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오랫동안 고열에 시달렸다. 학교에 가지 못한지 벌써 삼일째였다. 처음 이틀은 꼬박 앓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삼일째가 되자 겨우 멀쩡히 앉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자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엄마는 내 이마에 차가운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이제 열이 안 나네.“
나는 가만히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죽 먹어."
"이제 싫어요."
"다음 끼니부터 밥 줄게.“
아무런 대답없이 엄마가 가져온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엄마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움직이지 않자 곧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때서야 숟가락을 들어 죽을 조금씩 떠먹기 시작했다.
침대 머리맡에 둔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지수였다. 지수에게 지난 이틀동안 많은 문자가 와 있었지만, 제대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아파서 문자를 입력할 기운마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아이야. 왜 답이 없어. 많이 아파?"
"감기가 좀 심하게 온 거 같아."
"그렇게 약해서 어떡할래?“
지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삐죽거렸다. 나는 힘없는 웃음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오늘은 좀 많이 괜찮아."
"진짜? 다행이다. 그럼."
"응?“
지수와 내 목소리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맴돌았다.
"혹시 있다가 집 근처로 나올 수 있어? 나 오늘 쿠키 만들었거든. 오늘은 너 학교 올 줄 알고 가져왔는데… 못 주면 너무 아쉬울 거 같아서. 아파서 힘들 것 같아?"
"…아니, 괜찮아. 나갈 수 있어.“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이틀이나 집 밖으로 나가질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비를 흠뻑 맞은 이후로 꽉 막혀버린 가슴이 지수를 보면 시원해질 지도 모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지수는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으며 가방에서 쿠키가 든 예쁜 상자를 내밀었다. 지수의 취향이 담긴 알록달록하고 선명한 색깔의 리본끈이 달린 상자였다. 나는 그 상자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응."
"그럼 우리 저기 놀이터에서 잠깐 얘기하다 갈래? …아무래도 무리려나."
"그래. 좋아.“
우리는 놀이터의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놀이터에는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 두 명이 전부였다. 그 아이들이 놀고 있는 미끄럼틀 쪽을 제외하고는 공터인 것처럼 조용했다.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지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학교에 가지 못했던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연수랑 단 둘이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지수는 지치는 줄 모르고 쉼없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간간히 추임새만 넣으며 지수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 지수의 말이 잠시 멈췄을 때, 지수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수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버린 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뭐야?"
"그냥. 네 얼굴 보니까 왠지 안심돼서.“
그렇게 잠깐을 가만히 있다가 팔에 힘을 풀자 지수가 내게서 멀어졌다. 조금은 당황한 표정, 어색한 표정이었다. 나는 지수에게 해명이라도 하듯 일부러 지수를 향해 더 크게 웃어보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래."
"그렇지. 나두.“
지수는 그때서야 안심한 얼굴로 미소를 짓더니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했다. 지수의 목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수가 내 자매라면 좋을 텐데.
아니, 지수의 가족이 내 가족이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 감춰뒀던 다른 생각들이 하나, 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엄마의 얼굴. 날 꾸짖던 아빠의 얼굴. 그리고 엄마가 내다 버렸던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 지수와의 추억.
위태로운 생각들이 들며 숨이 막혀왔다. 언제든지 내가 바라고 좋아하는 것들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손톱의 끄트머리를 다른 쪽 손가락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톡, 톡. 작은 마찰음이 들렸다.
"야, 너 피나잖아.“
지수가 말을 멈추고 내 손을 확 낚아채고나서야 손가락의 쓰라림이 느껴졌다. 나는 뒤늦게 아, 작게 신음을 내며 손가락을 꽉 쥐었다. 지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와 내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봤다.
"왜 그래, 이런 습관 안 좋아."
"응. …미안."
"미안할게 뭐람.“
지수가 웃었다. 지수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일렁일렁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수야."
"응?"
"너 내 친구할거지?"
"응? 뭐야? 웃겨." 지수는 잠시 큭큭 소리를 내며 웃더니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 이미 친구잖아."
