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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1)

1. 기억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에게 말했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학교에 안 가면 안되냐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부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마치 웃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웃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안돼.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지."

"학교에 왜 가야하는데?"

"학교에서 배울 걸 배워야 나중에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거야. 올바른 성인으로."

"뭘 배우는데?"

"그거야….“


엄마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틀에 박힌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 장보기에 필요한 간단한 셈과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안전하게 잘 꾸려나가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부터, 후에 사회에서의 직업을 가지게 될 때를 대비해서 그에 맞는 리더쉽과 창의성까지. 엄마는 거의 오분 넘게 그런 것들에 관해 줄줄이 설명했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침대의 이불 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아주 어릴 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가 유독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걸.


난 별다른 불만 없이 엄마와 아빠의 가르침 밑에서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라났다. 복잡한 의사소통이랄까. 우리들 사이에 그런 건 없었다.


밥 먹을래? 배고프니? 네.


지금 뭐하고 있어? 학습지 숙제 중이에요.


엄마, 언제 집에 오세요? 응, 저녁 먹기 전까지는 들어갈 거야.


이런 대화가 우리 사이에 거의 전부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게는 언제나 유치원에 다니는 것이나 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안락한 집에서 벗어나 만나게 되는 낯선 아이들과 목소리가 큰 선생님들. 그 틈에서 하루의 거의 반 정도를 보낸다는 건 내게 즐거움보다는 두려움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주변 아이들도 모두 유치원에 다니고 또 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에 너도 가야해'라며 항상 날 강제로 낯선 곳에 보냈다.


그때까지는 별 수 없이 엄마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 작고 어렸다. 늘 단호하게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엄마에게 반항할 용기 같은 게 있을리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언젠가부터 점점 그런 삶에 익숙해져갔다.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다른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아하는 것처럼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들 속에 스며들기 위해 노력했다. 두려움과 불안은 점점 무딘 감각이 되어갔다.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몰려왔다.


나는 점점 더 평범해져 갔다. 적당한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고, 큰 존재감 없이 학급 안에 숨어서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


기억해보면 그날 역시 너무나도 평범한 날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던 날. 오전부터 시간표에 체육이 있어서 우리는 모두 운동장으로 모여있었다. 선생님은 이긴 팀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며 우리에게 공을 던졌고, 힘이 세고 사교성이 좋은 여자 아이들이 중앙으로 모여 아이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우리 팀 들어올 사람!“


나는 엉겁결에 옆에 있던 친구를 따라 경계선의 한 쪽 안으로 밀려 들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와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라는 포상에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정글을 사냥하는 야생동물들처럼 전부 인상을 찡그린 채 자신의 경계선 바깥의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구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과열되어버린 분위기와 그 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나.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체육 선생님에게 피구 게임에서 빠지게 해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까만 피부에 늘 비슷한 체육복을 상하의로 맞춰 입었던 체육 선생님은, 아이들이 몸이 아프다는 말을 할 때마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체육 선생님의 화난 얼굴을 보는게 무서웠던 나는 억지로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그 공간에 가만히 서 있었다. 황토색 운동장의 흙 사이로 새하얗고 굵은 가루가 뿌려지며 작은 네모 모양의 경기장을 그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바글바글 그 안에서 서로 떠들며 모여있었다.


이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따가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움직임으로 시선을 주고 받으며 꽤 민첩하게 움직였다. 공을 잘 던지고 피구를 잘 하기로 유명한 아이들의 손으로 공이 옮겨 갔다.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공이 오가는 걸 지켜봤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아이들 틈으로 이리저리 피하며 꽤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점점 숨이 가빠오는 걸 느끼고 있던 찰나, 어디선가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상대 팀의 어떤 여자 아이가 나와 공을 번갈아 노려 보고 있었다. 곧 내게 공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 아이의 눈길을 피해 다른 친구들 틈으로 숨었지만, 내 근처의 아이들은 곧 하나 둘 공을 맞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공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그 애의 거친 목소리가 몇 번이나 들려왔다.


곁에 몇 명 남지 않아 불안함에 떨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그 여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공은 그 아이의 손에 들려있었다.


아찔한 공포감에 순간적으로 눈을 꽉 감은 순간, 공이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초등학생이 던졌다기에는 강한 힘이 실린 공이 눈두덩이를 강하게 치고 떨어졌다. 공을 맞자마자 운동장 흙바닥에 주저 앉았다. 오른쪽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억지로 뜨려고 해서 겨우 뜨면 눈 앞이 뿌옇게 보였다. 몇몇 아이들은 내게 다가와 괜찮냐고,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보건실에 끌려갔다. 보건실 선생님은 내 눈을 확인해보더니 안대를 눈에 덮어주었다.


