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뛰어놀 '때'
학교가 끝날 무렵 놀이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금세 활기가 돋아난다. 그러나 그 풍경도 잠시일 뿐 학원에 가야 한다며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놀이터를 떠나버린다. 방과 후 놀이터를 지켜보면 학교와 학원 사이의 경유지 즈음 되어 보인다. 시간이 어쭙잖게 남았을 때 잠시 시간을 흘려보내는 곳. 내 자녀들은 저들끼리 잘 놀기도 하지만 놀이터에 친구들이 그득한 것을 보고 반가움에 달려가다가 다들 목적지를 향해 떠나버리니 아쉬운 실상이다.
친정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하루를 꽉 채워 다양한 '배움'에 투자하셨다. 나는 5살 때부터 수영, 태권도, 발레, 바이올린, 피아노, 미술 학원에 다녔다. 그중 10년을 넘게 배운 수영과 피아노는 전공의 갈림길에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배움에도 '때'가 있다고 하고 어렸을 때 배우는 것은 평생 간다는 말이 있다. 인생의 격언들을 내 짧은 30여 년 삶에 빗대어 살펴본다. 1년 남짓 배운 태권도, 발레, 미술 같은 것들은 지금의 인생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중 오래 배운 바이올린, 피아노, 수영은 지금도 악기와 물만 있으면 능숙하게 실력을 뽐낼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투자금액 중 한 푼도 회수하지 못했고 지금의 나는 어렸을 때의 배움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작은 경험들이 이미 내 삶에 잔잔하게 스며들어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악기와 운동을 사교육이냐 아니냐는 논쟁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사교육에 대한 '본질'과 그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한 번쯤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순수하게 '배움'을 위한 것인지 수익률을 따지는 '투자'인 것인지. 대개 남들이 다니니까 다니고, 맞벌이라 돌봄의 목적으로 학원에 보내는 가정이 많을 것으로 간주된다. 단단하게 뿌리내렸다고 생각한 내 신념이 흔들릴 정도로 나의 자녀들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학원'에 다닌다.
'배움'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배움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어영부영 시간을 때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이답게 지칠 때까지 뛰어보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 아무 걱정 없이 하루 온종일 뛰어노는 것은 아이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는 아이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되고 먼지가 그득한 손으로 간식을 먹고, 흙바닥에서 뒹굴고 아무 걱정 없는 해맑은 웃음을 자아내는 그런 모습.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서 돌아오면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다. 하교 후 아이들은 놀이터에 둘러앉아 따뜻한 햇볕과 달콤한 간식을 먹으며 오전 일과에 대한 회포를 나눈다. 한참 뛰놀다 보면 땅거미가 내려앉아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포근한 그림책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교육은커녕 방과 후에는 교육이 전무한 우리들의 일상이다.
1년 전부터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수영 학원에 첫째를 보내고 있다. 레슨비가 저렴하다는 명목하에 온 가족을 데리고 첫째 수영 픽업에 힘쓴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많이 짧아졌다. 분명 대낮에 하교했는데 수영 강습 하나 다녀오고 나면 어둑한 밤이 된다. 학원 하나에 버거워하는 첫째는 놀 시간이 없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주민센터이다 보니 레슨비가 저렴해서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에 눈길이 가지만 욕심을 내려놓는다.
배움에 때가 있는 것처럼 한참 뛰어노는 것에도 때가 있는 법. 바로 지금 아이들은 그 언제보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뛰어놀 '때'라는 것. 자유롭게 놀아본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피와 살로 단단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