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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Nov 22. 2024

<토지> 왜 드러내 보이지 못하냐고 물으신다면,

부부, 각자의 동굴


<토지> 7, 4편 2장의 소제목은 '부부'입니다.




김주사도 되고, 김선생도 되고 김길상 씨도 되고 면전에서 웃고 굽실거리는 얼굴들이

돌아서면 퇴!하고 침 뱉어가며 하인 놈 푼수에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더라고 거들먹거리는 꼴 눈뽑시어 못 보겠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 말일 터인데,


서희 집안의 종이었던 길상은 상전으로 모시던 서희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하인에서 양반 주인이 된 그를 향해  주변 사람은 "거들먹거리는 꼴 못 본다며" 시샘하고 질투합니다. 비록 면전에서는 웃고, 굽실거리지만, 뒤 돌아서서는 "퇴!"하고 침 뱆어버리는,  겉과 속이 다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으로 그를 무시합니다.




반면 서희는 태생부터 양반이었으니, 이런 멸시의 눈초리와 상관없었을까요?


서희라고 예외일 수 있는가.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 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아무리 강단있고 감정에 매몰찬 서희라 할지라도 남편된 길상을 향한 노골적인 멸시에 똑같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감추어 버립니다.  알고도 몬 본 척해 버립니다. 서로가 똑같이 말입니다.



토지가 품은 문장


마로니에북스, <토지> 7권, p.140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길상과 서희의 부부 관계.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 날갯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조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쏀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 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는데.



이것이 길상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서희와 길상,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합니다. 부부의 감정은 감추려해도 쌍방향적인 무엇이 있으니까요.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박경리 작가는 묻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라고 말합니다.

서로가 사랑했고 살을 저미는 애정으로 결혼한 부부인데,  왜 서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지 못하고, 각자 고독하며 쓸쓸한가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적어도 저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그냥 덮어두고 싶습니다.

박경리 작가가 제게도 묻는다면,


그럴 때도 있지만, 안 그럴 때도 있으니 그런 마음을 굳이 해결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에 상처를 덧입힐까 두려워 아예 꺼내지도 못하는 마음때문에 불행한 감정에 묻히기 보다는,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시간들 덕분에 살아갈 만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몸과 마음을 나누며, 부모 형제보다 더 강하게 엮인 관계라고 하나,

나누고 싶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드러내는 것이 그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그런 그를 보는 내가 더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든다면 말입니다.

전 그저 감추는 쪽을 택합니다.  기꺼이 못 본척 넘어가 주기도 합니다.

단, 우리 부부간에 벽이 더 높아 진다거나, 금이 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있습니다.


숨기는 상처가 너무 치명적인 것이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정도로 멀어져 버리고,  끝내는 찢겨진 종이처럼 극단적인 단절을 가져온다면, 그냥 덮어줄 문제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면, 아무리 부부라 해도 적당히 본척 넘어가는 것도 오~~래, 오~~래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필요한 지혜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남편도 저도 각자의 동굴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동굴이 서로를 향한 거부와 단절의 장소가 아니라,  쉽과 휴식의 장소임을 알고 있다면,

저는 그것을 인정하는 편을 택합니다.




부부간에 느끼는 고독과 쓸쓸함은 박경리 작가가 말한 대로 역설이며 이율배반적인 것임은 맞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는 것"으로 이 역설과 이율배반은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부부에겐 "각자 또 같이"의 가치 또한 못지않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각자" 또 "같이"....

떄로는 드러내고 어루만지지만,   또 때로는 슬쩍 본 척 만 척 거리두기....

그렇게 오래 오래 함께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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