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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입시 레슨과 행복한 학교 생활

Chapter Ⅱ 

   부모님과 같이 학원에 갔다 온 그다음 날부터 정식으로 작곡 입시 레슨을 받기 위해 학교 정규 교과 시간이 끝나면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바로 학원으로 갔다. 학원으로 가는 첫날 뭔가 모를 설렘과 긴장감이 깃들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 학교에서 학원까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래도 학교에서 학원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작곡 노트와 피아노 책은 다른 책 보다 크기가 커서 책가방에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손으로 들고 가야 했지만, 당시 어렸던 나는 작곡 노트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책을 들고 걷는 게 왠지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서 팔이 아픈 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책과 작곡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뿌듯했던 것은 잠깐의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고, 입시 레슨을 받을수록 피아노를 치면서 내 몸의 불편함이 스스로 느껴져서 힘들었다. 이 힘듦은 초심과 다르게 싫음으로 변질되어 갔다. 분명 내가 너무 하고 싶어서 부모님께 장시간 설득 드린 끝에 허락받아서 잘해보겠다고 말씀드리며 다짐했는데, 이렇게 금방 피아노에서 흥미를 잃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작곡은 자신감이 있었고, 곡을 쓸수록 레슨 선생님과 같이 레슨을 받는 친구들에게 칭찬을 듣게 되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는 힘들었는데, 학원에서는 같이 레슨 받는 고3 언니들과 같은 학년 친구들, 그리고 고1 이하의 동생들과는 다들 좋은 관계로 지내면서 자연스레 학교보다 학원이 더 좋아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학교에서 혼자 있어도 입시 레슨을 받기 전과 후의 심리 상태는 극명하게 달랐다. 비록 피아노 치는 게 힘들고 불편해서 피아노 레슨 받으러 가는 날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학원에서 친구들과 언니들 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피아노 레슨에 대한 부담감을 조금은 떨쳐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와 더불어 작곡을 함에 있어서도 나의 선천적인 불편함이 발목을 잡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손글씨를 쓰는 게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고 힘들었던 나에겐 작곡을 할 때 손으로 직접 악보를 그려나가는 게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입시 시험이나 콩쿠르에서는 작곡 시간을 3시간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3시간 내에 작곡을 해서 오선지에 깔끔하게 악보를 그린 걸 제출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시간 내에 작곡한 걸 예쁘게 악보로 그려서 제출할 수 있을까라는 또 다른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입시를 준비하는 다른 학생들보다는 악보 그린 게 덜 예뻐 보였지만 그래도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악보를 그렸다.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고3이 시작되는 학년도를 며칠 앞둔 날이 왔다. 2월 말부터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할 때 다른 학년과는 다르게 고3이 되는 학년에는 임시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의 불편함을 담임선생님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를 며칠 동안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마음을 다스리고 오늘은 꼭 말씀드리자 라는 각오를 하고 쉬는 시간에 떨리는 마음으로 교무실 앞을 향해 갔다. 교무실 문 앞에서 계속 서성이다가 수업 종이 울려서 다시 교실로 가기를 몇 번...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계시는 선생님이 어떤 선생님을 찾아왔냐 물으시길래 나는 김준영 선생님을 찾아왔다고 말씀드리자, 김준영 선생님은 내 말을 들으셨는지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나에게 보이셨다. 김준영 선생님 앞으로 갔는데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선생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야기를 해 나갔다.

      

  나: 선생님, 저 2반 모진영인데 선생님이 지금 임시 담임선생님이시잖아요. 그럼 다음 주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어도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신 거예요?  

  선생님: 응 맞아.

  나: 선생님, 이 말은 제가 꼭 선생님한테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는데, 사실 제가 몸이 좀 불편해요. 왼쪽이 불편한데 3학년은 체육 수업이 없어서 크게 힘든 건 없을 것 같지만, 담임선생님이 아셔야 될 것 같아서 먼저 말씀드려요... (여전히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선생님: 진영아, 네가 먼저 선생님한테 직접 와서 말해 줘서 너무 고맙다.

  나: (응? 이게 고맙다고? 왜? 여태까지 내가 불편한 거 알게 되면 다 싫어했는데... 선생님은 왜 나한테 고맙다고 말씀하시지? 내가 불편한 걸 말했을 때 고맙다고 말 한 사람은 한 번도 없었는데? 순간 복잡 미묘한 감정이 깃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선생님께 인사드렸다.)

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교무실에서 나갈 때까지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고맙다는 그 한마디가 내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그날 집에 갈 때까지 고맙다는 세 음절의 단어가 내 귓속을 가득 채웠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뭔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불편함을 먼저 말했을 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구나... 더 이상 이 말을 했을 때 불편함으로 인해 싫어하거나 때리는 사람은 없겠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고3 같은 반이 된 아이들에게 내가 말을 먼저 걸어볼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그리고 곧바로 도전했다. 그러자 새롭게 알게 된 고3 반 아이들은 나를 허물없이 대해 주었고, 드디어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만 2년 만에 재미있는 학급 생활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고3이 되어서도 고2 때처럼 정규수업만 참여하고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은 참여하지 않고 바로 입시 레슨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고3담임선생님이셨던 김준영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에서 나를 포함하여 입시 레슨을 받으러 가는 학생들 3명에게 항상 정규 수업 끝나고 레슨 받으러 가기 전에 교무실에 들러서 선생님께 인사하고 가라고 하셨다. 처음엔 매일 교무실에 들러서 선생님께 인사하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계속하다 보니 선생님이랑 더 친해지는 것 같고,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학급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생기게 되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고3 때가 학창 시절 중 제일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교 입시 시험에 앞서 경험상 나간 각 음악대학이 주최하는 전국 초중고등학생 음악 콩쿠르에서 레슨 선생님과 입시를 같이 준비하는 친구들의 기대에 비해 나의 성적은 저조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는데, 콩쿠르에 나갈 때마다 나는 상을 받지 못했고 다른 친구들이 받은 상만 축하해 줘야 되는 현실이 어린 마음에 씁쓸하기도 했다. 그래도 입시 시험만 잘 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준비해 왔는데, 대학교 수시 시험에서 지원한 두 학교가 떨어졌고, 정시 시험에서 지원한 두 학교마저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콩쿠르와 대학교 입시에서 연이어 낙방한 나는 한동안 방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던 나를 붙잡아주신 분이 계셨다. 고3 담임선생님이셨던 김준영 선생님이셨다. 나를 방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위로와 정신적 지지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다른 대학교 추가모집에 지원했는데, 사실 그 대학교는 참 가기 싫었다. 하지만, 입시 레슨 선생님과 김준영 선생님, 그리고 부모님 모두 재수보다 추가 모집하는 학교로 가기를 원하셔서 나는 어른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입시를 또다시 준비할 용기도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추가모집으로 지원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로 입학하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수시 시험에서 이 학교를 지원할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콩쿠르와 대학교 입시로 인해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실패를 경험하게 된 셈이었다. 지금 와서는 어릴 때 실패의 경험이 다른 것들을 준비할 때 발판이 되어서 헛된 경험은 아니었다고 생각 들지만, 19살 그때는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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