"오늘 학교 끝나면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고 바로 안과 다녀와. 알겠지?"

"네.“


안대를 끼고 교실로 돌아갔을 때, 교실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교실 한 구석에서 날 공으로 쳤던 아이를 비롯한 몇명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나를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분명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자리에 앉아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 이후로 매일, 나는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학급 친구들과 무언가를 같이 할 때 나는 항상 제외 당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자 나와 친했던 친구들마저 나를 어색하게 대하더니 점점 멀어졌다.


쟤가 기연이한테 공 맞더니 일부러 울면서 넘어졌대. 관심받고 싶어서. 진짜? 왜 저래? 몰라. 공주님인가? 풉.


아닌데.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지만 한번도 직접 말해본 적은 없었다. 내 말을 들어줄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항상 내게서 멀리 떨어져서 나를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배가 너무 아파요."

"어떻게 아파?"

"잘 모르겠어요. 쥐어 짜듯이… 어쩌다 한 번씩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그럼 오늘 학교 끝나고 병원 다녀오자."

"아니, 학교 못 가겠어요. 진짜로.“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채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자, 엄마가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안 나는데…."

"머리도 좀 아파요."

"잠깐만. 안 되겠다. 오늘 큰 병원에 가보자."

"왜?"

"너 이렇게 배 아프다고 한 거 한두 번이 아니잖아.“


엄마의 표정은 차갑게, 아니, 어딘가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엄마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피구를 하다가 눈에 공을 맞아 눈이 심하게 부풀어 올랐던 날, 엄마는 내 얼굴을 보고 눈썹을 아래로 늘어 뜨리며 "어떡하니? 괜찮아?"라는 말을 했었다. 엄마의 입꼬리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있었다.


맞아, 엄마의 표정은 늘 이런식이었지. 근데, 이상하다. 왜 난 이런 얼굴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을까.


늘 보던 얼굴이었다. 내가 이상함을 느꼈던 건, 최근 들어 같은 반의 몇몇 여자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후로부터 내게 생긴 습관 때문이었다. 상대방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서도 상대방의 표정과 감정을 관찰하는 버릇. 그건 나를 증오하는 아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 버릇은 어느 순간부터 강박적으로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표정으로 사람의 감정을 유추하게 되었다. 엄마에게 반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도, 그 친구들이 나를 알게 모르게 괴롭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도 엄마는 늘 같은 표정이었다. 차갑게, 아니,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 이상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관찰되는 하나의 마지막 얼굴. 엄마에겐 그게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혹은 숨겨야만 해서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그 표정.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나서 내가 느낀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한동안은 아무에게도 말 할수가 없었다. 난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그러나 이 생경한 공포감,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질감은 나를 덥썩 집어삼켜 온종일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더욱 유심히 관찰했다. 엄마는 늘 한결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낯설었다. 엄마를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피부의 솜털이 위로 올라올만큼.


"엑스레이 촬영 상 별 문제는 없네요. 다만 가스가 좀 차 있어요. 통증이 심했겠네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인 것 같은데.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나봐요?"

"스트레스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보통 스트레스가 원인이거든요. 체질 탓도 있겠지만. 아직 어려서 내시경이나 다른 검사는 하기도 어렵고 이 상황에서는…불필요할 것 같네요. 약 처방해 드릴테니까 며칠 먹여보세요. 그래도 증상 계속되면 예약하시고 내원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종이 봉투에는 처음 보는 약들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약이 담긴 작은 비닐 파우치를 한참 쳐다보자, 엄마가 그걸 다시 집어넣고는 나를 향해 또 다시 웃어보였다.


"약 잘 챙겨먹어야 해.“


엄마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텅 비어 있었다. 비어 있다라는 말 밖에는 그 얼굴을 설명해 낼 방법이 없었다.


"나 왔어."

"다녀오셨어요."

"왔어요, 여보?“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든 채 현관까지 와서 아빠를 반겼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현관에 서서 아빠에게 꾸벅 인사를 했고, 아빠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와 엄마의 인사에 대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뭐예요?"

"뭐가?"

"이거요.“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아빠가 현관앞에 내려놓은 가방을 가리켰다. 아빠는 몇초간 엄마를 빤히 바라보더니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웃었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빠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나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출장 다녀온 짐이잖아."