"언제까지 그럴거야?"
"언제까지? 음… 영원히!“
지수가 옆구리 사이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수의 손가락이 날 간지럽혀서도 그랬지만, 영원히, 영원히라는 그 말이 좋았다. 내게는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한 약속이었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 약속. '영원히'.
지수가 만들어준 쿠키를 들고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거실은 한기로 가득했다. 나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내 방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쿠키 하나를 뜯어 빠르게 먹어치운 뒤, 침대에 파고들었다.
기분 나쁜 파열음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반복적으로 들리는 파열음과 함께 정신이 점점 돌아오면서 꿈의 내용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잠에서 정확히 깨어났을 때는 소리가 멈췄다. 제대로 들은 건지 알 수조차 없었기에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나는 이상한 느낌에 숨죽여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가까이 다가가 섰다. 문에 귀를 붙이고 소리에 집중하자 발걸음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렸다.
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움직이다가 다시 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어느새 발걸음 소리는 희미해져 갔다. 이상하다. 엄마의 발걸음 소리라고 하기에는 둔탁하고 무거운데. 정체 모를 발걸음 소리가 멎자 익숙하게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탁. 새벽에 듣기에는 꽤 시끄러운 문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서재의 문소리였다.
손에 힘을 잔뜩 주고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문 열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도록.
열린 문 틈 사이로 안방 문이 닫히고 있는 게 보였다. 분명 아빠가 서재의 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역시 잘못 들었던 건가. 어둠 속에서 홀로 문고리를 쥐고 한숨을 쉬는데, 한숨 소리에 섞여 아주 작은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서재쪽으로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뿐이었다.
나는 실내용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조금씩, 천천히 움직여 서재로 향했다. 안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는 바로 잠에 든 모양이었다. 찰칵, 하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를 내며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빠의 서재는 우리 집에서 두 번째로 큰 방이었다. 사방의 벽에는 커다란 책장들이 천장까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빽빽하게 책들이 꽂혀있었다. 아빠는 여기에서 늘 밤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가끔 책을 읽느라 안방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잠들어버린 아빠를 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아빠가 무슨 책들을 그렇게 열심히 읽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아빠는 큰 일이 있는게 아니라면 누구든 서재에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혼자서 아빠 서재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살금살금 아빠의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라도 잠에서 깬 아빠가 갑자기 서재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까봐 마음을 졸이며 자꾸만 문을 쳐다봤다.
책상과 가장 가까운 책장 쪽에는 두툼하고 커다란 책들이 여러권 꽂혀 있었다. 종류 불문하고 아무 책이나 빨리 정해서 꺼내야할 것 같은 강박감이 느껴졌다. 지나치게 깔끔하고 빈 틈없이 꽂혀 있는 책들을 보자 피부에 소름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든 책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책의 옆면에는 전부 '인공지능'이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어, 책장을 가만히 보고있으면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겁도 없이 아빠의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는 항상 가죽 소재로 된, 등받이가 커다란 사무실용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여기에 등을 온전히 기대고 책을 읽는 아빠의 모습은 언제나 무섭고 날카로웠다. 나는 괜히 아빠의 그런 모습을 떠올리며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댄 채 힘을 뺐다. 등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이라서 홀로 켜진 작은 책상등 불빛이 유독 밝게 보였다. 아무래도 아빠가 어젯밤 깜빡 잊고 불을 끄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불을 끄려고 책상에 가까이 다가섰다. 손을 책상 위로 뻗는 순간,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 뭉치가 보였다. 책상등 불빛이 비추는 책상의 중앙에 놓여있어 한 눈에 들어왔다.
