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사모님, 우리 엄마
엄마는 나에게 선배 목회자사모이기도 하다.
결혼허락을 받으려고 남편이 찾아온 날, 엄마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그 상황이 좀 난감했는지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그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나와보세요! 제 절 받으셔야지요!”
아버지와 남편이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엄마가 있던 안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엄마의 그때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벽에 걸려있던 긴 거울 앞에 앉아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엄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네가 가장 잘 알면서 왜 너까지 이러니!”
그때는 엄마가 살아온 지난한 목회자 사모의 삶을 미처 다 알지 못했기에 엄마의 말이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내 기억 속 엄마의 모습은 친구들의 엄마와 달랐다. 남편한테도 할 말 다 하면서 살았고 가끔 말다툼을 했을 때도 언제나 먼저 말을 걸고 화해를 청한건 아버지였다. 그 시대 친구 엄마들처럼 자식들이라면 벌벌 떨고, 희생하던 엄마가 아니었다.
가끔 마음이 울적하고 엄마가 생각날 때면 엄마와 우리 삼 남매가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본다. 엄마는 머리모양도, 옷차림새도 한껏 멋을 부린 티가 났다.
며칠 전에도 그 사진을 쳐다보다가 동생한테 전화를 했다. “네가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말이야,
우리 삼 남매와 엄마가 찍은 사진, 정말 봐도 봐도 웃음이 나지 않니? 무슨 엄마가 자식들 옷은 후줄근하게 입히고, 자기만 온갖 멋을 부리고 찍었다니? 엄마 머리모양도 좀 봐봐, 미용실에 가서 하고 온 머리잖아!
옷도 결혼식 갈 때 입는 옷차림이고 구두 굽도 엄청 높네.
동생도 처음엔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야기 끝에는 “그래도 나는 엄마가 그렇게라도 하면서 온갖 사모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해. 날마다 그랬던 것도 아니고.”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첫마디 말은 한결같았다.”사모님이 해주시던 밥을 자주 먹었다.”
요즘엔 교회마다 주일예배 후에 교회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다. 주방시설과 식당도 잘 갖춰져 있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때는 그렇지 않았다.
먼 곳에서 교회를 나오시던 할머니교우들은 예배가 끝나면 사택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점심을 드셨다. 당신이 드실 밥을 도시락에 싸 오시는 분도 계셨지만 대부분 엄마가 준비했다. 점심을 드신 후에 몇 분은 한숨 주무시기도 했다. 신학생들은 방학 때마다 소속 교회에서 목회실습을 했는데 그때도 엄마가 차려준 밥을 자주 먹었다고 말씀하시는 목회자 분들이 계시다. 엄마 돌아가신 지 30여 년이 지난 요즘도.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젠 엄마에서 나로 바뀌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