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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의근원 Sep 26. 2023

빨간 답장

김성택 선생님께

 새 학년을 앞두고 있는 아들방 책장 정리를 했다.

버릴 책은 버리고, 새 교과서 자리를 만들고 책장 이곳저곳을 정리했다.

추억 소환하는 어린이집 수첩, 초등학교 작품들을 보며 이럴 때가 있었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중에 아이가 쓴 일기장을 보았다.

담임선생님께서 짧지만 공감의 답장을 읽고 있으니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시골 초등학교로 부임하신 총각 선생님.

등교 첫날 1년 계획을 매일 일기 쓰기와 오래 달리기를 하겠다는 말씀

 여기저기에서 아...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남은 초등학교 마지막 1년 힘들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둘째 날부터 일상보고 형식으로 일기를 쓰고 제출

다시 저녁에 일기를 쓰려고 일기장을 보니 "1년 동안 잘 지내자"라고,

빨간 볼펜으로 쓰신 짧은 첫 답글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일기를 검사용이 아닌 한 명 한 명 소통하는 방법으로 보였다.

나는 조금씩 사춘기가 시작되고 여러 상황과 생각으로 마음이 많이 복잡한 시기였다.

힘들고 속상한 마음을 비밀일기장에 쓰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답글에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냈다.

그날 기분 나의 생각을 일기장에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빨간 볼펜 답장은 늘 정갈한 필체로 내 눈과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 주었다.

한 줄로 시작된 답글은 어느새 4줄 5줄을 넘었다. 매일 일기장을 돌려받으면 나는 답글을 먼저 읽었다.

오늘은 또 선생님께서 어떤 답장을 적어주셨을까 너무 궁금했다.

1학기가 끝날 때쯤엔 빨간 답글이 한 장 가득히 써주신 적도 있다.

일기 주제는 점점 다양해졌고, 분량도 점점 늘어났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았다.

 일기 쓰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기 쓰기 습관을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일 때 가끔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고1 때 갑자기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선생님께 이메일로 편지를 쓰곤 했다.

그렇게 선생님과 소식도 점점 멀어졌고 나도 바쁘게 지냈다.

고향에 갈 일이 있어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은 결혼도 하셨고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선생님께서 누구보다 나의 대학교 입학을 축하해 주셨다.

초등학교 6학년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던 학생이었다며 나의 일기를 기억하고 계셨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생각나는 선생님.

언젠가 스승 찾기로 선생님을 찾아본 적이 있다.

용기가 나지 않아 편지는 쓰지 못했지만 선생님도 아직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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