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하루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식구들 이름으로 시작하여 끝났다. 아이들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동안, 충분히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일상의 동선이었지, 나를 위한 동작은 아니었다. 건강은 이미 내 곁을 지나치고 있었는데, 그것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몇 해 전 다리와 발목을 다쳤을 때, 아프지 않은 쪽으로 몸을 기울여 걷던 계절이 있었다. 한쪽에 기대어 버틴 시간은 다른 쪽을 서서히 닳게 만들었다. 오래 앉았다가 일어날 때, 계단을 내려갈 때, 다리는 통증으로 저릿했다. 나는 그 신호를 일상의 잡음쯤으로 여겼다. 통증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고, 참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 착각 속에서 몸은 경고장을 보내고 있었다.
산책은 늘 '시간이 남으면'이라는 조건문 속에 묶였고, 걷기는 '다음 주부터'라는 약속이 되었다. 저녁이 되면 다리는 하루를 통째로 달고 돌아왔다. 발바닥에 남은 피로는 바닥의 먼지처럼 쉽게 쓸리지 않았다. 운동 부족과 늘어난 체중이 일상의 문법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서야 읽기 시작했다. 몸은 이미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내가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날, 절뚝이며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나를 지탱하느라 고단했던 두 다리에게, 한 번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내 다리도 매일 나를 배웅해 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인터넷으로 먹거리를 주문하지 않고, 집 앞 마트까지 오가는 길도 산책이라 부르기로 했다.
바쁜 일상은 늘 설득력이 있었다. 급한 메시지, 끊이지 않는 일정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날을 준비해야 했다. 낮동안 간간히 느끼는 무릎의 찌릿한 통증, 잠들 때마다 통나무처럼 무거운 다리. 나는 그것들을 끌고 가기보다 다시 시작하려 한다. 길 위에서 발걸음이 길어질수록 복잡한 것들은 사라지고, 들숨과 날숨이 다독인다.
지인들에게 양재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먼저 가 닿았다. 물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와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 개울가 징검다리. 향수를 느끼려 찾아가던 그곳에서 물의 흐름과 나무와 하늘의 색을 본다. 함께 걷자는 약속은, "함께 살아가자"는 말처럼 들린다.
건강은 목표가 아니라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앉는 법, 걷는 법, 숨 쉬는 법,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법. 나는 그동안 몸을 도구처럼 사용해 왔다. 이제는 친구로 부르고 싶다. 속도를 줄이고, 신호를 듣고, 무리하지 않는 선택을 연습한다.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라는 문장이 점점 또렷해진다.
산책길에서 아이들 어릴 때가 떠오른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뛰어가던 모습. 그 회복력은 지금 내 몸에도 필요하다. 다만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무작정 달리는 대신, 천천히 걷기, 빠름 대신 꾸준하게. 청춘의 언어로 몸을 몰아붙이던 습관을 내려놓고, 몸 나이 문법으로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
하루의 문장 맨 앞에 나를 적어 보려 한다. 나로서 시작하는 하루, 방향을 바꾸려 한다. 충분한 쉼을 갖고, 천천히 걷는 삶으로. 느린 걸음이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한다. 몸은 시간을 기억한다. 무리한 날들을 접어 두었다가, 어느 날 통증으로 온다. 하루에 몇 줄씩, 내 몸에 문장을 쓰리라. 오늘은 다리에게, 내일은 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