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될 만큼 큰 사고였지만, 운 좋게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다행히 뼈도 부러진 곳이 없다. 그렇지만 찌그러지고 찢어진 자동차만큼이나 심리적 트라우마는 크게 남았다. 그래서 교통사고가 난 지 4주차에도 핸들을 쥘 엄두가 나지 않았다.
1주차에는 눈만 감으면 사고의 기억이 자동재생됐다. 2주차에는 TV에서 우연히 교통사고 장면을 보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통쾌하게 느낄 액션장면인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공포스러운 감정도 들었다. 이윽고 3주차, 자동차를 타는 게 아직 여전히 무섭고 다시는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교통사고 환자가 다시 운전대를 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운전 경력 대비 많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대부분 과실 0:100 사고였다. 그 사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운전을 했었던 기억을 떠올려보며, 지금의 내가 다시 운전을 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떠올려보았다. 우선 운전을 다시 하려면, 아래의 조건들이 있어야 한다.
1. 육체적 회복 기간 : 치료를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때
골절이 아니라면, 물론 정도는 다르겠지만 2주~1개월이면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2~3개월 후에는 과격한 운동도 할 수 있다고. 통원치료를 받는 경우 장거리 운전만 아니라면 큰 무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 나을 때까지 누워있는 것이 가장 좋다)
2. 심리적 회복 기간 : 비슷한 상황이 와도 잘 다뤄낼 수 있는가?
운전은 판단능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다. 판단능력과 순발력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해결하고 운전하는 것이 좋다. 걱정되는 상황을 떠올려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점진적으로 시간과 거리를 넓혀가며 운전을 하면서 운전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을 늘려가는 것이 필요하다.
3. 예외 : 운전을 해야 하는 명분이나 이유가 강력할 때
1,2번이 충족되지 않았어도 그것을 뛰어넘을 명분과 이유가 있으면 운전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용기, 간절함, 생계, 도전 등이 될 수 있다.
출퇴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바로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로 운전을 해야 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역대급으로 큰 사고다 보니 도저히 용기가 생기지 않았았다. 폐차가 되었으니 자동차가 없는 상황도 한몫했다. 그래서 '운전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제 운전을 영영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통원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가던 날, 다시 운전할 나를 꿈꾸게 되었다. 병원 앞에 주차되어 있는 미니쿠퍼 한 대에 마음을 빼앗긴 일이다. 작고 귀엽고 예쁜 게 쏙 마음에 든다. 꼭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첫 애마와 헤어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럴까. 그렇게 울고불고할 때가 언제인지 모르게 눈이 홱하고 돌아갔다.
이건 마치 남자친구랑 헤어진 뒤 결별의 아픔으로 백지영처럼 '이제 다신 사랑 안 해' 노래를 부르다가, 이별의 아픔이 가시면 또 누군가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다시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는 뻔하디 뻔한 사랑얘기 같다. 나는 이렇게 실없는 생각으로라도 잠시 가벼워지고 싶다. 어떤 이유로든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때를 통과해 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