠로 알아온 존재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낯선 이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연민, 오랫동안 알아왔던 가까운 이에 대한 애정과 두려움이 뒤섞여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한동안 나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다. 모든 것을 폭로한 뒤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까. 아니, 죽기보다 오랫동안 살아남아 사람들의 비난과 원망을 받게 만들어야 할까. 그러나 그 모든 선택지는 오히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 인생을 망쳐버린 그 남자에게 보란듯이 복수하고 그 남자를 짓밟기보다, 그저 이 고통이 끝나길 바랐다. 그 남자가 나로 인해 더 괴로워진다는 것. 그건 어쩌면 평생동안 나를 찝찝한 죄책감의 구멍으로 빠뜨려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선택이 아니라 발버둥에 불과했다. 가능하다면 괴로운 기억들은 전부 잊고 싶었다.


남자에 대해 생각할수록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잠을 자지 않을수록 정신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오랜만입니다.“


집은 마지막으로 뛰쳐나온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방 안의 물건들이 나뒹구는 채로 인기척만 사라져있었다. 집을 관통하는 공기가 무척 서늘하고 쌀쌀했다. 양손으로 양팔을 비비며 어깨를 움츠리고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던 차에 뒤에서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 동시에 아빠의 목소리.


다가오는 남자의 발걸음에 나를 따라온 아저씨가 나와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아저씨의 뒷모습은 나를 지키겠다는 의무감으로 단단하게 바로 서 있었다.


"해코지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쉬운 게 있으니까요.“


지난 번에 아저씨와의 전화 이후 아저씨가 전해줬던 남자의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매우 침착한 모습이었다. 나는 아저씨의 어깨 너머로 남자의 눈빛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저건 무슨 감정일까. 슬픔? 짜증? 무기력? 그 무엇도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눈빛이 자꾸만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대신에 이 연구에 대해서 발설해서는 안 돼. 약속해.“

"어이, 지금 당신이 그런 걸 요구할 때가 아니야. 아이가 하라는 대로 해야된다고. 아이가 연구에 대해 전부 공개해버리겠다고 한다면 그건 당연히 공개해야하는 거야.“


남자는 나를 쳐다보다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이야. 어떡할거니?“


나는 아저씨를 지나쳐 남자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날 이후로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실험을 그만두세요."

"그건…."

"안 그러면 모든 게 다 밝혀질 거예요.“


나는 손에 들려있던 남자의 정보가 담긴 카드를 보였다. 남자는 움찔하며 내게 다가오려했지만, 아저씨가 다시 한 번 내 뒤에서 걸어 나오자 남자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제발…그건 어려워. 내가 이것 때문에 투자한 시간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럼 나는요? 오랫동안 이 실험 때문에 모든 삶이 거짓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다 책임질 수 있어. 네가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당신은 절대 책임 못 져요.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물질적인 게 아니에요. 나는 진실을 원해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알잖아요. 진실을 받아들이는게 얼마나 힘든지.“


남자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숨을 들이마신 후에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실험에 투입된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진실을 모를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거예요. 그 진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됐을때 그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무너지게 될지 잘 알잖아요. 대체 언제까지 이럴 셈이었어요?"

"아니, 그 아이들한테도 이런게 필요한거야. 난 애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거라고. 그리고 너한테도. 너한테도 제일 필요한게 부모잖아. 네가 만약 내 실험 대상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남자는 한 순간에 포악해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아저씨가 옆에서 망설이며 발끝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도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거짓 없이 살아가고 싶은 것만은 분명했다. 살면서 생겨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거짓으로 모든 것을 포장해버린다면, 그건 망가지고 실패한 삶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삶이 아주 길고, 또 그 긴 시간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다고 해도, 진실을 묻어둔 채 거짓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당신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죠.“


나는 두 눈에 힘을 주고 남자를 더 맹렬하게 노려봤다. 남자는 얼마간 강한 분노에 휩싸인 눈길로 나를 쳐다보다가, 한순간 슬픔으로 가득해진 얼굴을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어깨를 들썩이며. 그러자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려움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울고 있는 남자의 정수리를 힘없이 내려다봤다. 울음 때문에 움츠러든 어깨는 남자가 서 있을 때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나는 단지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뿐이야.“


남자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그 기준이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잖아요.“


나는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상황을 지켜봐주었다.


따돌림을 당하던 날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틀린 것이 존재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실험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틀린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약속 지켜주세요.“


남자는 끝내 바닥에 엎드려서 울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한테 해줄 게 있어요.“


남자는 양팔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남자의 울음 소리가 조금 잦아들고나서 나는 입을 열었다.

"엄마와 아빠를 제게 돌려주세요. 엄마랑 아빠를 조작하는 법도 알려주시구요.“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집에 왔던 마지막 날, 옷이 벗겨진 채로 멈춰버린 아빠의 로봇에 나는 다시 옷을 입혔다. 아빠는 어색한 표정인 채로 멈춰 있었다.


"조작법은 그쪽한테 알려 드리면 되나요?"

