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태로운 가지 끝에서 삶의 집착을 털어내는 용기를 배운다
가을은 우리에게 색으로 말을 건다.
한때 찬란했던 초록이 서서히 물러가며, 세상은 단풍의 숨결로 물든다. 붉음은 열정의 잔향처럼 남고, 노랑은 오래된 기억처럼 반짝인다.
생의 절정은 늘 짧고, 그 빛은 오래 남으려 할수록 더 서글프다. 바람이 한 장의 잎을 떼어내듯, 세월은 우리 안의 시간을 조용히 흔든다. 나는 지금 어떤 색으로 남아 있는가.
잎새는 땅으로 떨어지지만,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귀환이다. 바람에 실려 흩날리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놓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본다. 나무는 잎을 잃으면서 본래의 형체를 드러낸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채워져 있을 때는 온전히 볼 수 없고, 비로소 잃은 자리에서 본질을 마주한다. 가을의 나무는 비움의 아름다움을 안다. 그 위태로운 가지 끝에서 삶의 집착을 털어내는 용기를 배운다.
바람 부는 오후, 낙엽들이 길 위에 쌓인다. 저마다 다른 색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순간까지 존재를 밝힌다. 나는 그 위를 천천히 걷는다. 발밑의 마찰음이 마치 시간의 숨결처럼 들린다. 한 장, 또 한 장 밟을 때마다 오래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누군가와의 이별, 미처 다 하지 못한 말, 그리고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들. 낙엽은 기억을 다시 불러내고, 그 속에서 나는 긴 숨을 쉰다. 그것은 그리움보다 깊은 회한이다. 삶의 표면이 마모될수록, 그 속살은 투명해진다.
가을의 풍경은 본질적으로 무상(無常)하다. 낙엽이 쌓인 길은 잠시의 정적 속에 깃든 순환의 시간이다. 모든 생은 한 번 피어나고, 반드시 스러지며, 그 자리에 다시 다른 생이 움트는 것을 안다. 무상은 허무가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만추, 세월은 삶을 고요히 성찰하게 한다. 가을의 하늘처럼 높게, 낙엽의 침묵처럼 짙게, 인생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모든 계절이 그렇듯, 우리의 생도 지나가야 완성된다.
길가의 벤치에 앉아 한 장의 낙엽을 펼친다. 그 얇은 결 사이로 햇살이 스민다. 삶이란 이처럼 덧없고도 아름다운 한순간의 빛이다. 가을은 우리에게 '그 빛을 잠시 품었다가 놓을 줄 알라'고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내려놓는 일에 서툴지 않기를, 스러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언젠가 한 장의 낙엽처럼, 조용히 내려앉을 수 있기를. 내 안의 색이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으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