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키드 시절, 가끔 비디오 가게에서도 정식 유통이 아닌 비공식 유통 비디오(속칭 '삐짜')를 대여해주곤 했었다. <양들의 침묵>이 처음 본 삐짜 비디오였다. 화면은 그런대로 볼만했으나 자막이 빨간색 글씨라 정말이지 보는 내내 너무 힘들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저 빨간색 자막 따위 신경 안쓰고 볼테지만, 영어에 소질 없는 나로선 수시로 일시정지와 뒤로감기를 반복했다.
그때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짧은 단어들이 눈과 귀에 들어왔다. 갸우뚱 거릴 때가 아주 가끔 있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자막을 썼을테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언제부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엔딩크레딧 초반에 "번역 : ㅇㅇㅇ"을 볼 수 있었다. 맞아. 영화도 결국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잘 번역해 줄 사람이 중요하지. 그리 생각했다.
가끔 보는 <방구석 1열>에 게스트로 번역가 황석희가 출연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번역을 했다고 했다. 너무 빠르고 복잡한 영화라 작품 속 번역에 대한 의미는 전혀 신경조차 써본 적 없었기에 해당 회차를 진지하게 그리고 즐겁게 관람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더 궁금한 마음이 생겨 도서관에서 그를 찾았다.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라는 부제에 따라 책은 너무 전문적이지도 않고 '번역가'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직업군에 대한 변방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더욱이 부부가 같은 직업을 가진 그의 에피소드는 흥미롭고 한편으론 부러운 점도 많았다. 특히 신세경이 작품 속 직업 역할을 위해 그의 작업실을 찾아온 에피소드는 몹시 부럽고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 부러웠다!
완벽한 번역도 없고, 오역 없는 번역도 없다는 그의 말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단순히 해석하듯 스크린에 옮기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는 일이다. 우리 고유의 문화에 어울리게 변형하는 것이야 말로 번역가의 숙명일 터. 수시로 자막 읽느라 힘들긴 해도 장면과 맥락과 흐름과 찰떡처럼 맞아 떨어지는 자막이야 말로 영화의 매력을 더 높게 이끌어주는 견인의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역설적으로 <기생충>에 등장하는 '오빠, 짜파구리, 반지하' 등의 단어는 해외에서 또 어떻게 어필되었는가. 수상을 하며 봉감독님이 말한 '1인치의 장벽'은 '다른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너른 마음'을 빗대었다. 유독 자막 읽는걸 불편해하는 그들에게 던지는 일종의 우화로 오랫동안 기억될 멘트라 생각된다.
저자도 본문에서 설명했듯이 책의 제목이 주는 강렬함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어떤 주제를 그럴듯한 문장 혹은 단어로 나열한 흔하디 흔한 제목보다 58,000배는 더 멋져보인다. 2시간 동안 숨가뿌게 상영된 작품이 끝나고 그 여운을 엔딩크레딧으로 이어갈 때. 화면에 등장하는 이 단순하고 어떤 면에선 가장 수고한 사람의 노고가 제목으로 그대로 활용되었다.
두 곡의 음악이 흐르며 엔딩크레딧이 펼쳐진다. 마지막 줄이 스크린에서 사라지면 영화를 제작하며 함께 땀흘린 스태프들에게 바치는 송가가 끝나는 것이다. 관객 내쫓기에 바빠서 엔딩크레딧 시작도 전에 상영관 불을 켜버리는 만행은 이제 그만 삼가해 달라. 끝까지 어둠속으로 우릴 가둬달라. 그것이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이 작품에 보낼 가장 소박한 매너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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