서류를 앞장으로 넘기자 제목이 보였다. 논문이었다. 역시나 '인공지능의 상용화'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인공지능은 연구원으로 일하는 아빠가 씨름하고 있는 오래된 주제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가장 먼저 보이는 글자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실제 사례들을 통해 인공지능의 상용화의 현실성과 부작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연구의 가장 초기 단계는 인공지능의 상황 시뮬레이션을 통한 사례 예측이며, 본 연구는 이 사례 예측을 통해 예상 가능한 상황과 환경을 미리 구성하고 실제 사례에 적용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상용화에 관한 문제는 근래의 과학 기술 및 과학 철학에 관련된 문제 중 가장 주요한 주제다. 우리는 더 이상 인공지능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이 직접 처리하기 곤란한 복잡한 인터넷 시스템의 경우 대부분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교체는 상상 이상의 시간 절약과 노동력 절약을 가져다 주었다. …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삶에 인공지능을 접목시키는 방식이다. 인간의 윤리적 결정 이외의 복잡한 과정만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의 역할은 한계가 크다. 현재 소비되고 있는 막대한 양의 노동력과 그에 따른 자본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의 인공지능의 도입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 더불어 인공지능 도입의 범위를 흔히 '인간적인 일'이라고 분류되는 분야까지 넓히게 된다면 수많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조명의 은은한 빛에 빠져들어 더듬더듬 천천히 그 안에 적힌 글들을 읽어나갔다. 평소에 읽던 책들과는 전혀 다른 문장들이 적혀있어서 빠르게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에서 손을 놓지 못했던 건 거의 모든 문단마다 적힌 아빠의 글씨들 때문이었다. 종이 위에 거칠게 메모된 글자들은 내가 알던 아빠의 필체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비슷해보이긴했지만 아빠답지 않게 빠르게 흘겨쓴 느낌의 문장들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적어 놓은 필체는 거친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사회 문제의 해결 :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통해 어떻게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의 혼란함을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범죄 문제다. 특히 특정 조건의 청소년 및 정신적 질병을 가진 성인들이 가해자가 되는 범죄 사건의 비율이 매우 높다. 여기에서 '특정 조건'이란, 올바른 사회화를 담당해줄 교육이 부재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정 교육의 부재일 수도 있고, 공공 교육의 부재일 수도 있다. …위의 통계에 따르면 대부분 가정 교육의 부재가 청소년들의 범죄율에 유의미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가해자인 청소년들 대부분이 부모가 없거나 부적절한 부모에게 교육 받은 청소년들이다. …'
찰칵.
안방 쪽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그러나 곧 발걸음 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찰칵.
다시 한 번 문소리가 들렸지만, 책상 밑이라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엄마, 혹은 아빠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간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대로 가만히 숨어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듣고만 있었다. 한참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적이 꽤 오래 이어지자 나는 조심스레 책상 의자 위로 다시 돌아왔다. 아까 펼쳤던 페이지를 다시 펼치고 손가락으로 문장들을 훑어 보며 읽었던 부분을 찾아냈다.
'인간과 유사한 기능의 인공지능 상용화 : 인공지능을 인간 삶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입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현재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들을 최대한 유사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필요하다. 현재 대부분의 인공지능은 물리적인 부피를 최소화, 간략화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려면 오히려 물리적인 부피를 늘려야 한다. 인간과 유사한 신체, 팔, 다리, 몸통, 장기 등을 만들어 마치 완벽한 인간처럼 기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신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인공지능이 '인간다움'을 가질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다.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려면 인공지능은 기계의 완벽함을 버리고 인간의 유한함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핵심적인 유한함은 바로 '수명'이다. '인간과 죽음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적 사고는 수명의 한계로부터 기인한다. 인간이 내리는 선택과 감정적 판단은 모두 한정된 수명에 대한 반작용인 본능적 행위들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정해진 수명이 없기 때문에 인간과 유사한 선택 및 감정적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제작 시에 수명을 정하기로 한다. …
…수명이 정해진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를 학습한다. 인간의 사고를 학습한 결과 데이터를 통해 인격을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인공지능 역시 인간처럼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 및 두려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공지능이 학습해야할 데이터 중 가장 중요한 데이터다. …
…인공지능의 실용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실제 사례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실제 사회에 인공지능을 적용함으로써….'
찰칵. 또 한번의 문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빠르게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바깥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엄마와 아빠의 대화 소리였다.
