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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Mar 26. 2024

틀려야 제맛. 오탈자의 맛.

오탈자 없는 책은 귀신이 만든 책. 

#1. 중학교 3학년, 끝장나게 공부 잘하던 몇몇 녀석은 수학 문제집에 잘못된 오류문제를 찾아 출판사에 제보하면 공짜로 문화상품권을 받을 수 있다고 자랑하며 다녔다. 나는 감히 시도할 수도 없었던 영역이었고, 그녀석이 정말 그렇게 문화상품권을 받았는지 검증할 수는 없었지만, 묘한 부러움을 아주 잠깐 느꼈다.


#2. 라디오 애청자 모임에서 발바닥 땀나도록 활동하던 시절. 지인을 통해 편집된 책자의 최종 점검을 받으러 그의 회사인 출판사를 찾아갔었다. 낮에는 근무를 하고 밤에는 사무실에서 혼자 우리를 맞이하며 며칠을 몰래 도둑처럼 인쇄본까지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자연스럽게 출판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가끔 오탈자가 없는 책이 나타나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해서 필름을 불에 태우는 의식도 서슴치 않는다고 했다. 인쇄물에 있어서 오탈자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라고, 그래서 10여 페이지에 하나씩은 으레 등장하는게 오탈자라고 나를 격려했다.


#3. 지금까지도 정치적 견해가 나와 전혀 다른 아버지로 인해 우리집은 늘 조선일보를 구독했다. 국민학교 때는 세로 쓰기라 읽기 싫었고, 중학교땐 읽다가 호흡이 길어 포기를 자주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아주 가끔 신문에 있는 오탈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랏? 신문에도 오탈자가 있구나! 맘에 들지 않는 신문을 이겨먹은 기분이 들어 그 순간만큼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놀면서 일하던 20대, 5할 이상을 잡지에 쏟아 부었다. 엉겁결에 창간호부터 합류해서 15권의 잡지를 만들어낸 시기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한편으론 가장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특히 내가 쓴 글이 내 손을 거쳐(형편상 잡지 디자인도 내가 했다) 종이에 인쇄되어 마주하는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술사먹으려고 만들었던 웹사이트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탈자 쯤 수정이 가능한 구조였으나 잡지는 전혀 달랐다. 인쇄가 끝나면 그걸로 끝. 쫑이었다. 교정교열을 아무리 본다 한들 오탈자는 귀신처럼 스믈스믈 나타났고, 아주 가끔 치명적인 오탈자를 마주할 땐 그 누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도 아닌데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 며칠을 우울하게 보냈다.


꼬박 12권, 1년의 무료잡지 시절을 거쳐 유료잡지의 가능성을 자신하며 모든 디자인을 바꿨던 그때. 판형부터 페이지수. 광고페이지와 더불어 기존의 잡지 형태에서 대변화에 걸맞는 편집을 과감하게 시도했다. 물론 동시에 오탈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하루 건너 밤새우는 열정 쯤은 아끼없이 불살랐다. 그렇게 첫 유료잡지가 인쇄되어 사무실에 도착한 바로 그날!


세상에나. 표지에서 오탈자가 발견된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죽을때까지 날 괴롭힐 정도의 엄청난 오탈자라 그날 사무실에서 쭈그려 앉아 밤새 술을 마시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이후 너무 좋은 꼭지에 적당한 제목을 마감까지 찾겠다며 대충 적은 가제가 그대로 인쇄된 적도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 가제가 본문과 제법 어울리는 연결고리가 있어 아무도 모르게 나혼자만 뺨 몇대 때리는 걸로 마무리지었다.


그로부터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잡지를 만들지도 하물며 최근 잡지를 읽지도 않는다. 종이 신문은 가끔 부모님 댁에 가면 쓰임새가 있으니 한무더기 집어 오는 용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자리를 도서관에서 읽기 시작한 책들이 채우고 있다.


도서관을 매주 다닌지 햇수로 11년차. 대출하는 책의 주제가 다소 협소한 편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시간인 만큼 그간 여러 종류의 오탈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인간적인 오탈자부터 도저히 감당하기 벅찬 오탈자까지... 오래전 출판사를 다니던 지인이 해준 말을 그럴때마다 떠올렸다.


"사람이 만든 책이구나..."


#1. 조사 오타 - 지금 읽고 있는 <번역 - 황석희>의 초반부에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영화 제목을 먼저 썼고 수정하면서 해당 영화의 부제를 추가로 넣기로 했나 싶다. 영화제목 마지막 글자는 받침이 없으나 부제의 마지막 글자는 받침이 있었다. 그로인해 이어지는 조사에서 뚜렷한 모순이 등장했다. 한번이면 설마 싶었으나 해당 본문에 두번 연속 그런 걸로 봐선 짐작이 맞다. 은, 는, 이, 가, 을, 를의 오타는 사실 발견하기 쉽지 않다. 글자를 한글자씩 끊어 읽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2. 공백 오타 - 이건 정말 죽자고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좌우정렬 편집에서 띄어쓰기 2칸이 되어 있는 건 해당 글줄이 어떤 단어들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어느 포인트에 아주 잠깐 허전함이 확! 하고 밀려올때가 있다. 그때 들여다보면 바로 그곳에 띄어쓰기가 1칸이 아닌 2칸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3. 규칙없는 오타 - 어떤 단어 뒤에 괄호로 짧게 부연 설명을 더할때다. 해당 단어는 받침이 없는 글자로 끝나고, 부연 설명은 받침이 있는 글자로 끝날때 이어지는 조사는 앞선 단어를 기준으로 연결되는 것이 (개인적으로) 맞다고 본다. 허나, 어느 책에서는 그 규칙이 들쑥날쑥 읽다보면 살짝 짜증이 밀려올때도 있다.


#4. 반복 오타 - 최종 편집에서 일어난 실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짧게는 단어 하나, 내가 본 것 중 가장 긴 것은 해당 페이지의 2줄에 걸쳐 있는 문장이 두 번 연속 반복된 것이다. 마감기한 맞추느라 얼마나 힘을 들였을지 글자만 봐도 느껴지는 부분이다. 토닥토닥.


#5. 생뚱맞은 오타 - 오타 분야에서 정말 치명적인 오타가 아닐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자서전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글줄 사이에 갑자기 ㅋㅋㅋ 또는 ㅈㅈㅈ(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식의 자음이 3~4번 튀어 나오는)이 나오는 식이다. 설마... 싶지만 이미 인쇄된 페이지를 읽고 있으니 맞다. 오타.


#6. 귀여운 오타 - 쉼표가 있어야 할 곳에 마침표가 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 큰 따옴표로 시작했으나 작은 따옴표로 끝날 때. 괄호를 한번 열었는데 두번 닫을 때. 키보드를 탓해야 할 일이다.


#7. 씹히는 오타 - 이건 분명 인쇄 사고일 것이다. 글자 하나에 종성이 위치할 부분에 자음이 두개 인쇄된 것이다. 꼴랑 하나라 파본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오타는 오타다. 인쇄기 나쁘다.


이번에 도서관에서 대출해온 책에는 어떤 오타가 있을까? 하는 맘으로 책을 읽진 않는다. 허나, 오타를 발견하는 순간! 책을 쓴 저자 그리고 인쇄한 관계자들과 함께 키득키득 '그땐 그랬지' 하면서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이 깃든다. 오탈자를 통해 저자와 출판 관계자들과의 우애가 돈독해지길 바란다. 은근슬쩍 모른척 넘어도 갈 것이며, 두고두고 놀려먹기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책을 더 즐거운 독서를 이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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