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여행

책 십 년 천권 : 책 속으로 풍덩

by 잭 슈렉

여름엔 선풍기 한 대 없었고, 겨울엔 조개탄을 난로에 넣어 난방을 했었다. 나무 바닥 교실과 복도에서는 수시로 날카롭고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귀가 맞지 않은 창틀 사이로는 수시로 바람이 들어오는 학교였다. 책도 낡았고 종류도 다양하지 못했던 시절. 초등학생으로서 마주한 도서관의 모습은 지금의 도서관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이용하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아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뒤늦게 해 본다.


중학교는 솔직히 학교에 도서관이 있는지 까맣게 잊고 지냈다. 3년 내내 공놀이할 시간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같은 건물의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지에 글을 하나 쓰고 싶어서 좋아하는 영화 리뷰를 쓰다가 법률 관련 책을 하나 찾고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방문했었다. 도서관 시설은 초등학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하자 반강제적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을 가지 않으면 도저히 과제를 할 수 없었던 교수의 노림수에 말려든 것이다. 더욱이 정문 바로 옆에 있어야 할 도서관이 학교 가장 구석 맨 끝자리 높은 언덕을 한참 동안 걸어야 나타났다. 사는 동네 골목골목에 있는 작은 도서관과 비교하면 우스꽝스러운 위치 선점이 아닐 수 없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남산 도서관도 몇 번 갔었다. 천 얼마 밖에 하지 않는 가락국수와 카레라이스가 맛있었다. 웅장한 건물이 주는 묘한 쾌감도 좋았다. 대출을 하지는 않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머물렀다. 오래된 신문을 찾아보는 재미부터 도저히 두 장을 넘길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책들도 구경했다. 도서관에 놀러 간 시기였다.


이후 십여 년을 도서관과 담쌓고 지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도 모자랄 20대에 도서관이 웬 말이던가. 자주 찾는 종로였다. 약속장소는 으레 대형 서점 정문이 되었다. 그곳에서 연애도 몇 번 했었다. 넓은 지하의 교보문고, 층마다 다채로움이 넘쳐난 종로서적, 세련된 인테리어에 영풍문고까지 세 곳의 서점은 책을 읽기 위한 공간이라기 보단 신나게 노는 놀이터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을 훌쩍 넘겼고, 아빠가 되고 나서야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금방 빌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집을 나서서 다시 돌아오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었다. 나중에 궁금해서 찾아보니 구립도서관부터 작은 도서관까지 동네에는 도서관이 무척 많았었다. 도서관마다 인테리어도 달랐고, 진행하는 행사도 다채로웠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읽고 싶은 책이 도서관에 있는지 미리 검색도 했다. 메모지에 도서 번호를 적고 집을 나서면 마치 숙제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주 찾는 책장 앞에서 책등의 제목을 순식간에 스캔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꺼내 가볍게 목차를 살펴보고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그림이나 사진이 너무 많아도 별로였지만 너무 적어도 께름칙했다. 음악 책 두 권을 고르면 영화책은 한 권으로 줄였다.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책은 모두 다섯 권.


처음엔 두세 권만 빌렸으나, 언제부턴가 다섯 권을 모두 채우게 됐다. 대출 기간은 2주였지만, 반납 일을 3일 남겨두면 1주일 추가 연장이 가능했다. 아주 가끔 누군가가 내가 빌린 책을 예약하면 기한 연장이 불가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빌린 책을 다른 사람이 예약해 주어서 쫓기듯 읽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짜릿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책들과 도서관 이용자 수를 감안하면 그런 일은 진짜 가뭄에 콩 나듯 일어날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읽을 순서를 정했다. 음악 다음으로 영화 그리고 건축으로 장르별로 나누기도 했고, 왠지 어려울 것 같은 책을 맨 앞에 둬서 매도 먼저 맞는 심정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책장엔 두 번째 순서부터의 책을 꽂아 두고 첫 번째 책엔 책갈피를 맨 앞에 끼우고 출근 가방에 넣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책갈피는 포스트잇을 사용한다. 일반 메모 용도의 포스트잇이 아닌 분류를 나누거나 말 그대로 책갈피로 쓰는 가늘고 긴 반투명의 그것이다.


무지개 색 이상 다채로운 색도 마음에 들었다. 봄날엔 노란색, 여름엔 연두색, 겨울에는 분홍색을 끼워도 좋았다. 페이지 사이에 끼우는 보통의 책갈피보다 내가 읽던 곳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콕 집어주는 느낌이 들어서 더 좋았다. 내가 빌린 책을 누군가 예약하는 일만큼, 아주 가끔 지하철에서 누군가 포스트잇으로 책갈피를 해둔 것을 보면 다가가서 말이라도 붙이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그렇게 한번 사용한 포스트잇은 대략 한 달 정도 쓸 수 있었다. 맨 끝 채색된 부분이 희끗희끗 바라지면 작별할 때가 온 것이다. 아무 맥락 없이 새로운 색의 포스트잇을 방금 빌려온 뜨끈뜨끈한 책 맨 앞 페이지에 붙일 때는 마치 손님 대접을 위해 쿠키를 구워 준비하는 기분마저 든다.


대출한 책을 반납하는 길엔 대부분 새로운 책을 대출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과 되돌아오는 길 모두 가방은 묵직하다. 가끔은 가방 무거운 게 싫어서 얇은 두께의 책을 빌릴 때도 있었다. 두껍다고 무조건 좋은 책은 아니다. 하나 더 억울한 것은 시리즈로 나온 책에 대한 인정이 부족한 것이다.


옛날 옛적 비디오테이프를 빌릴 때, 상영시간이 긴 영화는 테이프가 1부 2부로 나뉘었다. 물론 2개의 비디오를 빌린다고 해서 대여료가 두 배는 아니었다. 그런데 책은 1부 2부로 나뉜 두 권의 책을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낱권으로 쳐준다. 시리즈를 한 권으로 포함하면 한 번에 더 많은 책을 빌릴 수 있지 않은가. 비디오와 달리 대여료가 무료인 점을 감안해서 이건 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쓰고 비 오는 골목을 지나 도서관에 다녀올 때 기분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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