"어, 내가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까.“


내가 아빠를 만지고 있는 동안 아저씨가 남자로부터 엄마와 아빠를 관리하고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이건 어떡하죠?“


나는 엄마의 무릎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릎의 살갗이 벗겨져 안의 전기선처럼 얇고 색이 특이한 인공핏줄이 드러나 있었다.


"그건 걱정마. 아저씨가 공장에 가서 고쳐줄 테니까.“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작법을 전부 알려준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여기로 연락주세요. 가능할 때는 와서 도와줄 테니까.“


남자의 눈빛은 버려진 소년의 눈빛이었다. 한 차례 크게 눈물을 흘리고 나자 신기하게도 이전의 날카로운 눈빛은 한층 누그러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작게 꾸벅이고 집에서 나갔다. 남자가 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아저씨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나 원, 불안해서."

"감사해요, 아저씨."

"근데 말이야.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엄마 아빠요?"

"응, 로봇이라는 걸 아는데도 곁에 두고 싶었던 이유가 뭐니?"

"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어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저씨는 내가 꽤 어려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 다 같이 여기 살면 어떨까요?"

"이 집?"

"네. 나무네도 갈 곳이 없잖아요. 아저씨네 집도 좁으니까…."

"됐다, 나는 혼자 사는게 편해. 난 자주 놀러올 테니까 그 멤버에서 빼줘. 나무네 가족한테는 한 번 얘기해봐라. 다 같이 살면 좋을 수도 있겠지.“


아저씨가 쳐다보진 않았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남자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렸다. 불꺼진 연구실, 두 사람이 죽고 어쩌다 살아남은 한 남자 아이. 작은 남자 아이의 뛰어가는 뒷모습이 상상 속에서 겹쳐졌다. 그 남자 아이는 어디로 뛰어가고 있었을까. 누구를 찾고 있었을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나는 그저 그 뒷모습만을 상상했다.


**


나무의 엄마는 얼마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증거 불충분인데다가 또 다른 증인이 나무의 엄마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손가락질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무의 생부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지속적으로 나무 아빠의 친구 집으로 찾아와 나무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나무는 그를 볼 때마다 말도 섞으려 하지 않고 도망쳤다. 나무는 그를 끔찍하다고 여겼다. 그가 자신을 낳아놓고도 버려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나 말투, 표정 같은 것들이 끔찍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고 나무는 말했다.


나무가 도망치는 동안 나는 그가 홀로 나무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걸 자주 봤다. 그는 자주 선글라스를 끼고 왔는데, 처음 몇 번은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그의 눈 한 쪽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난 곧 시력을 잃을 거야.“


그가 멀뚱히 서 있는 내게 말했다.


"그 전에 내가 낳은 아이를 한 번 보고 싶었어. 내가 키울 수 있다면… 내 곁에 남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나는 그가 불쌍하다고 느끼면서도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력을 잃고 모든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낳은 아들이 보고싶어진 걸까. 그토록 잔인한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내가 그로부터 느끼는 불쌍한 마음은 불쾌한 연민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더 이상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계속해서 찾아오자 나무는 결국 그의 앞에 대고 당신을 싫어한다고,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쳤다.


"저는 아저씨를 아빠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아저씨가 싫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나무는 그 말을 하고는 먼저 현관문을 닫고 집으로 숨었다. 그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무의 말을 한참 곱씹어보더니 별 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뒤돌아 섰다. 그 뒤로 그는 한 번도 찾아오지도, 나무나 나무네 가족에게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나무의 엄마가 돌아오자마자 내가 살았던 집으로 함께 들어가서 살자고 얘기했다. 처음에는 당황하여 떨떠름해하던 나무네 가족들이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허락을 했고, 우리는 며칠 후에 짐을 싸서 집으로 들어왔다. 이사하는 날도 나무 아빠 친구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를 도왔다.


"집 진짜 넓다."

"그치.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살기에 딱 좋아."

"여기 오니까 왠지 우리 놀이공원에 살 때 같아."

"그래?"

"응.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아늑하고 넓어서 그런가?“


나무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무가 오랜만에 짓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돌아오고 나서 나무는 어두운 표정에서 해방되었다. 나무가 자주 웃는 모습을 보자 내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다.


"나무 너는 어때?"

"이번엔 뭘 묻는 거야?"

"많은 게 바뀌었잖아. 그전에는 네가 아주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아이인 줄 알았으니까."

"사실 그전에도 평범하진 않았지.“


나무는 소리내어 웃더니 진지하게 무언가를 생각했다.


"많은 게 바뀐 걸까?"

"바뀌진 않았나?“


내가 되묻자 나무는 다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곧 내 얼굴을 살폈다.


"변한 건 거의 없어. 중요한 건 하나도 안 바뀌었다고 생각해."

"중요한 거?"

"난 내가 태어나던 순간에 우리 엄마 아빠와 완전한 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게 지금 우리 가족 관계를 변하게 만들진 않았잖아.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의 눈빛을 보내줄때 나도 느꼈어.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그전에는 사실 나도 많이 불안했지. 어딘가에 늘 속한다고 생각했고, 사실 내가 붕 떠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꼈으니까."