"…가 …이한테… 그…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건지 들어보려고 애썼지만 책상 밑에서는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등과 옆구리 사이로 땀방울이 떨어지는게 느껴졌다. 축축한 몸을 더욱 웅크리며 잔뜩 힘을 줬다. 웅웅거리는 대화 소리는 잠시동안 계속 이어지다가 멈췄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정적을 살피다가 천천히 책상 바깥으로 기어 나갔다. 찰칵. 문소리에 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렸지만, 이후로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숨을 몰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을 죽이고 모든 손가락에 잔뜩 힘을 준 채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숨소리 정도의 아주 작은 소음 외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거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불과 삼십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에 들어온 나는 고요함에 안심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죽음. 수명. 한계. 공포. 두려움. 그리고 인공지능.
내게 남은 것은 이 여섯 개의 단어들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은 너무나도 많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덜컥 두려웠다. 왜 하필 그 글이 아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던 걸까. 인쇄된 글자 옆에 두서없이 적혀있던 메모들은 아빠의 것이 아니었다. 종이 뭉치들을 한 장씩 넘겨보며 나는 더욱 확신했다. 이건 아빠의 글씨체가 아니라고.
대체 누굴까.
이 답답한 느낌은.
아주 오랫동안 홀로 커다란 수영장의 물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수영장의 물은 투명하고 파래서 고개를 위로 올리면 바깥의 풍경들이 전부 보이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밖으로 헤엄쳐 나갈 수가 없다. 숨이 막혀오고 정신이 혼미해져도 다리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나갈 수가 없다. 누군가가 꺼내주지 않는다면.
눈을 감자 잠들었던 동안 꿨던 꿈이 떠올랐다. 꿈에서 나는 지수네 가족이었다. 지수와 나는 사이가 몹시 좋은 자매였다. 우리는 비슷한 옷을 사 입고, 같은 밥을 먹는 우애 좋은 자매였다.
지수의 밝게 빛나던 눈빛, 따뜻한 미소. 지수라면 모든 걸 이해해줄 지도 모른다. 착하고 순수한 아이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연수에게도 말해서 더 빨리 상황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침대에 누웠다.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
얼마 자지 못했는데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씻은 듯 개운했다. 나는 평소처럼 밥을 먹고 오랜만에 등교했다. 삼일이 지난 후 걷는 등교길의 냄새는 어색하고 낯설었다.
"오늘 우리 집 놀러 갈래?"
"진짜?“
지수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 빤히 쳐다봤다. '드디어?'하는 표정이었다. 지수는 언제나 우리 집에 한번은 놀러 가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지수에게 엄마나 아빠를 보여준다는게 제대로 상상이 되질 않아서 언제나 피해왔다. 지수가 여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집에 놀러 오고 싶다는 지수의 말에 대답을 얼버무리는 나를 지수는 파고들지 않았다. 그러나 줄곧 궁금했던 모양인지 지수는 흥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같이 가서 놀자."
"완전 좋아.“
지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보다 몇걸음 앞서서 걸어갔다. 그러다가 속도가 너무 빨라진다 싶으면 나를 기다렸다 다시 걸어가길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꼭." 앞서가려는 지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그래.“
지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뭔가를 물어보려다 멈칫하고는 말았다. 나는 그런 지수의 배려가 좋았다. 궁금함을 참고 대답 먼저 해주는 그런 배려심.
엄마는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나와 지수를 반겼다. 내가 집에 친구를 데려가는게 처음인데도 엄마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어서 와." 활짝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견디기 힘든 이질감이 들어 지수의 눈치를 봤다. 혹시 지수가 알아채면 어쩌지. 엄마의 저 표정이 진짜가 아니란 걸.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지수는 엄마의 웃음에 화답하며 자신도 활짝 웃어보였다. 엄마는 친절하게 지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나는 초조하게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어느정도 대화가 정리 됐을 때, 나는 일부러 기분 좋은 웃음으로 지수의 손목을 잡고 방까지 걸어왔다.
"여기가 네 방이야?"
"응."