"출장?"

"왜 그래.“


아빠는 미세하게 눈썹을 떨더니 거의 화가 난 표정이 되어 엄마를 쳐다봤다.


"맞다, 그랬지. 기억에 문제가 생겼나봐요.“


대답 없이 한숨을 내쉰 아빠는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엄마는 아빠가 걸어가는 걸 가만히 보다가 아빠가 두고 간 가방 지퍼를 열어 그 안을 뒤적거렸다. 거실에는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엄마는 곧 가방을 들고 다용도실로 사라졌다.


저녁 밥을 먹는 내내, 어색함은 계속됐다. 아빠는 어딘가 걱정되는 얼굴로 밥을 먹다가 자꾸만 엄마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그런 아빠와 엄마를 살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반찬과 밥그릇에 계속 젓가락을 가져갔다. 갑자기 엄마가 젓가락을 떨어뜨리자 아빠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다시 집어들어 싱크대로 향했다. 아빠는 민망한 듯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빠."

"응?“


자리에 앉자마자 아빠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할 말이 있는데요."

"무슨?“


평소보다 거칠고 쌀쌀맞은 아빠의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입에 있는 것들을 씹은 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있다가 서재로 갈게요."

"…그래.“


엄마가 다시 식탁에 돌아오고 우리는 다시 침묵 속에 잠겼다. 체한 듯이 밥을 먹은 것이 꽉 막힌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서재의 문을 작게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어"하는 아빠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이미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간 후였다. 나는 아빠의 반응을 기다리면서도 혹시나 침실의 방문이 열릴까 침실 쪽을 계속 살폈다. 그러나 침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운 방의 중앙에 아빠가 작은 데스크 조명을 켜두고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빠는 작은 안경을 끼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서재는 내게 익숙지 않은 곳이었다. 낯선 공간의 냄새가 훅 풍겨오자 문득 두 다리가 그대로 멈췄다. 아빠 역시 내가 들어온 것이 낯설었는지, 아빠는 안경을 벗고 나를 다시 쳐다봤다. 나는 종종 걸음으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아빠가 앉아있는 책상에 가까이 다가섰다.


아빠가 읽고 있는 책은 인공지능의 머신러닝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빠가 하는 일은 인공지능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아빠의 손에는 늘 이런 책들이 들려있었다. 아빠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말하려던 내용을 모두 잊어버릴 것 같아, 아빠의 책상에 놓인 책들에 시선을 멍하니 던지며 입을 열었다.


"아빠. 말할 게 있어요."

"갑자기 무슨 말이길래 그래? 그것보다도 지금 너무 늦지 않았어? 얼른 자야지.“


아빠의 어색한 태도에 나는 순간 움츠러들었다. 뭐지, 이 분위기. 식탁에서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내가 말했던 걸 그냥 가볍게 잊어버린 걸까. 그렇지만 아빠의 말투는 아까보다 친절했다. 나는 기회를 놓칠까 싶어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말이에요."

"말해봐."

"엄마가 이상해요."

"뭐?"

"엄마가… 이상한 거 같아요."

"뭐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빠도 느꼈잖아요. 오늘 엄마의 그 행동 말이에요.“


아빠의 눈동자에 어둠 속 작은 조명이 밝게 반사되어 빛났다. 나는 반사된 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이상할만큼 선명하게 반짝이는 빛이었다.


"엄마가 이상해요. 엄마한테서 감정이 안 느껴져요. 제가 아무리 엄마 얼굴을 살펴도 엄마의 마음이 뭔지 잘….“


아빠는 책상에 벗겨져 있던 작은 안경을 다시 얼굴로 가져왔다. 아빠의 눈 앞에 놓인 안경알은 작은 조명을 더 밝게 반사시켰고, 그 때문에 안경 뒤에 있는 아빠의 눈동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사된 빛은 나의 말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건 단순히 반사된 빛이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발산되는 빛이었다.


"아빠 눈이 이상해요."

