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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내③집④ #②

결석 게임 19_계절의 파동

by 이별난

내 집

몸이 으스스하다. 뜨겁던 아랫목이 그립다.


아랫목

연탄구멍을 맞추며 불을 갈았던 날이 생각난다.

어쩌다 내가 연탄집게를 잡았던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아궁이에 있던 다른 가족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나 몰래, 가족들이 남긴 불씨 덕분에 겨울을 넘겼다.


그 위험한 연탄가스 냄새를

누가 다 맡고 있던지는 기억에 없고,

뜨끈뜨끈한 아랫목만 기억난다.


난 어쩌면 인생의 겨울도 그렇게 타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고마운 줄 모르고 따뜻하게 보냈던 거 아닌가 싶다.

하물며, 내가 극복했다고만 여긴 거 같다.


그 시린 겨울의 생존과 관련 있던 곳이,

현관문 바로 오른편, 이 앞마당의 한쪽 끝에 붙어있다.


연탄광


'철컹'


연탄과 신문지

문이 열려있다. 검은 연탄들이 몇 장 없다.

연탄이 부족한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안 좋다.


한쪽에 신문지가 잔뜩 쌓여있다. 호기심에 들춰보았다.

1988년 4월 4일, 3월, 2월, 1월... 신문들이다.

왜 연탄광에 신문지가 항상 많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은 신문을 구독하지 않았다.

담벼락 넘어온 신문 한 부는 옆집 거였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옆집에 부탁해서

다 본 신문지를 가져다 놓은 것 아닐까?


신문지는 겨울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연탄보다 더 중요했다.

집에 보는 사람이 없어도, 난 신문을 봐야만 살 수 있었다.


볼.. 일.. 을 봐야 했다.


그 어린놈이 세상을 내리 깔아야 했던 곳.

세상에 똥칠을 해야 직성이 풀렸던 곳.

이곳은 내 제2의 화장실이었다.

외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웠다.

나의 생리현상과 관계가 있는 것이 신문지였다.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몸은 감기 기운이 약간 있지만,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덜컹'


잠시 포근함을 느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덜 춥다.

정면 끝, 대문 쪽을 봤다.


대문


연탄재가 사라졌다.

자리에 두꺼운 이불이 노끈으로 묶여있다.

수도꼭지 옆에 있던 큰 다라통도 없어졌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일단 대문으로 갔다.


이번엔 이불 위에 놓인 검은 봉지에 시계가 비치고 있다.

4시였다. 그새 8시간이 지났다고? 이상하다.


사자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대문을 다시 열어보려는데,

사자가 눈을 부릅뜨며 웃던 입을 크게 벌린다.

사나운 이빨까지 드러냈다.

나를 절대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깜짝 놀라게 했다.


무시하고 열어보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는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아직 못 가본 곳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옆집 안방 문


앞마당 길의 양 끝을 차지하고 있는 연탄광과 옆집 안방 문.

이 문을 보는데, 옛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대문을 나가, 재래식 화장실을 가면, 옆집 뒷문과 연결되어 있다. 난 이 루트로 옆집 안방 안에 많이 갔다.


학교 결석을 할 때, 그렇게 숨어 있었던 곳이다.


반대로 여길 들어가면, 화장실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똑딱단추가 달린 여닫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탁탁탁, 탁탁탁'


여기도 잠겨있다.


[ '흐~읍. 아, 깜짝이야. 누구지? 아빠, 형 다 나갔잖아. 엄마가 다시 왔나? 대문 열리는 소리 못 들었는데? 들킨 건 아니겠지?' ]


뒷마당 가는 길

뒷마당에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 '흐~읍. 뭐지?' 왜 가다가 마는 거야?]


우리 집과 옆집은

두 개의 'ㅁ' 자 건물인데, 지붕은 하나이다.

그래서 두 집 사이에 지붕이 있는 길이 하나 존재한다.

그게 이 뒷마당 가는 길이다.

항상 그늘이 져있는 골목길 같았다.

아까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늘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커먼 터널 같다.


순간, 이 길이...

지난 8라운드 동안 갇혀있던 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길이 구신과 걸었던 길이고,

그들은 이 대문을 통해 나간 것 같다.

대문 근처 빨간 바닥이 김장의 흔적이 아니라,

체념이 무릎을 질질 끌며 지나간 핏자국으로 보인다.


나오려고 했던 이 컴컴한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썩 내키진 않지만,

뒷마당을 가려면 이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한다.


어둠에 한 걸음을 집어넣었다.

난 놀라서 발을 얼른 뺐다.

땅이 돌 느낌이 아니다.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었다. 바닥을 만져보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푹신한 카펫 느낌이다.


잠시 더 가기가 망설여졌다.

한 발 물러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또다시...

연탄더미에 눈이 쌓여있다.

시계는 어느새 또 2시간이 지났다. 2시 정각이다.


수도꼭지를 보니, 얼지 말라고 옷이 감겨있다.


계절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이 시계...

시간이 아니라 해당월이다.


일단 이 생각을 확인하러 연탄광에 다시 들어갔다.

검은 연탄이 꽉 차있다.

신문지 날짜를 봤더니, 1987년 2월, 1월이다.

다시 나와 시계를 보니 12월이다.

계절이 거꾸로 가고 있다.


다시 뒷마당 가는 길 앞에 섰다.


잠시 한줄기 빛을 봤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만 착각했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 나...


3(삶)의 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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