"우와. 대박 좋아.“
지수는 두리번거리더니 침대에 힘을 빼고 쓰러졌다. "아, 누워도 되지?" 귀여운 웃음 소리를 내며 지수가 물었다. 나는 그것이 질문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꼭 할 말이 뭐야? 드디어 비밀을 얘기해주는 건가?“
"아, 그게….“
지수는 약간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지수와 엄마가 인사를 나눌 때의 엄마의 표정을 떠올렸다.
"나 볼펜을 잃어버렸어."
"무슨 볼펜?"
"…우리 같이 산 거 있잖아. 너희 엄마가 사주신 거."
"아아. 그 귀여운 볼펜?"
"응."
"네가 학교에 안 와서 내가 그걸 몰랐구나. 어쩌다가 잃어버렸어?“
지수는 장난스럽게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어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것이 장난인 줄 알았지만, 덜컥 두려움을 느꼈다.
"엄마가 버렸어."
"어…“
지수는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듯 선뜻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있었다.
"내가 볼펜 끝에 달린 장식을 자꾸 만져서 장식이 부러졌어. 그래서 본드로 그걸 붙이려고 서랍에 넣어뒀거든. 시간이 없어서 그대로 학교에 갔는데 그 사이에 엄마가 그걸 버린 거야. 쓰레기인 줄 알고."
"그랬어?… 다시 사면 되지. 괜찮아.“
나의 말이 이어지며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자 지수는 당황하며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그대로 굳어버린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그걸 왜 버렸냐고 했어. 나한테는 엄청나게 소중한 거라고. 근데 엄마는 이해를 못하더라. 그게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우리 엄마도 그래. 오히려 나한테 막 화낸다니까. 원래 엄마들은 그러잖아." 지수가 애써 웃었다.
"우리 엄만 화도 안 내.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나 이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애써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수에게 엄마나 아빠에 대한 하소연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수야. 난 네 가족이 되고 싶어."
"오. 로맨틱한데? 그렇지만… 난 이미 널 가족이라고 생각해. 정말이야. 넌 나한테 좀 특별한 친구야. 쌍둥이 같달까.“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자꾸만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던 지수가 발버둥을 더했다. 가라앉은 공기 위에 발랄한 지수의 목소리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여기저기로 던져졌다. 그러나 지수가 뒤에 이은 말들은 마냥 발랄한 투가 아니었다. 지수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정말 너의 자매가 되고 싶고, 또… 너희 엄마랑 아빠가 내 엄마 아빠였으면 좋겠어. 그렇게 될 순 없을까?“
나는 어느새 지수 앞에 무릎을 꿇듯이 다리를 포개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수에게 무언가를 애원하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순 없겠지?"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돼. 무슨 뜻이야?“
나는 지수가 내게서 한 발 물러서서 선을 긋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를 바라보는 지수의 눈빛이 낯설었다. 그건 불쾌한 이방인을 마주하는 눈빛이었다.
지수의 그런 눈빛을 보자 초조한 마음이 들어 점점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이런 갑작스러운 거리감은….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지수의 발목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얀 양말을 신은 지수의 발은 깨끗했다. 발만 봐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엄마 아빠가 이상해, 지수야. 이걸…제대로 설명하긴 좀 힘들어. 근데 확실해. 내가 널 믿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어떻게 이상한 건데?“
애원하면 달라질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졌다. 지수는 아까보다 더 낯선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전까지 날 보던 지수의 눈빛이 아니었다.
"감정이… 없어.“
"그게 대체 무슨 얘기야.“
지수는 이제 거의 짜증을 내고 있었다. 지수의 감정이 변하는 걸 느낄 때마다 나 역시 더욱 초조해졌다. 분명히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데, 거짓을 말하느라 난감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난 지금 수상한 사람이 되었다. 가빠진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네가 날 도와줘야 해. 응? 날 너희 집으로 데려가줘. 거기서 살게 해줘. 네 가족으로. 우리 정말 쌍둥이 자매처럼 살면 되잖아.“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목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말이 끝난 후였다. 나는 지수의 하얀 발목을 붙잡고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지수의 표정에 작은 혐오의 감정이 비춰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내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 거 같아. 우리 부모님한테 허락도 받아야 하고… 또… 일단은 오늘 집 가서 다시 알아보고 말해줄게. 알겠지?"
