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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실 Jan 19. 2024

빚진 현재

희미한 상아 3

 그 후 엄마는 내 옆에 더욱 바짝 붙어 걸었다. 두려움, 불안감, 원망과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는 없었다. 어째서그것은 마땅히 우리의 땅이었다. 우리의 땅이 아니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자라나는 푸른 잎들을 먹고 맑은 물을 마셨다. 엄마의 때에도, 엄마의 엄마의 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즉 존재 양식인 것이었다. 다른 어떤 형태의 삶을 감히 생각할 수 있을까.


 "엄마,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엄마는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가 미안해하는 이유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지 못해서인지, 있지만 말해줄 수 없어서인지, 애초에 이렇게 길을 떠나게 돼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것이든 엄마가 미안해할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그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있어요. 우리의 땅을 파괴하고 우리의 몸을 조각내고 그러니까 아빠는…." 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의 까만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담고 있으면 세상 끝에 서 있으면서도 신비로움을 발할 수 있는 걸까. 


 별들의 시간. 밤하늘에 엄마의 눈을 닮은 별들이 하나둘 총총히 떴다. 어둠이 내려앉고 우리도 걸음을 멈춰 자리를 잡았다. 서로에게 기대 몸을 뉘니 세상에 남은 것이 엄마와 나 단둘뿐인 것 같았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지." 줄곧 말이 없던 엄마가 웬일인지 먼저 말을 꺼냈다.

 "네 할머니 말이야. 태어나기도 전이니 너는 물론 기억을 못 할 거야. 어릴 적 엄마도 꽤 말썽꾸러기였는데." 말썽꾸러기 엄마라니.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그맣게 웃음이 비어져 나와버렸다.

 "까마득한 옛날이구나. 엄마도 에텔라 지금 너만 할 때가 정말 있었지. 행복한 시절이었어. 사방에 먹을거리가 늘 풍족했고 걱정거리가 없던 시절……. 신이 나서 풀을 뜯어 먹던 기억이 나. 먹성이 좋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엄마도. 그런 기억들이 이젠 다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감상에 젖은 듯한 엄마가 낯설었다. 우두머리로서 늘 강한 모습만 보였던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풀을 뜯어 먹고 있을 때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 스바비에, 뿌리는 남겨두렴. 뿌리까지 뽑아 먹지는 말거라. 당시에는 혼이 났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솔직히 곰곰이 생각해 보진 못 했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자리를 잇게 되면서 그 가르침을 따르긴 했지만, '뿌리를 남겨둬야 나중에 돌아왔을 때 다시 자라난 풀을 먹을 수 있으니까'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어. 그러니까 초원의 생명력을 완전히 앗아가선 안된다는 의미로 생각했던 거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어쨌든 서로에게 좋은 거니까."

 나는 어쩐지 슬퍼졌다. 엄마는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생각할 수 있는 미래가 없어 아주 먼 과거로 훌쩍 떠나버리려는 걸까.

 "그런데 요즘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라.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아. 그때 엄마는 어쩌면 더 먼 곳을 내다보고 계셨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마?"

 "그래 그저 싱싱한 풀이나 초원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였던 거야.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게 돼. 에텔라, 너에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그때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구나, 엄마였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하게 될 날이."

 그런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엄마의 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 시절의 내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상황도 마찬가지이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에텔라,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어 미안해. 지금 엄마가 너에게 전할 수 있는 가르침은 이뿐인 것 같구나. 현재의 우리는 미래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해할 수 있겠니?"

 아늑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 엄마의 품에 있을 때면 나쁜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기억하렴. 미래에 무얼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는 모두의 미래를 빌려 쓰는 입장일 뿐인 거야. 애초에 나의 것이란 게 없는 거지. 그러니 우리는 모두 그저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야."

 어느새 피로와 허기는 옅어지평안함이 온몸을 나른하게 감싸 안았다. 천천히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길 수 없던 나는 눈을 감은 엄마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이것만은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엄마가 너를 반드시 지킬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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