"맞아. 붕 뜬 느낌. 왠지 우주를 혼자 떠다니는 거 같아. 난 가끔 내가 우주에 버려진 채 둥둥 떠다니는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어.“


나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우주 쓰레기라고 해도 누군가는 그걸 버린 거잖아.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난 것들은 없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위로가 되네."

"너희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로 받아들여주기로 한 거야?“


나무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런데 네 말대로 변한 게 없을지도 몰라. 물론 너희 가족과 나는 상황이 좀 다르지만. 그게 로봇이라도… 엄마랑 아빠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삶을 내가 이겨낼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어."

"무슨 마음일지, 대충 이해돼."

"정말 중요한 건 내 마음이잖아."

"맞아. 무리해서 무언가를 억지로 해낼 필요는 없어. 사람마다 각자 사는 법이 다를거야. 나도 평범하진 않았잖아.“


나무가 또 한 번 웃었다. 나도 나무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로봇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의 그런 미소는 언제나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제는 우리 정말 남매가 된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부스스하게 공중으로 떠오른 서로의 머리를 보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나무라는 친구를, 가족을 얻은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스스로만큼, 어쩔 땐 스스로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


우리는 다 함께 저녁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나무의 아빠에게 서재를, 나무의 엄마에게 엄마가 쓰던 방을 주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손사레를 치며 둘이서 같은 방을 쓰는게 편하다고 했다. 결국 손님이 올 때 내어주기로 되어있던 작은 방이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방이 되었다.


나무와 나는 엄마가 쓰던 방과 내가 쓰던 방을 자유롭게 드나 들었다. 때로는 각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많은 시간 함께 있는 걸 즐거워했다. 엄마의 방이 하나 둘 나무의 짐으로 채워지면서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서재는 너희 엄마랑 아빠 방으로 쓰는 게 어때?“


나무가 스쳐지나가는 말투로 내게 가볍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 오고 나서 한 번도 엄마와 아빠의 전원을 켜본 적이 없었다.


나무는 내 방의 침대에 나와 함께 비스듬히 누워 수다를 떨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편안한 얼굴로 잠든 나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재에 들어가보니 서재는 여전히 그날과 똑같았다. 아저씨가 내게 조작법을 알려주면서 커다란 짐들은 대충 정리했지만, 아직 몇 권의 책들이 바닥에 늘어져있었다. 무엇보다도 서재 뒤편의 숨겨진 방에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나는 서재에 들어와 어둑하게 조명을 켠 뒤 어지럽혀진 서재를 빙 둘러봤다. 천천히 서재를 걸으며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제자리에 꽂자 눈 앞에 숨겨진 방의 입구가 보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이 입구를 발견한 건 정말 운이었지,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낑낑거리며 책장을 붙잡은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몸을 바깥쪽으로 당기자 잠시 후에 책장이 스르륵하고 열렸다. 커튼은 반 정도만 쳐져 있었고, 모니터는 여전히 켜져있었다. 아저씨가 조작법을 가르쳐준 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구석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엄마와 아빠의 로봇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엄마의 다리는 아직 치료되지 못한 채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나는 벗겨진 살갗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쇠막대를 찾았다.


엄마와 아빠의 전원을 켤 수 있는 것. 쇠막대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 남자로부터 엄마와 아빠를 받아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난 진실된 엄마 아빠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역할만으로라도 엄마 아빠의 모습을 해 줄 무언가를 원하는 걸까? 그 무엇도 정확한 대답이 될 수는 없었다. 나무의 엄마 아빠가 나의 부모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나는 차마 이 로봇들을, 나의 엄마와 아빠였던 이 존재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쇠막대를 가져가 아빠의 뒤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손을 뻗었다. 잘 보이지 않는 구멍에 막대의 끝을 넣고 힘을 주자 아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전원이 켜진 아빠의 얼굴을 보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아빠.“


나는 가만히 아빠를 불러봤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빠를 이런 목소리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어색했지만 나는 꾹 참고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그러자 아빠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빠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아빠는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서 움직이는 아빠의 딱딱한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눈에서 빛을 내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안녕, 아빠."

"안녕, 아이야.“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웃었다. 슬며시 아빠의 손가락을 잡아봤다. 이상하게 차갑지가 않았다. 손바닥까지 손을 가져갔을때, 생각보다 아빠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걸 느꼈다.

나는 쇠막대를 다시 집어들고 엄마의 뒤로 가 앉았다. 엄마의 뒤에도 똑같은 위치에 전원을 켜는 홈이 있었다. 그곳에 막대를 집어넣고 힘을 주자 엄마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고 있었다. 내가 알던 엄마의 표정이었다. 이 표정은 내게 너무나 익숙했다.


"엄마, 아빠."

"응?“


그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혹시 어디 아프면 말해. 내가 고쳐줄게."

"고마워.“


아빠가 대답하자 엄마가 따라 대답하고는 웃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뒤에 가서 그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등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향한 곳에, 그들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보았다.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고장이 난다면, 이곳을 다시 열어야겠지.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고쳐야 할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엄마와 아빠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들은 내게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엄마와 아빠의 눈에서 밝은 빛이 동시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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