"지수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나 이만 가봐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지수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지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밀어냈다. 뭔가 설명을, 해명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지수는 방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지수 벌써 가는 거야?"
"네, 아주머니. 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지수는 점점 멀어졌다.
"내일 봐. 얼른 나아.“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순식간에 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절망감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찬물을 끼얹은 듯 피부가 싸늘했고, 손 끝과 발 끝이 기분 나쁘게 저릿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다 장난이었다고 말하며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탓인지, 몸이 얼어붙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로지 지수의 표정만이 가득했다. 혼란스럽고 당황한 표정. …미묘한 혐오가 섞여있는.
지수는 다음 날부터 서서히 나와 멀어졌다. 아니, 어쩌면 단숨에 멀어졌다고 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거절의 신호를 보내는 지수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지수는 어느 순간부터 나와 말도 섞지 않았고, 마주쳐도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연수에게도 여러 번 문자를 보내 지수와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달쯤 후에 동네에서 마주친 지수와 연수는 나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고 먼저 지나쳐갔다.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들이 나를 보고 수근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가까이 다가가 묻고 싶었지만 그들과 나 사이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날은 다시 한 번 마음이 무너져내려, 지수에게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나는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학교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물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숨을 참는 연습을 했다. 역시 내가 너무 지나쳤어. 난 어쩌면 이렇게 정도를 모를까. 쓸모없는 걸 알았지만, 끊임없는 자책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하루종일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침대 옆 테이블에 버섯이 들어간 따뜻한 죽과 물 한잔이 놓여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기어나와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죽이었다. 물까지 다 마시고 난 후, 옷장과 서랍장의 칸들을 전부 열어놓고 방 한 가운데 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옷과 필요한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바깥은 빛 없이 어두운 한밤 중이었고, 시계는 새벽 두 시를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2. 빛
한참을 걸으며 나는 내 자신이 불구자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머릿속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문제 같은 건 내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다른 계획이 있어서 집을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혹시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로봇인 건 아닐까. 나는 멍하니 그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눈을 감자 지수의 눈빛이 보였다. 내겐 가장 아픈 눈빛. 가장 따뜻할 때와 가장 차가울 때의 눈빛은 명백하게 달랐다. 그리고 연수의 눈빛. 마지막에 본 연수의 눈은 초등학교 때 날 괴롭히던 아이들의 눈과 닮아 있었다. 날 괴롭히던 아이들의 눈빛. 무언가를 혐오하는 눈빛. 그 시선 끝에는 내가 있었다.
그들은 로봇이었을까? 로봇도 인간에게 상처를 줄 수 있나?
나는 가만히 생각해보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혹시 반대로 내가 로봇인 건 아닐까,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나 분명히 나는 잔인한 고통들을 겪었다. 그 상처들을. 그들의 눈빛이 날 아프게 했다는 건 분명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로봇도 상처를 받을 수 있나?
엄마와 아빠를 떠올렸다. 만약 엄마와 아빠가 로봇이라면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를 떠올렸다. 나를 둘러 쌌던 그 전부를.
그들은 적어도 내게 상처를 줬다. 분명히 뜬 두 눈으로.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내게 상처마저 주지 않았다.
걷고 또 걷다보니 오로지 두 발이 움직이는 것만이 보일 정도로 어두컴컴한 길에 다다랐다. 그렇다고 살던 동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같은 동네라고 봐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집이 있는 곳과 분위기는 아주 다르지만, 바로 붙어있는 구역. 다만 이곳은 오래전에 폐쇄되어 버려진 집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낡은 곳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때도 친구들과 같이 놀다가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다. 이 근방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던 나는 가로등마저 들어오지 않는 골목 모퉁이에서 주저 앉아 혼자 울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나를 찾기 위해 저녁 내내 동네를 돌다가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난생 처음 내보는 커다란 목소리로 '엄마!'하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엄마, 여기는 왜 이렇게 깜깜하고 무서워요?"
