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자의 고난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형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동생인 아벨은 가축을 길렀다. 형은 농사를 짓기 위해 한 곳에 정착하여 가지의 땅을 일구었고, 동생은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 목초지를 따라 이곳저곳 이동하며 유목 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잠시, 목축과 유목은 약간 다른 개념이다. 이 두 개념 모두 가축들을 기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목축은 정착 생활하면서 거주지 주변에서 가축들을 방목하거나 우리 안에 가두어서 기르는 것이고 유목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절에 따라 혹은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며 가축을 기르는 것이다.
아벨은 목축을 했는지 아니면 유목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시대적인 배경을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도 유목을 했을 것 같다. 아벨의 시대는 아직 노아 홍수 전이었기 때문에 목초지는 아주 아주 많았을 것이고 유목하기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아주 적합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유목 문화는 농경문화와는 다르게 땅의 경계가 없다. 어느 누구도 드넓은 목초지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동서남북 보이는 모든 땅이 나의 땅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축들이 풀을 뜯는 곳이 오늘의 내 땅이 되는 것이고, 내일이면 남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목문화는 울타리나 담이 없으니, 특별한 그들만의 문화와 그들만의 세계도 없는 것이다. 온 세상이 자신들의 것이니, 한밤중 지평선 끝에 빛나는 별들도 볼 수 있다. 울타리나 담이 있는 것도 아니니 늘 무방비한 상태로 사방을 경계하며 이동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날씨를 바꾸거나 목초지가 나타나게 할 수는 없다. 즉 유목민은 자신의 한계를 매일 경험한다.
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농경문화(정주문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신적인 존재는 삶의 처음이요 끝이다. 알파와 오메가이다. 유목민은 가축을 이끌고 인생의 여정을 출발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고, 어디서 머물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각종 맹수들이나 적으로부터 신의 보호를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다. 유목민은 인생의 길고 긴 여정이 끝날 때까지 늘 신과 함께 긴밀한 관계를 유지를 해야만 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환경이다.
아벨은 유목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매일의 삶에서 신을 찾았다. 자신의 신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며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유목민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 두 형제의 제사 중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여지게 되자, 결국 형은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이기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땅을 일군 것처럼 자신의 힘으로 동생을 죽였다.
영적인 거룩한 야성은 유목적 삶에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적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영적인 야성이 죽게 된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시스템 안에서 유목적 삶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에 따른 요청에도 응답하시지만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우리 삶에 관여하시며 동행하길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