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1호의 대나무 숲.
그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다.
그냥…
더는 돌아갈 병원이 없던 날이었다.
새벽 두 시.
나는 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지쳐 있는데
눈은 말똥말똥했고,
심장은 괜히 분주했고,
생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천장을 바라보며
수십 번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계속 살 순 없는데.”
그러면서도
딱 한 단어는 피해 갔다.
정. 신. 과.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내가 지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검색창을 켰다 닫았다.
‘수면장애’
‘심장 두근거림’
‘이유 없는 불안’
이미 수십 번 검색했던 단어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자동완성에 떠 있는 단어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과.
엔터를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멈춰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마치
어떤 문을 여는 느낌이었다.
엔터를 눌렀다.
병원 이름들이 쭉 나열되었다.
생각보다 많았다.
그 많음이
위로가 되기도,
더 무섭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구나.’
‘그럼 나만 이상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이름이 기록으로 남겠지.’
‘혹시 누가 알게 되면?’
‘회사에 소문이 나면 어쩌지?’
'정신과를 다닌다고 하면…?’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정작 내 마음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는데.
검색 결과를 한참 내려보다가
가까운 병원을 눌렀다.
진료 과목.
의료진 소개.
진료 시간.
모든 정보를 읽으면서도
마음은 자꾸 도망치고 있었다.
“내일 말고, 다음 주에 갈까.”
“이번 달만 넘기고 가볼까.”
“조금만 더 버텨보자.”
사람은
결정을 미루는 데 정말 능숙하다.
특히,
자신을 인정해야 하는 일 앞에서는.
그날 나는
결국 예약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대신
검색 기록을 지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는
계속 그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 신. 과.
피하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마치
“이제는 나를 좀 봐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 생각하면
그날은 패배의 날이 아니었다.
용기의 시작이었다.
검색창에 그 단어를 쳤다는 건
이미 내 마음 어딘가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인정했다는 뜻이니까.
나는 그날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나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은
어떤 단어를 검색창에
치지 못하고 있나요?
그 단어를 피하고 있는 이유는
정말 두려움 때문인가요?
아니면
인정해야 할 마음 때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