"여기는 오래전부터 재개발이 되려고 사람들을 내보낸 곳이라서 그래. 우리가 사는 곳도 원래는 이런 곳이었어. 근데 이쪽 구역에 불이 나면서 사람들이 죽어서 우리 집이 있는 동네만 재개발이 된 거야."
"…재개발이 뭔데요?"
"낡고 오래된 집들을 새로 지어주는 거야."
"누가 죽었어요?"
"글쎄. 아마 재개발을 반대했던 사람들?“
불이 났던 이곳은 빛이 있든 없든 늘 어둡게 보였다. 어떤 집은 거의 통째로 재가 되어버려 흔적으로만 남았고, 테두리만 까맣게 그을리고 안은 제법 멀쩡한 집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그런 집마저도 곧바로 무너질 것처럼 허름하게 주저앉은 상태였다. 옛날에는 동네의 소문을 듣고 이곳에서 귀신들이 나온다고, 특히 밤에 혼자 가면 무시무시한 일을 당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런 소문도, 이곳의 존재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전부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이곳에 관해서 얘기를 꺼내거나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여기를 넘어서면 어디가 나오는지 늘 궁금했다. 늘 안전을 강조했던 엄마 때문에 먼 곳으로는 가볼 수가 없었고, 동네를 벗어나는 건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해서는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저 폐쇄된 동네를 밟고 넘어서면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곳이 나올 거라는 상상을 했었다. 그만큼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집 근처의 가게들과 지나치게 밝은 가로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없으니 조금 더 살만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을 조금 더 걷다보니,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작은 빛이 보였다. 그 빛은 걸음을 더할수록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고소한 냄새도 역시 점점 더 진해졌다.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보니 그곳은 집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아주 평범한 집. 그 옆으로 줄줄이 다른 집들이 이어져있었다. 나는 골목 틈새를 걸어가며 불이 켜진 집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엄마는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러나 정작 와서 본 이곳은 엄마가 말해준 것과는 달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겉으로 보기에 조금 낡아보이는 집들에는 그을린 자국이나 손상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몇몇 집은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반듯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집처럼 보였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곳은 어느 집의 마당이었다. 마당의 커다란 옛날식 마루에 세 명의 가족이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상의 중앙에 있는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냄새를 맡아보니 된장찌개 아니면 된장국인 것 같았다.
한참 불 켜진 집이 많은 곳을 지나치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아까 맡았던 된장찌개 냄새 때문인지 슬슬 배가 고팠다. 두통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집에서 나오기 전 먹은 죽은 소화된 지 오래였다. 배에서 자꾸만 소리가 울려 배를 움켜쥐고 걷자 자세가 자꾸만 구부정해 졌다. 그래서인지 가방에 든 짐이 많지 않았는데도 금방 어깨가 욱신거렸다.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던 길고 좁은 골목의 끝에서 정체 모를 빛이 반짝거렸다. 이번에는 꽤나 밝고, 크고, 많은 빛이었다. 나는 속도를 높여 더 빨리 걸어갔다. 골목을 벗어나자 곧바로 공터가 이어졌고, 공터의 끝에 밝은 빛에 휩싸인 놀이공원이 보였다.
놀이공원. 이런 놀이공원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태어나서 와본 적도 없고, 멀리에서 본 적도 없고, 있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놀이공원 내부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중간 중간 섞인 작은 소리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노래를 한참 듣고있자니 도깨비나 귀신 같은 것에 홀린 기분이었다.
원더랜드.
곧 무너질 것처럼 여기저기 색이 바래있고 검은 때가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있는 간판에 그렇게 써 있었다. 원더랜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원더랜드라는 글자를 둘러싼 작은 조명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 중 몇 개의 조명들, 꽤 많은 개수의 조명들은 깨져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멀쩡하지만 불이 켜지지 않는 조명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