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운이 좋아서 살아 돌아왔다
오늘도 운이 좋아서 살아 돌아왔다
참 무탈하기 힘든 요즘이다. 마약이며 음주운전이며,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는 장난질이 매일 뉴스에 오르내린다. 퇴근길에 이런 말을 되뇌며 집에 왔다.
'오늘도 운이 좋았네. 살아서 돌아오다니.'
운전대를 잡은 지는 3년 6개월, 마약과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운전미숙, 그리고 졸음운전. 살아있음은 온전히 운이다.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하면 꼭 사고가 나고, 운전을 못한다고 생각하면 도로에 나서기가 두렵다. 그래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며 초보운전이란 딱지를 안전띠처럼 맨다. 그리고 '오늘도 살았네, 오늘도 살았네' 라는 말들을 읊조린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교통사고 없는 하루는 두 가지가 있어야 성립된다. 말짱한 정신으로 방어운전하는 나,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안전히 돌아가겠다는 타인. 둘 중 어느 한쪽만 부족해도 평화는 깨지는 법. 매일의 평화는 내게 팽팽한 기타 줄 같았다. 그 줄이 언젠가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매일 시동을 걸었다.
운전을 한다는 건 어쩌면 high risk, high return이 아닐까. 내 목숨을 담보로 걸고 시간과 편안함을 사는 일 같다. 무력감과 긴장감을 연료삼은 내 차는, 내 두발보다는 많이 빠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교통사고가 났다
'쾅'
생애 가장 큰 교통사고가 났다.
솔직히 '쾅'이 아니었다. 글로서는 담아질 수 없는 굉음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 이런 식으로 펼쳐질 줄이야. 생전 느껴보지 못한 충격이 날 강타했다. 몇 초 후 정신이 차려지니 내 발이 액셀을 누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인지와 의지, 그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었다.
차가 드르릉거렸다. 다리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감각도 눈치도 없는 내 오른발이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차가 부서진 덕인지 아니면 상대 쪽 자동차가 무거워서인지, 다행히 차가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겨우 P로 돌리고 정신을 차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똑똑. 상대 쪽 차주가 내게로 와서 창문을 열어보라고 했다. 나도 그에게 가고 싶었다. 그런데 다리는 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 너무 세게 부딪혀서인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손가락으로 보험사를 부르는 것뿐.
보험사 직원을 기다리며 차 안에서 속으로 되뇌었다.
'죽은 사람 없게 해 주세요.'
'상대방이 크게 안 다치게 해 주세요.'
'제가 운전 잘못한 거면 용서해 주세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교통사고를 낼 마음이 없었다.
마약도, 음주운전도, 졸음운전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교통사고 그 순간 자체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전적으로 나의 잘못인지, 그의 잘못인지, 우리의 잘못이 얼마나 섞였는지. 순간적으로 어느 쪽의 균형이 깨졌는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교통사고를 낼 마음이 없었다. 그쪽도 마찬가지였겠지.
나는 상대 쪽에서 차가 오는 줄 몰랐다. 그래서 그 차를 박았다. 과실 0%로 사고가 난 게 아닌 만큼, 나의 부주의도 섞여 있음을 고백한다. 사고장면의 충격은 영상처럼 계속 재생되는데 왜 사고를 낸 건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서워서 들여볼 자신이 없었다. 놀란 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짐은 나를 위해 대신 싸워줄 보험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블랙박스와 CCTV가 다 남아있으니까.
책상 밑에 숨어서 울고 싶었다.
보험사 담당자는 필요하면 응급실에 가라고 했다. 다행히 골절상은 없는 것 같다. 절뚝거렸지만 걸을 수 있었다. 요란하게 응급차를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울고 싶었다.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사람마다 주로 사용하는 사고회로가 있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보다 내부로 돌리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 습관처럼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온통 내 잘못인 것 같았다. 그냥 내 탓을 하고 싶었다. 상대방이 다쳤을 것도 괴롭고, 왜 이렇게 사고가 난 건지 생각을 해봐도 화살이 나에게 던져질 것 같아 들여다보지도 못하겠고.
사고는 패닉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혼자 동굴 속에 처박혀있고 싶었다. 가끔 감당하기 힘든 심리적 내상이 생기면, 책상 밑에 들어가 우는 게 일종의 피난처였다. 그래서 그날도, 책상 밑에 숨어서 울고 싶었다. 같이 병원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도 무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어이 자취방으로 갔다. 그런데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너는 네 편이 되어줘야 하는 거야
'그래도 응급실에 가야 해.
사고가 어떻게 났던지 간에
지금 너는 네 편이 되어줘야 하는 거야.
네 몸만 생각해. 네 기도는 내가 할게.
너는 너를 돌봐'
내 몸만 생각하라는 친구의 말이 사고의 굉음처럼 울렸다. 친구의 말이 맞다. 동굴 속에 들어가 울고 싶은 마음과 달리, 내 몸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했다. 이 사고에 '왜'를 붙이고 눈물을 흘려봐도 이 밤에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사고는 났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지금 내가 어떤지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를 돌봐야 하는 건 나 자신이 맞다.
사고가 어떻게 났든, 나는 내 편이 되어줘야 한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쥐어뜯어도 바뀌는 건 없다.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내가 지금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몸을 돌보는 것뿐이다. 그래서 짐을 싸고, 응급실로 향했다.
교통사고가 나도
나는 운이 좋게 오늘도 살았으니까,
오늘도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살아서 돌아온 나를 돌봐야 한다.
상대쪽 차주도 나도, 우리는 운이 좋게 얻은 생을 살아가기 위해 이미 벌어진 사고는 뒤로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치료해야 한다. 사고가 난 그 밤에 할 수 있는 전부이자, 그 밤이 아닌 낮이어도 해야 하는 전부는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밤부터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아픈 바늘을 견디는 힘
'책상 밑에 들어가 마음껏 울 자유'와 치료를 맞바꿨다. 흐물 해진 마음을 정렬하고 바늘을 꽂는다. 혈관이 보이지 않아 간호사는 한참이나 길을 헤맸다. 결국 긴 링거 바늘이 손등을 지난다. 주먹도 쥐고 이도 악물었다.
그날은 손등이 아닌 마음에도 여러 개의 바늘이 아프기 꽂혔다가 나갔다. 그래도 그 밤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부터 내 편이 되겠다는 것,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후에 남을 교통사고 치료와 보험사와의 이야기를 견디는 시작점이 되어주었다.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줄 것
다음화는
교통사고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둘
상실감에 대해 써내려 봅니다.
다음화 : 사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