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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제자리_달리기

결석 게임 13_또 하나의 생명

by 이별난

숨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새겨진 세 글자를 보았다.


죄책감

2라운드를 재개합니다. 54걸음입니다.

27초

이제 다시 시작이다.


1초

세상에는 놓을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것들도 있다.

절대 사라지지 않지만, 마주하기 힘든 이 감정.


0초

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철컹'


피하지 말자. 다 내 탓이다. 정면으로 마주 봐야 한다.

'후~우'

심호흡을 했다.


'쿵'

'저벅저벅'


'쿵'

'저벅저벅'


'쿵' '쿵'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오고 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긴장되었다.


1라운드때처럼 지안이가 나올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드디어 그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의 몸집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땅을 짚고 일어났다. 난 기겁하고 뒤로 넘어질 뻔했다.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눈, 코, 입이 없다.


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런데..?

이 아이 방향을 못 잡는다.

계속 벽에 '쿵' 부딪혀 쓰러지고,

일어나 또 '쿵' 부딪힌다.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난 절대 잡힐 것 같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고 자세히 보니 가슴에 큰 명찰표가 달려있었다.


첫 번째 생명

결혼초 지안 엄마가 병원 나이트 근무를 하다가 계단에 굴렀을 때, 유산된 아이의 태명이었다.


아이는 그때도, 지금도 이렇게 부딪히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만 간절한 마음으로 이 아이를 마중 나가고 있었다.

난 이 생명에 대해 큰 슬픔도 없었고, 아내의 슬픔도 공감하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깊이 생각한다.

세상을 다 잃은 느낌? 모르겠다. 감히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아이가 이렇게 눈앞에서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저 생명 앞에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졌다.


아이에게 다가갔다.

넘어져있는 이 아이가 더 부딪히지 않도록,

잡을 수 없었고, 잡으려 하지도 않았던 손.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손을 잡았다.


'펑, 펑'


불이 꺼졌다가, 켜졌다. 난 제자리로 돌아왔다.


두 번째 생명

두 번째 술래로 지안이가 나왔다. 바라보면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첫 유산 이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내는 그 이유를 결혼 전부터 안 좋았던 자궁 건강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염없이 자신을 자책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도 정자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기당구에 빠져 밤새 2~3갑의 담배를 피우면서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정자에 이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사실상 모든 게 나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아내는 시험관 시술을 제안했다.

담배를 끊은 지 4개월째, 시험관 1차 시술에 희미한 줄이 생겼으나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아내는 자신이 이 생명줄을 지키지 못했다는 큰 자책에 빠졌다. 어느 날 잠꼬대로 첫 유산된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눈물 흘리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4차 시도에 생긴,

결혼 6년 만에 가졌던 아이.


열이 많은 체질의 아내는 한 겨울에도 이불을 다 걷어차고 자는 편이다. 시험관 시술 성공 후, 그런 그녀는 전기장판을 켜고 두꺼운 이불을 꼭 덮고 잤다. 그렇게 땀과 열을 뻘뻘 흘리며 이 생명을 지켜냈다.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겠다고, 이불을 꼭 쥔 그녀의 손이 이제야 경이롭게 느껴진다.


난 이후 그런 그녀들을 두고 도박으로 빠졌고, 인생은 막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쿵'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출구에 도착했다. 이제 뒷걸음을 칠 길도 없다. 돌아서 문을 열면 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난 무릎을 꿇고 되지도 않을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지안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펑, 펑'


세 번째 생명

세 번째 술래는 지안이 이후 유산된 아이였다.


아내는 지안이가 외로우니까 시험관 시술 딱 한 번만 시도하자고 했다.


이때 난 이미 도박중독자였고, 아내에 대한 신뢰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우리 상황에 아이가 무슨 의미 있냐며 거절을 계속하다가, 아내의 끈질긴 부탁이 단 한마디도 듣기 싫어 승낙했다. 한편으로 내 몸이 당연히 안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정자에 이상이 생겨서 안 생기길 바랐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라고는 이게 사람이 맞나 싶다.


"만약 생기면 네가 알아서 해. 네가 원한 거니까."


어느 일요일 오후,

갑자기 아내가 통증을 호소해서 병원에 갔다.


유산이었다. 아내가 유산 수술 후 잠시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지안이와 병원 앞 공원 잔디밭에서 놀며 기다렸다.


난 기뻤었다. 유산된 걸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 순간도 집에 데려다주고 베팅하러 갈 생각만 했다. 어렵게 탄생한 지안이라는 생명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런 내가 사람처럼 안 보인다.


이때 아내는 둘째가 생기면, 내가 정신 차릴까 희망을 가졌던 건가? 이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곁에 포기하지 않던 한 사람이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희미했던 이 아이의 생명을 꺼뜨린 건 나였다.

난 그 빛이 꺼지길 바라면서, 내 빛도 끈 상태였다.


난 그날 도박으로 딴 돈을 들고 쾌락을 찾았다.


또 하나의 생명

수년간 이런 나를 피해 다녔다. 그리고 기억조차 안 하려 했다. 나 살려고 반성하는 척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죄책감이라는 말 뒤에 숨으려 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추악한 죗값이라고 하기에, 눈가에 고인 눈물이 너무 싸게 보인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난 주저앉아버렸다.


'펑, 펑, 펑, 펑, 펑'


이어지는 생명 앞에 난 고개 숙여 한숨만 쉴 뿐이었다.


불이 꺼지고 난 또 어둠 속 제자리로 왔다.

2라운드가 끝났습니다. 3라운드는 108걸음입니다.


도망가고 싶다.

그런데 이 마음이 아무리 커져도, 난 도망갈 수 없다.

그렇게 도망치고 살았지만,

결국 어딜 가도 지구 안이고, 어딜 가서 숨어봐야 들킨다.

내가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


기억을 하든 못하든 냉동보관된 것처럼 절대 녹지 않는 것들.

기억나는 순간 마주하는 이 차디찬 얼음덩어리는 내 마음에 평생 남는다.


'펑, 펑, 펑, 펑, 펑...'


어느새 6라운드가 끝났다. 진행될수록 죄책감의 강도가 세지는 기억들이 나를 억누른다. 이걸 마주 보는 것이 버겁다. 정신이 혼란스럽다. 그래도 마주 봐야 한다. 단 한 발자국도 피하면 안 된다.


이렇게 수많은 잘못을 하고도 '나도 힘들다고!' 말하며,

제 자리에서 하늘만 올려다보았던 나날들.


지금 순간만 놓고 보면 예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난 다음 라운드를 위해 고개를 들어,

제자리에서 어두운 하늘만 볼뿐이다.


저 어둠 깊은 곳에 빛 한 점이 있길 올려다보는,

또 하나의 생명이,

이 땅 어디엔가 있겠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해빙기

7라운드를 재개합니다. 1,728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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