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십 년 천권 : 책 속으로 풍덩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책 보다 더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유시민 선생님께서 좋은 책 읽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던 부분이 기억난다. 기억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말씀은 아닐 수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지구에 있는 모든 곳을 여행할 수는 없다. 책도 마찬가지다.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좋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가슴에 담으면 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묘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조건 많이 읽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눈에는 자주 담았으나 마음에 자주 담지는 안 하고 또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있는가. 나쁜 책도 물론 있겠지만 좋은 책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책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고 즐기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또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장르의 책만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 종류의 분야로 시작했다.
음악과 영화 그리고 미술이었다. 클래식, 가요, 록 메탈, 제3세계, 악기, 연주, 화성, 음악가 등 쉽다고 흘려 읽지 않았고 어렵다고 마다하지 않았다. 읽는 동안만큼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영화, 영화음악, 감독, 배우, 장르, 촬영, 독립영화 등 음악보다 더 다양한 분야들이 영화 장르에 포진하고 있었다. 시각장르라 더더욱 책에 자주 등장하는 스틸컷과 삽화는 읽는 재미를 더 듬뿍 안겨주었다.
화가, 작품, 시대별 흐름, 민화, 경매 등 미술과 관련된 책도 몹시 짜릿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화가의 숨은 이야기부터 우리 민화가 보여주는 시대의 모습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단 한 장의 그림에 담긴 그토록 많은 총천연색 이야기는 차분히 책으로 읽을 때 더 감칠맛이 났었다.
그렇게 세 분야로 시작된 독서는 이후 건축과 디자인, 순수예술, 언어, 과학, 철학, 육아로까지 이어졌다. 배운 적도 없고 그전까지는 전혀 관심도 없던 건축분야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재미가 점점 더 많이 늘어났다. 건축물이란 것이 결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물이란 이유로 건축과 인간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건축, 건축가, 그리고 그 시대가 갖고 있는 배경은 차곡차곡 대출 목록에 기록되었다.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야매로 디자인을 전공한 탓도 있지만 간결하게 정리된 지면에서의 디자인은 독립된 작품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어려운 말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한 장 넘기는 것이 다른 주제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순수예술도 제법 재미있었다. 미학이니 예술이론이니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이 파도쳤지만 꿋꿋하게 항해했다.
언어에 대한 책도 순수 예술 못지않았다. 좋은 글, 나쁜 글, 바른 표현, 그릇된 표현, 과거에 있었으나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 등 다양했다. 고도의 전문분야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던 과학도 나름 골라 읽으면 재미가 있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풀어쓴 책이 특히 그랬다. 읽다 보면 몇몇 내용은 숙지해서 아이들에게 나중에 들려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철학도 쉽게 풀어쓴 책이 읽기 편했다. 손꼽을 정도이긴 했지만, 만족도는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컸다.
그중에서도 육아는 아내가 꼭 읽으라고 내게 강력하게 권했던 분야다. 아이들의 성별과 연령에 따라 그렇게 많은 책이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책을 읽은 후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더 잘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육아 책 한 권 읽으면 일주일 정도 나도 모르게 책 속 내용을 실천했었나 싶다. 또한 딱 꼬집어 어떤 분야라고 말하긴 좀 애매하지만, 서점과 출판에 대한 책도 적잖게 읽었다. 동네마다 특색 있는 서점이 하나씩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은 언제나 마음에만 품고 있는 이기적인 욕심에서였다.
논리 따위는 일찌감치 내던진 고집으로 순수 문학은 일절 쳐다보지 않았다. 어렵기도 했고 책 속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되길 꺼렸기 때문이다. 장·단편 소설부터 시집에 수필까지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근처도 가지 않았다. 사실 아주 가끔은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오랫동안 안 읽게 되니 자꾸만 멀리하게 되었다. 지난 10년을 정리하는 마당에 다가올 시간에는 순수 문학도 읽어볼 수 있길 아주 조심스럽게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