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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Mar 29. 2024

비로소 어른

부모란 미숙한 남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다 자라거나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정의한다. 어른은 우리가 흔히 만 19세 이상의 남녀를 일컫는 成人(성인)과 다른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교복을 벗자마자 어른이 된 줄 알았다.


 전공 공부는 학창 시절 공부처럼 재미가 없었다. 그저 수업이 끝나고 삼삼오오 어울려서 노는 오락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이것이 어른의 여유로움이라 여겼다. 그렇게 대학 시절을 보내고 매일 오전 8시면 분주한 회현역 행렬에 맞춰 정해진 사옥에 들어갔다. 점심이면 회사 근처 맛집이란 식당을 돌며 배부르고 따뜻한 식사를 하고 어스름해질 무렵이면 바쁜 현대인들 사이에 끼여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주말이면 두둑한 통장 잔고와 맞바꾼 옷가지들을 걸치며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엄마라는 역할이 처음이라 서투른 것도 있지만 나라는 존재는 누구를 돌볼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특히 '감정'의 영역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도 울음이 그치지 않을 때는 아기가 꼭 미웠다. 잘 자고 있던 아기가 밥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깨버리니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신체 발달만 끝난 물리적인 어른이었지 다른 영역은 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기적이었다. 나의 수면과 본능적인 욕구, 이를테면 화장실에 가야 할 때 못 가게 한다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없게 하는 아기의 울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감정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기가 정신을 쏙 빼놓고 울다 잠든 밤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여러 서적에서 정답을 찾아 헤맸다. 어떤 책은 나를 호되게 꾸짖었고 어떤 책은 잘하고 있다고 나를 위로했다. 아기는 조금씩 자라났고 아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기를 사랑했다.


 사랑은 위대했다. 사랑 앞에서 나는 진실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이는 품이 부족했던 내 마음에 넓은 아량을 만들어줬다. 아이는 나에게 인내심, 이해심, 기다림 외에도 상식 밖의 것들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아이는 1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이상 탐색하며 걸었다. 한 걸음 가다 쪼그려 앉아 보도블록 위의 많은 생명체들을 관람하고 화단의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보물을 발견하듯 무언가를 한참이고 찾아 헤맸다. 아이에게 '빨리빨리'를 요구하려다가 약속 시간보다 한 참은 일찍 나오는 버릇을 들였다.


 아이에게 물감과 붓 그리고 종이를 건네주고 커피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 아이는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이내 양 손바닥 가득 물감을 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자아낸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삼키고 틀 없이 노는 아이를 그저 바라봤다. 물감을 주고 물감을 튀기지 말고 놀라고 하거나 음식을 주고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밧줄로 아이를 옭아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손에 묻은 물감과 흘린 음식들은 주워 담으면 되는 것이었다. 규칙대로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마치 아이에게 재미없는 어른을 흉내 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아이는 아이답게 놀 줄 알아야 했다.


 하루는 놀이 공원에 갔다. 아이는 많은 놀이 기구를 지나치고 그 흔한 모래 놀이과 곤충 채집 삼매경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른들은 놀이 공원에서 다양한 놀이 기구를 지칠 때까지 타야 흔히 '본전'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정해진 패턴대로 행동한다. 아이는 어른과 달랐다. 이것은 다른 장소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산 정상을 찍어야만 등산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산 어귀에서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거나 참나무 근처에서 풍뎅이만 찾다 하산하는 날도 있었다. 산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다듬어 지팡이만 만든 날도 있었다.


 아이에게 산은 올라가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놀이 공원은 놀이 기구를 타야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흐르는 대로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했다. 아이에게 장소와 목적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놀이공원의 많은 놀이 기구와 산 정상은 어른이 정해놓은 목표일 뿐. 아이는 아이만의 세계에 흠뻑 취해 열정을 쏟는다. 호화로운 장소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어야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아이의 행동은 물질만능주의의 사고를 반성케 했다. 동심을 방해하지 않는 일, 어른으로서 지켜야 할 임무와 같았다. 때론 집 앞의 작은 터가 아이에겐 최고의 장소가 된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 아이들은 위험천만하고 사고뭉치에다가 모든 것이 미숙하기 때문에라는 편협된 사고를 애써 지운다. 여유롭고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은 생각보다 지혜롭고 안전하게 울타리 안과 밖을 넘나들며 논다.


 우리는 삶을 먼저 살아봤다고 필요 이상의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그 불필요한 가르침을 멈추는 순간 아이는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된다. 오히려 작은 아이에게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 매일이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의 키가 자라는 만큼 부모도 함께 성장한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한번 더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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