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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Nov 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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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本龍一

 토요일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주중에 자꾸 잠을 설쳐서 주말에라도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다니. 어릴 때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른이'들이 영 이해가질 않았는데,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며 그들을 닮아가고 있는 걸까? 역지사지.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지만, 주말 아침 고요한 거실은 썩 맘에 든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 그곳에는 나를 방해할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의 방 너머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만 있을 뿐. 나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여 FM93.1을 들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매일의 루틴에 따라 물을 한 컵 먹자, 어제 미뤄둔 설거짓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작업할 양을 보니, 저녁 늦게 귀가한 큰 아이가 사용한 접시까지 추가된 게 분명하다. 꽤 수북하다. 난 능숙하게 고무장갑을 끼고 따뜻한 물로 식기를 불리기 시작했다. 집안일 중에 제일 선호하는 분야고,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은은한 클래식까지 흘러나오니 참 좋다. 현실과 낭만. 마치 반신욕을 하는 기분이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얼마 전 빌린 소설을 읽으면서 듣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가, 클래식의 진가를 알아버렸다. 그건 마치 고등학교 때 사용했던 엠씨스퀘어 같았다. 치고받고 싸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볼륨으로 세팅하고 마주하는 소설은 생각보다 쓱쓱 읽혔다. 아무런 가사도 없는 멜로디가 마치 백색소음 같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지친 사람이 눈을 감고 상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듯, 클래식은 작품으로 빠져드는 신기한 입장권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지. 남들이 좋아하는 건 모두 한 번쯤 접해볼 필요가 있어.'

 한참 음악을 들으며 접시를 헹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등을 투둑툭 두드렸다. 리듬감 넘치는 노크를 하듯이. 돌아보니 머리를 산발한 둘째가 서있었다. 양손을 내 앞으로 쭉 뻗은 채로. 난 초고속으로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순간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발을 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이거 가져가세요." 원장님이 수줍게 내민 손에는 빨간색(플레인) 빼빼로가 들려있었다. 상자 위에 하트 모양의 메모지가 테이프로 고정된 채. 그리고 종이에는 '매번 찾아줘서 고맙다'는 스팸 문자성 내용의 손 편지가 쓰여 있었다. 둘째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난 신속하게 가방 속에 있는 빼빼로를 꺼내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톱이 짧아 마음처럼 쉽게 되질 않았다. '굳이 이렇게 단단히 붙여놓을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작업을 성공시켜야 한다. 초조한 나머지 마지막 테이프를 떼다가 상자가 약간 까졌으나, 이 정도면 괜찮아 보였다. 난 다시 한번 태연한 표정으로 위장하고 거실로 걸어갔다. "짠! 아빠가 까먹은 줄 알았지? 나랑 똑같이 생긴 딸랑구 빼빼로 데이 축하해!" 도대체 무엇을 축하한다는 건지 나조차 알 수 없었지만, 석연치 않은 표정의 둘째는 다행히 내 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휴~ 아직 초딩이라 다행이야. 내년에는 까먹지 않게, 팔 한쪽 구석에 1111이라고 (헤나)문신을 새겨넣어야 하나.'

 하지만 안방문을 뚫고 흘러나오는 터미네이터의 코골이 소리는 엄중한 경고와 같았다. 지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급속 설거지 신공을 발휘하고 소파에 앉은 나는 급하게 검색을 시작했다. 초록창에 빼빼로 데이 선물을 입력하자, 죄다 빼빼로만 튀어나왔다. 빼빼로를 주라고 만든 데이인데 다른 걸 기대하는 내가 이상한 거지만, 그만큼 난 절박했다. 작년 11월 11일을 그냥 넘어간 죄로, 올 해는 뭔가 다를 거라며 호언장담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이트를 계속 타고 들어간 끝에 어떤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류이치 사카모토 헌정 연주회. '응? 너무 무겁지고 않고, 그렇다고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도 않고 딱이겠는데? 게다가 우리 세대에게 류이치 사카모토는 꽤 친숙한 아티스트 아닌가.' 티켓 두장을 결제한 나는 아내에게 문자를 남겼다. 마치 오래전에 준비해 둔 뉘앙스를 풍기며, '오늘 저녁은 나랑 놀 거지?' 라고. 느지막이 일어난 아내는 미사일 배송으로 주문한 빼빼로 박스를 뜯어 나와 아이들에게 건넸다. 준비된 나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냐고 물었다. 뭔가 눈치챈 아내는 사과폰을 확인하더니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늘 뭐 준비한 건데?" 아내의 감동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난 그저 6시까지만 외출 준비를 완료하라고 말했다. (아주 칭찬해! myself)

