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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단 Nov 22. 2023

애(哀), 하나 - 입양, 파양, 동성애

길수(가명) 이야기

  미처 다 피지 못한 아이들. 청소년이라 불리는 아이들을 만나 부대끼고 살아 온 시간이 어느새 15년이 넘었다. 푸르고 작아 더 자라날 일들만 남았을 법한 이 아이들과 지내며 만난 희애락이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만난 아이들은 기쁨의 순간은 찰나였고 즐거움도 까마득한 경우가 허다했다. 도리어 분노와 슬픔이 섞여 절망과 한계를 경험하고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렇기에 제목도 희(기쁨)와 락(즐거움)은 양 끄트머리에 겨우작고 흐리게 자리하고 그 안에 (분노)(슬픔) 도드라지게 담아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내가 만난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과 어떠한 형태로든 맞닿아 아슬아슬한 삶의 줄을 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직업인 이들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글에도 적히지 못한 ‘희망(希望)’을 기대한다. 깨진 독이지만 그래도 물을 부어 넣으며 독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부질없음일지라도.      


(), 하나.

  고작 열 몇 해를 살아낸 이 친구들은 마흔하고도 몇 해를 더 보낸 나보다 갑절은 족히 넘는 사연들에 휩쓸려 길러졌다. 이 친구들을 기른 건 어른도 아니고 사회도 아닌 것을 보면 사연 속의 사건과 사고들인가 싶다. 슬프다. 사연의 대부분은 슬프다. 길수(가명)와 호선(가명)이의 사연이 그랬고 그렇다. 두 친구의 공통점은 버려진 사연을 상처로 품고 산다는 것이었다.     


  가출청소년 보호기관에서 길수를 처음 만났다. 길수는 스물한 살이었다. 청소년기본법에서는 청소년을 9~24세까지로 본다. 그렇기에 가출청소년 보호기관 입소가 가능했다. 삶의 무게가 어찌나 무거웠던지 길수는 채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야트막한 키를 지닌 소년이었다. 그래도 야무진 입매와 집중하는 눈매를 보니 단단함을 지닌 아이라 여겨졌다. 길수는 양아버지와 소송 중이라고 했다.


사연은 그랬다. 아들이 없고 딸만 있던 어느 댁에서 입양기관을 찾아 부모가 절대 찾지 않을 아이를 원했다. 입양처에 맡겨진 이유는 모르겠으나 길수가 바로 그 부모가 절대 찾지 않을 듯 한 아이였던가 보다. 길수는 그렇게 부모를 얻었다. 여느 집이 다 그렇듯 자식인 길수는 부모의 마음처럼 자라주지 않았고, 길수 역시 부모가 자신을 몰라준다 여기며 자랐다. 갈등은 주로 양아버지와의 열띤 대립으로 이어졌다. ‘길수가 친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라는 편견 어린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길수의 양아버지는 오래 참고 견뎌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더는 못 견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수는 꽤 논리적인 친구였다. 논리적인 친구가 공격성을 지니면 필연적으로 적대적인 반응과 사람들을 벗으로 삼아야 하는데 하필 그 상대가 버려진 자신을 거두고 길러준 양아버지였다. 상호 간에 느꼈을 배신감과 적대감을 나는 모른다. 그 감정과 상처만 목격했을 뿐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길수가 고등학생일 때 일어났다. 길수에게도 친구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있다. 친구라고 여기는 이가 있고 스스로는 모르지만 나를 친구라고 여겨주는 친구도 있다. 또 나는 친구라 여겼지만 친구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친구도 우리에겐 있다. 길수는 그 친구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실은 내가 동성애자라고. 길수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보다도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더 긴장되는 현실이라고 고백했었다. 입양아에 동성애자인 다중사회적 소수자였던 길수였다. 얼마 후 고등학생 길수는 교실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고 했다. 교실의 방송 스피커에서 울리는 친구들의 장난스런 외침.


“박길수 게이다~! 박길수가 지가 게이라고 깠다! 박길수 조심해라. 크크크!”


길수는 교장실로 찾아가 악을 쓰며 항의했고, 소란은 꽤 크게 다뤄지게 되어 버렸다. 가족들도 알게 되었고, 강제로 까발려진 성 정체성 때문에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렇게 길수는 사람이 아닌 학교에게도 버림을 받는 경험을 적립했다. 스스로 자퇴를 하였으니 사연이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길수가 학교를 버린 모양새다. 그 또한 상처다.


길수의 성 정체성은 양아버지의 결심에 기름을 부었다. 파양을 강력히 원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양어머니는 길수를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길수의 양아버지는 길수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길수는 성인이 되었고 양아버지는 파양소송을 제기했다. 파양에 대해 길수는 덤덤했다. 친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유전자 채취를 위해 양아버지가 의뢰해 가출청소년 보호기관으로 찾아온 해당 검사기관 사람에게도 길수는 순순히 협조했다. 그렇게 파양이 되었다. 또 버려졌다. 길수는 울지 않았다. 대신 길수를 찾아온 양어머니가 길수의 몫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돌아갔다.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은 제법 철학적인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길수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철학은 어쩌면 생의 한계, 생존의 위협에 부딪힌 이들 앞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배운 적도 없는 말장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길수는 자신의 태생을 알고자 했다. 길수가 그러한 결심을 내게 이야기하던 날을 기억한다. 말렸다. 길수가 또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었다. 길수는 완고하지는 않았으나 부드럽고 단호했다. 결심을 확인한 순간 나는 절차에 대해 알아보고 안내했다. 성인이 된 길수가 자신의 출생과 입양의 과정에 대해 자료를 요청하고 수신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이었다. 그렇게 길수는 자신의 태생을 찾았다. 길수가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서며 했던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다.     


“선생님, 저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요. 저는 어디 가서 누구라고 하지도 못하겠어요.”    

 

길수가 건네준 봉투 안의 서류에는 길수의 사연이 그 시절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길수는 우리 사회, 아니 현대 인간사의 규범으로는 생겨서는 아니 되는 아이였다. 길수는 어떤 한 여인과 그 여인의 형부 사이의 아이였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그 둘은 처음엔 그저 사이좋은 형부와 처제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다 어찌하여 둘만의 사연이 생겼을 것이고, 그 사연에는 길수도 포함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감추고 숨기다 결국에는 출산을 하였고 그 출산은 누구에게도 정의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사건이기에, 길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생을 시작했다. 그렇게 길수는 자신이 버려질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버려졌다.

길수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렇게 버려지고 버려지는 삶을 마치 생의 미션처럼 시기마다 마주해야 했을까.     

 간혹 편지가 한 통씩 사무실로 전해왔었다. 곳곳의 시위 현장에 길수는 함께 하고 있었다. 길수의 정의감일까? 삶이 부여한 적대감일까? 길수의 비범함은 길수의 잘못이 아니나 그 비범함에 따르는 대가는 길수의 몫이었다. 길수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일까? 길수가 그렇게 태어나지지 않았으면 길수도 평범이라는 무료함을 벗 삼아 소소히 살아갔을까? 의미 없는 질문이다.      

 여느 아이들처럼 한동안 연락이 되다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긴 길수이다. 이 또한 길수의 삶이려나. 이리 보니 나도 무책임의 몫에 한 귀퉁이인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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