아빠는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미소를 짓더니, 나를 안아 올린 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요즘 너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구나. 엄마가 네 걱정 많이 해.“


아빠는 이상할만큼 빠른 속도로 내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를 침대 위에 눕힌 아빠는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지금은 자야할 때야. 잠자기 어려우면 이거 먹고 자자.“


아빠의 손가락이 주머니에서 작은 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꺼냈다. 병이 코앞까지 오자 달콤한 바나나 향기가 훅 올라왔다. 내가 당황하여 아빠와 작은 병을 번갈아 바라보는 동안, 아빠는 빠르게 내 입 안에 병 입구를 들이밀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바나나 향이 나는 액체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거 먹고 자면 푹 잠들 수 있어.“

베개에 머리가 닿자 두통과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눈이 점점 감겼다. 졸음 때문에 아빠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반쯤 뜬 눈 사이로 아빠의 눈동자만은 볼 수 있었다. 나는 눈동자에서 나오는 빛을 만져보려고 손을 허공에 허우적댔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 빛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뒤로는 깜깜한 어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아빠의 눈에서는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내게 몇 번이나 어제 밤 일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아빠의 눈빛은 강박적이고 집요했다. 나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눈빛을 피해 허공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고.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밤의 이상한 빛과 이상한 아빠의 얼굴, 그리고 달콤한 향이 났던 무언가.


그 날의 기억은 어느순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지다가도 문득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드러내서는 안 될 무기를 숨기듯이 머리속에서 그 기억을 숨겼다. 그러면서 나 역시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먼저 내미는 껌껌한 아이가 되어갔다. 균형. 내가 진실을 숨기려 했던 것은 균형 때문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진실이 이 얄팍하고 평화로운 균형을 깨뜨릴 것이라고 예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의 멸시 담긴 시선은 언제나 나의 하루를 무너뜨렸다. 그런 내게 균형은 간절한 것이었다.


"왜 울어?"

"…누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

"음… 그럴 때는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봐.“


나는 웃었다. 그때만큼은 엄마의 얼굴이 순수해보였다. 엄마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균형은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무엇 하나라도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러나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나를 끊임없이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한참동안은 여전히 공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아이들은 나와 다른 중학교에 배정됐고, 나는 집에서 멀더라도 그 아이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학교를 가장 우선으로 지망했다.

결과는 다행히도 바라던대로 되었다. 학교에는 낯선 친구들 투성이였다. 하지만 이쪽이 내겐 훨씬 더 좋았다. 이전의 나를 알던 친구들이 이 곳에는 한 명도 없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낯선 이들이 가득한 학교에서 나는 온전한 편안함을 느꼈다.


"아이?"

"어…."

"아이 맞구나. 너도 여기 배정됐어?"

"응. …나만 온 줄 알았는데."

"그니까. 엄청 반갑다.“


차가운 복도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렸을 땐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이 서 있었다.


역시 어느 곳에서나 혼자일 수는 없는 건가.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 다가온 아이는 지수였다. 새로운 학교에서 마주치기에 최악인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주쳐도 아무 상관 없을 만큼 편한 친구도 아니었다. 지수는 초등학교 때 나와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던 친구다. 두루두루 친한 친구가 많아서, 나를 괴롭히던 그 아이들과도 종종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지수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지레 짐작해보며 나의 표정과 모든 행동들을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서 비롯된 어색함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직 집 안 갔어?"

"응. 청소 당번이라…."

"나돈데.“


나는 입술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집 갈 때 같이 갈래? 우리 집 되게 가깝잖아."

"…그래.“


얼떨결에 침을 꿀꺽 삼키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버렸고 지수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온몸을 따갑게 찌르는 침묵이 잠시동안 이어졌다. 다시 인사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이야, 사실 나 너랑 되게 친해지고 싶었어."

"나랑?"

"응. 우리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는데. 뭔가 항상 어색한 사이였던 것 같아서."

"…음, 조금 그랬지."

"아이 너는 공부도 잘 하고, 뭔가 되게 착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아냐, 정말 아니야."

"그리고 사실…."

지수는 잠시 걸음의 속도를 줄이더니 내 표정을 한 번 살폈다. 그리고는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나도 그렇고, 몇 명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기연이네가 너 괴롭혔던 거.“


나는 순간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지수는 고개를 숙이더니,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널 미워했던 건 아니야. 아니, 오히려 널 좋아했지. 널 응원했어. 근데 나도 무서웠어. 그 상황에서 왠지… 너한테 다가간다는 거.“


지수의 손은 따뜻했다.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따뜻한 손길과 따뜻한 말투.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는 말. 모든 것이 너무 어색하고 갑작스러워서 정신이 얼얼했다. 나는 이전의 습관대로 지수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지수의 감정을 살피려 노력했다. 지수의 눈빛은 복도 창가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수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빠의 눈에서 빛을 봤던 날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 미안해. 그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서."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제라도 너랑 좀 더 친해지고 싶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친해지면 되지. 우리 집도 같이 가기로 했잖아."

