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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랑쓰 Nov 10. 2023

06. 일본 술자리에서의 처절했던 나의 실전 일본어

06. 도쿄신입사원

2014년 10월에 도쿄로 넘어갔고 6개월 간의 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배속된 부서는 우리 회사의 모회사의 IT 시스템을 담당하는 사업부였다. 모회사는 철강 대기업이었고 사실 최신 IT기술을 잘 따라가야만 하는 부서는 아니었다. 대체로 철강 재료들과 복잡한 제철 프로세스들을 IT기술로 꼼꼼하게 잘 관리를 할 수 있어야 했고, 그래서 주로 '자동화', '데이터베이스', 'ERP' 같은게 주요한 키워드였다. 나는 그동안 웹개발이나 새로운 기술들에 대한 흥미가 많아서 사실 이러한 기술들에는 큰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회 초년생으로서 SI업계에서 차근차근 기본기부터 쌓는다는 생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일을 배우려고 했다.

사업부 내에서 배속된 부서는 주로 철강 자재에 대한 DB 데이터들을 관리 (정확히는 Master 테이블) 하는 일을 했는데 나 포함해서 8명 정도가 있었다. 물론 나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다행히 모두들 정말 친절하고 나에게 국적 편견없이 대해주시는 분들이었다. 아무래도 언어장벽이 조금은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다들 세심껏 친절하게 대해주신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인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루는 과장님이 새로운 한국인 인턴도 왔으니 환영회를 하자고 했다. (실제로 회사에 과장이라는 직급은 없었다. 일본은 보통 '부장' 직급부터 존재하는 경우가 많고 부장 직급은 우리나라로 비교하자면 거의 임원급이다. 그 아래는 그냥 ~상 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더 직급이 세부적이고 딱딱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전혀 그 반대라서 약간 머리를 띵 맞은 듯 했다) 다들 찬성했고 그렇게 회사 근처의 작은 이자카야에서 환영회가 열렸다. 

한국에서 일본어 공부를 어느정도 하고 자신감도 붙어있었고, 인턴 생활을 하면서도 일본어로 일을 하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메일을 쓰는 방식은 단순히 어떻게 비지니스 메일을 써야할 지 몰라서 배우는 과정이었지 생각보다 일본어로 일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본어 체질인가? 아님 설마 언어천재...?' 라는 망상까지 할 정도로 일상생활이나 인턴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 환영회를 기점으로 나의 일본어 실력에 대한 생각은 처절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정말 과장하나 없이 말하자면 나한테 일부러 천천히 질문해주는 문장들이 아닌 대화들은 90% 이상 무슨 소리인지를 몰랐다. 항상 일본인 선배들이 나에게 회사에서 해주는 말은 이랬다.


"혹시나 못알아 듣는 말이 있으면 바로 얘기해 주세요. 일본어를 모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아는 척 하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렇게 잘 되더니, 술자리에 오니, 내가 거의 대부분의 말들을 못알아듣는데 그 때마다 무슨 말인지 다시 쉽게 말해달라고 하는 건 분위기를 깨는 행동 같았다. 특히 일본인 선배들끼리 하는 이야기는 정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고, 뭔가 선배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는 하는데 나만 안 웃기는 뭐해서, 뭔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따라서 웃고 그랬다. 


최악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지금까지 내가 공부했던 일본어들은 뭐였지... 아니 분명히 일할 때는 다 내가 하는 말도 알아들으시고, 또 나도 선배들이 하는 말들이 뭔말인지 알았잖아. 근데 여긴 뭐야... 다들 일본어 쓰고 있는 건 맞아? 아닌가 다들 사투리로 대화하고 있는건가?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내가 느꼈던 최초의 일본어 네이티브 술자리는 정말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대화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통 외국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현지에 나가서 가장 어려워 하고, 또 진정한 초고난이도의 전장은 '술자리에서 쓰는 외국어' 라고 하지 않은가? 게임에서 레벨10정도 되는 피라미 캐릭터로 레벨99 던전에 들어간 격이었다.


땀 삐질삐질 흘리며 선배들 따라서 눈치껏 분위기를 맞추다보니, 어느덧 술자리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었다. 하지만 거짓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선배들 따라서 눈치껏 웃고 알아듣는 척 끄덕끄덕 하는 것에 대해 슬슬 선배들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쿠니모토 상' 이라는 항상 내 맞은편 자리에서 웃으면서 인사해주고 모르는 것 있으면 친절하게 알려주시던 왕친절 선배가 내게 살짝 묻는다. 내가 따라서 웃고 있으니,


"박 상. 방금 무슨 말인지 정말 이해했어요?"


거기서 또 '아니요' 라고 말했다가는, 지금까지 아는척하며 웃고 떠들던 내가 바보가 되지 않는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끄덕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럼요...!"


하지만 쿠니모토 상은 알았나 보다. 약간 고개가 5도정도 기울어지면서 '아닌 것 같은데...' 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친절한 쿠니모토 상은 나를 또 배려해준다.


"와... 정말 박 상은 일본어를 잘하네요! 원래 잘하는 건 알았지만 정말 생각보다 너무 잘하는 군요. 이런 말까지 이해하다니요. 앞으로 더 기대가 되네요!"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내 마음은 처절했다. 내가 지금까지 쓰고 있었던 일본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이런 실력으로 일본에서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겠다고 자만했구나. 무엇보다 더 비참했던 건 그냥 왜 난 솔직하지 못했을까 였다. 사실 내 자존심만 아니었다면 그냥 솔직하게 어떤 말씀들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된다 하고 그래도 노력해 보겠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분위기도 좋았고 그분들도 더 잘 알려주셨을 거고, 내 마음도 편했고 오히려 일본어 공부에도 더 도움이 되었을텐데... 얄량한 자존심에 선배들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거짓된 하루를 보냈던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했다.


환영회에서의 첫단추를 잘못낀 댓가는 그 뒤로 더 혹독하게 치뤄야 했다. 

부서에서 술을 좋아하는 선배들이 많았던 지라 유독 술자리가 많았던 나는 그 뒤로도 계속 '일본어를 알아듣는 척' 을 해야 했다. 술자리도 많이 가다보면 술자리 일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겠지 라는 마인드로 더 공격적으로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것 같다. 거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하지만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점차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도 그만큼 늘어났고, 결국에는 일본생활 3년정도가 지나서야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무리없이 이해하고 나도 재밌게 즐길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많은 길을 돌아서 일본어를 배운 것 같다. 그냥 처음부터 모르는 단어나 문장들이 들리면 그때마다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많았는데. 회사 사람들이 아닌 다른 일본인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인턴 환영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역시나 난 솔직하지 못했었다.


역시 사람이 무언가를 배울 때는 항상 오픈된 마인드로 겸손한 자세로 배워야 한다. 그날 인턴 환영회처럼 사실은 모든 선배들도 알았을 거다. 분명 일본인들만 이해할만한 단어들을 썼을 텐데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우리가 술자리에서 '손절', '노답'과 같은 은어들을 이제 막 건너온 교과서로만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 유학생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다들 분명 눈치챘을 거다. 그런데도 이 순진한 한국인 인턴은 알아듣는 척 끄덕이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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