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아침, 나는 동작역 1번 출구에서 허밍웨이를 지나 피천득산책로를 걸었다. 길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아침의 서두름과 느긋함이 교차하는 발걸음이 경쾌하게 곳곳에 찍혀 있었다.
얼굴에 와닿는 명징한 공기가 나를 깨운다. 눈은 세상의 소음을 덮으며 온통 하얗게 하얗게 색칠하고 있었다. 한적한 눈길을 걷노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책로에서 피천득 선생의 동상에 쌓인 눈을 털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어머나, 장갑 없이 맨손이네요." 금아 선생의 어깨 위 눈을 쓸어내리는 내게 작고 따듯한 손난로를 건넨다.
뜻밖의 호의가 눈처럼 포근하게 감쌌다. 매일 이 길로 산책하는 이름 모르는 행인 덕분에 눈은 그저 풍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펄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눈은 약속을 불러오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첫눈 오던 날 만나자고 손가락 걸던 학창 시절. 지금은 가물가물한 이름들, 저 눈을 보면서 날 생각할까?
눈 오는 날, 우리는 명동성당,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났다. 이제는, 북적이는 장소보다 산책로에서 길벗과 두런두런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약속은 크지 않아도 된다. 같은 자리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향해 열릴 수 있으니까.
눈 내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소복이 쌓이는 눈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덮고, 눈 맞으며 나는 오래된 생각을 꺼내 놓는다. 설원의 발자국은 햇빛과 바람에 곧 지워질 것이다. 내 마음에 자국을 남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2021년 1월 8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