"응. 앞으로도 계속 같이 갈까?"

"그래.“


지수는 집에 함께 돌아가는 내내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수의 가족들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지수가 키우는 강아지 이야기. 이 이야기들이 끝나자 지수는 자신의 취미에 대해서도 한없이 떠들어댔다. 지수는 레고와 퍼즐 맞추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완성이 되었을 때의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며 미소를 지었다. 또, 집에 가기 직전에는 내게 비밀을 털어놓듯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연수 이야기도 전해줬다.


"연수도 사실 너랑 친해지고 싶어했어. 연수가 나랑 제일 친했잖아. 그래서 우리는 네 얘기 많이 했거든.“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해야할지, 아쉬워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수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고, 나중에 연수도 소개시켜달라고 말하면서. 지수는 활짝 웃으며 꼭 셋이서 같이 놀자고 말했다. 그렇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지수를 바라보다가 지수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쯤, 나도 뒤돌아 섰다.


너무 많은 일이 한번에 일어난 기분이었다. 지수를 만난 것도, 지수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지수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리고 연수 역시 나를 궁금해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집 앞을 오랫동안 서성였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불이 켜지는 골목의 센서등은, 어느 순간에 내가 움직여도 빛을 내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다시 움직여야 했다. 다시 불이 들어오기 전 몇 초, 혹은 일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새까만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이런 어둠 속에 있을 때면 아빠가 주는 바나나향의 액체를 마시고 잠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날의 기억은 이렇게 불쑥 나를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햇빛에 비춰 밝게 빛났던 지수의 그 눈빛이 아빠의 눈빛과 겹쳐 보였다. 한 차례 센서등이 꺼지고 다시 한참 후에 불이 들어왔을 때, 눈에 정면으로 들어온 불빛이 눈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따뜻하다. 지수의 눈빛은 따뜻했다. 한참을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던 말이었다. 눈을 감아도 하얀 불빛이 어른거렸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센서등이 꺼지기 전에 발에 힘을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곧 두 발을 비추던 빛이 사라졌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었다. 그렇게 몇 분을 뛰어가자 밝은 번화가가 보였다. 그곳의 빛은 꺼지지 않고 정신없이 반짝거리기만 했다.


*


지수와 친해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매일 같이 집에 가다보니 어쩔 때는 함께 맛있는 걸 사 먹기도 했고, 틈이 나면 지수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또 연수와 함께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잡히는 날에는 지수와 늦게까지 함께 있다가 연수를 만나러 가고는 했다. 연수는 부모님의 강요로 평일에도 학원을 두 군데나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연수를 만나려면 늦은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서도 겨우 30분 정도 같이 있으면서 함께 간식을 먹는 게 전부였다. 대신 우리는 주말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모였다.


연수와 함께 있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나는 지수와 오래 같이 있었다. 지수는 늘 따뜻하고 친절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 짓는 미소, 함께 걸어갈 때 슬며시 잡는 부드러운 손. 모든 게 낯설면서도 좋았다.


나는 지수를 가만히 바라보길 좋아했다. 지수의 표정이나 행동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부러움과 애정이 섞인 특유의 몽글하고 울컥하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지수의 집에 갔을 때 그런 감정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수처럼 따뜻한 얼굴로 웃어주는 지수의 엄마, 늦지 않은 시간에 퇴근해서 맛있는 음식을 사줬던 지수의 아빠. 그들은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수는 나와 가까워진만큼 우리 집에 오고 싶어했지만, 나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지수를 데려가지 못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그것을.


나는 지수를 집에 데려오고 싶은 날만큼 지수의 집에 함께 가서 지수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수의 부모님은 종종 지수에게 물건을 사주는 김에 내게도 똑같은 걸 사주었다. 그럴때마다 지수와 나는 커플 아이템이 생겼다며 마주 보고 좋아했다. 큰 것들은 아니었다. 지우개나 연필, 작은 간식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유독 하나를 소중히 여겼다. 끝에 귀여운 솜사탕 모양의 장식이 달린 볼펜. 나로서는 처음 가져보는 귀여운 물건이라 처음 받고나서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아,“


뚝, 하고 솜사탕 모양의 장식이 부러져버렸던 건 집에서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마침 늦은 시간이라서 꾸벅꾸벅 졸며 문제지를 쥐고 있었는데,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던 장식이 별안간 부러져 떨어진 것이다. 나는 몽롱한 눈을 번쩍 뜨고 볼펜을 유심히 살폈다. 이제 보니 장식이 연결되어있던 곳이 상당히 얇아보였다. 본드나 테이프로 다시 붙여보려고 서랍을 뒤적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졸음이 다시 몰려와 뒷머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볼펜을 서랍에 소중히 넣어두고 침대로 향했다. 다음 날 꼭 고치겠다고 다짐하면서.


