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사는 것은 시간의 기둥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편차는 있지만, 기둥의 길이가 대략 100년 정도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20살까지는 사회가 정한 교육기관에서 유사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보편적 지식을 습득하는 기간인 것이다. 이 시기 동안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립되는 것처럼 획일적이고 품질이 균등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라는 미명하에 그들은 누군가 정해놓은 길을 걷는 수밖에 없다. 가끔 모험심이 넘치는 누군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금방 묻혀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린 너의 생각 따위는 이미 앞선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검증해 놓은 데이터와 비교하면 한없이 하찮은 것이라는 이유로. 특히 연장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는 동양권에서는 더욱 그렇다. 중년이 되어 자녀를 세명이나 키우고 있는 나한테 질문해 본다. 아이가 학업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겠다면 과연 동의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난 몇 가지 기준을 두고 판단할 것이다. 우선 아이가 지금까지 학업에 충실했냐가 첫 번째 기준이다. 향후 학업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는 근거로 학업의 충실성을 본다는 게 다소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제(학업)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아이가 앞으로는 다른 것에 몰입할 거라는 생각은 과도하게 낙관적이다. 평소 어려운 일을 우직하게 수행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성실함이라는 무기가 생기는 것이고, 그 무기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날카로워지는 법이다. 다음으로 판단해 볼 기준은 절실함이다. 앞선 기준인 학업의 성실성은 그나마 시험점수라는 객관적 수치가 있었다. 하지만 절실함은 무엇을 가지고 판단할 것인가? 엉뚱하지만 절실함은 객관적인 수치가 필요한 항목이 아니다. 절실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티가 나기 때문이다. 한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그 자세 그대로 잠자리에 드는 발레리나를 본 적이 있는가? (난 매우 가까운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물론이고, 눈을 감고 자는 동안에도 어려운 자세를 취하는 그런 사람에게 절실함이라는 단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투입하여 한 가지만을 갈고닦는 사람에게는 아우라가 생기게 되고, 그 아우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절실함’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이쯤 되면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의 결정을 반대할 명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내 아이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결과와 상관없이 응원하게 된다. 물론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재능과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운이 따라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같이 기뻐하고 같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좀 어떤가? 그 과정을 지나온 아이는 한없이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아이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마주친다 해도 묵묵히 중심을 잡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