 운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궁금해 죽겠지?) 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목적지가 어딘지 밝히지 않았다. 30분쯤 이동하여 아트센터에 도착하자 아내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어~ 윤현섭 씨. 제법인데. 나도 올해 죽었다는 기사 보고 짠했는데. 잘했네." 응? 누가 죽어? 그렇다. 난 류이치 사카모토 '헌정' 연주회를 예매하면서도, 그가 고인이 된 줄 몰랐던 것이다. 그저 급하게 미션을 완료하듯 예매했을 뿐이지. 하지만 난 태연하게 답했다. "이 기회에 옛날 생각도 하고 좋지 뭐."

 티켓을 교환하면서 받은 팸플릿을 보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평소 잘 몰랐던 여성 피아니스트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을. 홀에 들어가 앉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중세 화형식을 방불케 하는 촛불이었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놓인 촛불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난 추위를 많이 타는 피아니스트가 걱정스러웠다. '저러다가 발등에 촛농이 눌어붙는 거 아녀?'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으로 판명되었다. 옆에서 신기하다며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성당에서 행사할 때마다 촛불 켜느라 힘든데, 이런 LED 양초 참 좋네."

 피아니스트는 사카모토의 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연주를 시작했다. 준비한 곡이 잔잔하게 끝나서 박수 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끝나면 무릎에 손을 올리겠다는 당부와 함께. 3곡, 3곡, 4곡을 묶어서 연주했는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친숙한 곡은 딱 두 개뿐이었다. 물론 마지막 황제도 아는 곡이었지만, 다른 강렬한 현악기가 빠진 피아노만의 연주는 마치 앙꼬 없는 찐빵 같았다. (어디서 다른 연주자가 나오지 않나 한참 찾았다.) 그나마 제일 좋아하는 The sheltering sky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 곡 마저 없었으면 본전 생각이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열 번째 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마지막으로 연주가 끝났고, 어쩔 수 없이(?) 요청한 앵콜곡을 진짜 끝으로 모든 프로그램이 마무리되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내는 너무 좋았다는 밑밥을 먼저 깔고, 바로 이어서 신랄한 의견을 개진했다. 피아노는 그 곡의 메인이 아니라는 둥. 헌정 음악회 치고는 너무 비싼 거 아니냐는 둥. 빼빼로는 언제 줄 거냐는 둥. (이게 빼빼로잖아! 젓가락 행진곡 몰라?) 그러나 놀라운 은 그뿐만이 아니라, 12월에 이소라 콘서트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이소라 씨는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페이커가 게스트로 올 수도 있다는 둥. 모델 이소라가 아니냐는 둥의 헛소리를 해가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딱 거기서 막혔다. '안 해본 걸 같이 하자는 사람이 제일 좋다'는 과거의 경솔했던 발언. (44화 드론 참조) 이래서 뭐든지 문서로 남기는 게 제일 중요하다. 추후에 발뺌하지 못하도록. "회사 동료가 그날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양도한 거라, 꼭 가야 해."라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잔뜩 비뚤어진 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 밤 터미네이터가 로그오프 하고 나면, 카드 결제 내역을 샅샅이 뒤져 볼 것이라고. (비번쯤은 간단하지. 그리고 그 고마운 동료는 돈이 너무 많아서 환불이라는 기능을 이용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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