아침에 그만 늦잠을 자버린 나는 볼펜을 고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러진 볼펜을 그대로 들고 가기엔 장식을 잃어버릴까 불안해서, 서랍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빈 손으로 돌아섰다. 지수한테 작은 잔소리를 듣겠다고 중얼거리며 방문을 닫고 나섰다.


그리고 그날 오후, 집에 돌아왔을 때 볼펜은 사라지고 없었다. 손바닥을 더듬어가며 온 서랍을 다 뒤졌지만 볼펜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인데. 대체 어디 간거야. 나는 잔뜩 볼멘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찾았던 곳을 반복해서 계속 뒤적거렸다.


"간식 먹을래?“


그때, 엄마가 문을 벌컥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여기에 있던 볼펜 못 봤어요?“


나는 가라앉히지 못해 잔뜩 열이 오른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대답했다.


"그거, 버렸는데. 고장났잖아."

"뭐라고요?“


나는 씩씩거리며 엄마를 노려봤다. 엄마는 미동없이 나를 가만히 마주봤다.


"간식 먹어."

"어디에 버렸어요?"

"이미 내놨어. 저기, 아파트 쓰레기 수거하는 곳에.“


창 밖을 바라보니 점심쯤부터 시작된 빗줄기가 어느덧 두꺼워져 바닥을 가득 적실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밀쳐내고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산 없이 뛰쳐나온 나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쓰레기 수거함으로 향했다. 비가 온 탓에 비릿한 쓰레기 냄새가 콧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얘야, 왜 그러니?“


쓰레기 사이를 한참 뒤적거리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찰박, 찰박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더니 체구가 작은 경비 아저씨가 우산을 붙잡은채 뛰어왔다.


"아이고, 이게 다 뭐야!“


경비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잔뜩 헤집어진 쓰레기 봉투들이 보였다. 빗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데도 내 손은 지저분하게 물들어있었다.


"너 몇동 몇호 사는 애냐! 이걸 다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만들어놨어!“


경비 아저씨가 호통을 치자 심장이 두근거리며 침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목구멍이 따끔했다. 우산을 쓰고 각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멈춰서 내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그게….“


갑자기 커다란 신음과 함께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주 서러운 울음이었다. 내가 말도 못하고 울자, 내 어깨를 붙잡았던 아주머니가 머리 위에 우산을 들이 밀며 내 등을 토닥였다.


"아휴, 아저씨 그만하세요. 뭐 사정이 있겠죠. …얘, 어디 살아?“


아주머니가 내게 다정하게 묻자 눈물은 더욱 거세게 터져나왔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온몸을 들썩거리며 목놓아 울자 어느 순간 몸이 급속도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눈물 때문에 몸이 떨리는 게 아니라 견딜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숨이 더욱 가빠지고 어지러워지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경비실에 데려가서 엄마를 좀….“


날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갑자기 흐리게 보였다. 나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서 이러고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빗속에 주저앉았다.


눈이 감겼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내 방의 침대 위였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이 빳빳하게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프다,


침을 삼킬 때마다 유리조각들이 목구멍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따가웠다. 눈을 꽉 감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곧이어 엄마가 방에 들어왔다. 엄마는 경비실의 안내방송을 듣고 날 데려왔다고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거기에 가 있었냐고, 엄마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특유의 순수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볼펜을 대체 왜 버렸냐고, 왜 내 소중한 걸 버린거냐고 화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을만큼 엄마는 건조한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는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엄한 목소리로 나를 다그치기만 했다. 비가 올 때 우산 없이 나가는 건 정상이 아니라고.


모두가 나가고 나서 나만 남았을 때, 나는 엄마가 두고 간 약을 겨우 삼켜내고는 고통에 다시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집이 지긋지긋하다고. 엄마와 아빠가 이젠 정말 싫다고. 아니, 끔찍하다고. 그래서 더 이상 여기서 살고 싶지 않다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불안해하며 지키려 했던 그 작은 균형, 그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지수와의 일상은 내게 새로운 균형이 되었고, 엄마와 아빠의 존재는 오히려 그 균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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