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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Mar 22. 2024

9년 만의 자유 부인

욕망 많은 아줌마의 하루

 장기 가정 보육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침표는 이따금 쉼표로 번질 만큼 잉크는 마르지 않았지만 정부로부터 받던 양육 수당은 지난해부터 나오지 않는다. 느지막이 기관에 보내면 '잘 간다'거나 '적응이 힘들다'거나 하는 말들은 뜬소문임을 세 아이를 통해 알았다. 그것도 아이의 기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첫째는 6살에 처음 간 유치원을 즐거워했고, 둘째는 7살에도 등원을 힘들어했다. 셋째는 5살에도 그럭저럭 유치원에 잘 다닌 편이었다.


 지난 1년을 통째로 적응 기간이라고 혼자 규정하고 아이를 기관에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았다. 아이들이 등원을 힘들어할 때면 이따금씩 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하고 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누렸다. 제도권의 교육을 받기로 순응했으니 유치원은 학교 가기 전에 적응하는 작은 사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이는 유치원에 퐁당퐁당 다녔다. 아이들이 등원하는 날이면 4시간이라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었지만 꼬박 9년 만에 내 시간이 생긴 것이다.


 9년이란 시간이 짧지 않으니 그간 하고 싶었던 것은 많았다. 이왕 아이를 장기 보육하기로 결심했으니 작은 욕망마저 고이 접어 감춰두었을 뿐이었다. 자유 시간이 생긴 날이면 세월이 진하게 벤 종이들을 하나씩 펼쳤다.


  규칙적인 산책을 못해서 비만한 라떼(반려견)와 동네 산 어귀로 산책을 다녀왔다. 종종 아이들과 다녔던 거리를 나 혼자 걸으니 공기마저 새로웠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만큼 아이들을 잠시 잊었다. 하루는 10년 전에 입었던 요가복을 입고 매트 위에 올라갔다. 기억나지 않을 것 같던 시퀀스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요가를 한 다음 날이면 기분 좋은 근육통에 다시 매트를 펼쳤다. 읽고 싶었던 종이책도 한 움큼 빌려왔다. 진하고 따뜻한 커피 한 모금과 책 한 페이지는 궁합이 좋았다. 동쪽 햇살을 머금은 독서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으리라.


 나열해 보면 별 것 아닌 것에 분초를 다투며 시간을 사용했다. 온전한 내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아침과 점심을 걸렀다. 마음을 채우기 위한 위장의 빈곤이라 그리 궁핍하진 않았다. 햇수로는 5년이 넘은 간헐적 단식인데 중량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을러진 운동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처음부터 놀 생각은 없었고 단 하루도 놀아본 적은 없었다. 생산적이지 않은 일뿐이지만 나를 가꾸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 눈에 엄마는 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때때로 집에서 '노는 엄마'인 나를 부러워했다. "나도 엄마처럼 집에서 놀고 싶다"라는 한숨 섞인 말을 들었을 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노는 것은 그저 목적 없이 동네 엄마들과 어울리거나 넷플릭스 따위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규정지은 놀이만 하지 않았을 뿐, 회사라는 집단에 소속되어있지도 않았고 특정한 소득도 없으니 '노는 엄마'가 맞았다. 간혹 들려오는 동네 엄마들의 취업이나 부업 소식은 더욱 나를 '집에서 노는 팔자 좋은 아줌마'라는 틀에 옭아맸다. 엄마를 부러워했던 아이의 말이 마중물이 되었다. 폐업한 지 3개월 만에 다시금 전자 상거래를 시작했다. 부러 아이들 앞에서 바쁜 기색을 비추며. 명함도 건네줬다. "엄마 새롭게 일 시작했어, 응원해 줘"


  남들은 취미로 하는 것들에 나는 미래의 큰 그림을 스케치한다. 네이버 카페, 블로그, 브런치 등이 그렇다. 전자상거래는 나에게 보험같은 존재다.


  보여주기 위한 명함은 아니었다. 꼭꼭 숨겨둔 욕망의 서랍을 열어본다. 재취업 기로에선 친정 아빠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양가 부모님께 잔고에 관계없는 좋은 선물을 드리고 싶다. 주말도 없이 개발직으로 일하는 남편을 조기 퇴직 시켜주고 싶다. 무엇보다 나라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아이들과 세계 일주라는 포부가 생겼다.


 진실된 사랑은 욕망으로 거듭났다. 많은 욕망은 내 삶의 윤활유가 되어준다. 행복과 돈은 비례하지 않다고 하지만 돈이 많으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욕망 많은 아줌마는 오늘도 오전의 시간을 고군분투한다.


  선언하면 이룰 확률이 높지 않다고 했던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곧 이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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