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석 게임 19_계절의 파동
몸이 으스스하다. 뜨겁던 아랫목이 그립다.
연탄구멍을 맞추며 불을 갈았던 날이 생각난다.
어쩌다 내가 연탄집게를 잡았던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아궁이에 있던 다른 가족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나 몰래, 가족들이 남긴 불씨 덕분에 겨울을 넘겼다.
그 위험한 연탄가스 냄새를
누가 다 맡고 있던지는 기억에 없고,
뜨끈뜨끈한 아랫목만 기억난다.
난 어쩌면 인생의 겨울도 그렇게 타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고마운 줄 모르고 따뜻하게 보냈던 거 아닌가 싶다.
하물며, 내가 극복했다고만 여긴 거 같다.
그 시린 겨울의 생존과 관련 있던 곳이,
현관문 바로 오른편, 이 앞마당의 한쪽 끝에 붙어있다.
'철컹'
문이 열려있다. 검은 연탄들이 몇 장 없다.
연탄이 부족한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안 좋다.
한쪽에 신문지가 잔뜩 쌓여있다. 호기심에 들춰보았다.
1988년 4월 4일, 3월, 2월, 1월... 신문들이다.
왜 연탄광에 신문지가 항상 많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은 신문을 구독하지 않았다.
담벼락 넘어온 신문 한 부는 옆집 거였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옆집에 부탁해서
다 본 신문지를 가져다 놓은 것 아닐까?
신문지는 겨울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연탄보다 더 중요했다.
집에 보는 사람이 없어도, 난 신문을 봐야만 살 수 있었다.
볼.. 일.. 을 봐야 했다.
그 어린놈이 세상을 내리 깔아야 했던 곳.
세상에 똥칠을 해야 직성이 풀렸던 곳.
이곳은 내 제2의 화장실이었다.
야외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웠다.
나의 생리현상과 관계가 있는 것이 신문지였다.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몸은 감기 기운이 약간 있지만,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덜컹'
잠시 포근함을 느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덜 춥다.
정면 끝, 대문 쪽을 봤다.
연탄재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두꺼운 이불이 노끈으로 묶여있다.
수도꼭지 옆에 있던 큰 다라통도 없어졌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일단 대문으로 갔다.
이번엔 이불 위에 놓인 검은 봉지에 시계가 비치고 있다.
4시였다. 그새 8시간이 지났다고? 이상하다.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대문을 다시 열어보려는데,
사자가 눈을 부릅뜨며 웃던 입을 크게 벌린다.
사나운 이빨까지 드러냈다.
나를 절대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깜짝 놀라게 했다.
무시하고 열어보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는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아직 못 가본 곳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앞마당 길의 양 끝을 차지하고 있는 연탄광과 옆집 안방 문.
이 문을 보는데, 옛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대문을 나가, 재래식 화장실을 가면, 옆집 뒷문과 연결되어 있다. 난 이 루트로 옆집 안방 안에 많이 갔다.
학교 결석을 할 때, 그렇게 숨어 있었던 곳이다.
반대로 여길 들어가면, 화장실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똑딱단추가 달린 여닫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탁탁탁, 탁탁탁'
여기도 잠겨있다.
[ '흐~읍. 아, 깜짝이야. 누구지? 아빠, 형 다 나갔잖아. 엄마가 다시 왔나? 대문 열리는 소리 못 들었는데? 들킨 건 아니겠지?' ]
뒷마당에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 '흐~읍. 뭐지?' 왜 가다가 마는 거야?]
우리 집과 옆집은
두 개의 'ㅁ' 자 건물인데, 지붕은 하나이다.
그래서 두 집 사이에 지붕이 있는 길이 하나 존재한다.
그게 이 뒷마당 가는 길이다.
항상 그늘이 져있는 골목길 같았다.
아까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늘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커먼 터널 같다.
순간, 이 길이...
지난 8라운드 동안 갇혀있던 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길이 구신과 걸었던 길이고,
그들은 이 대문을 통해 나간 것 같다.
대문 근처 빨간 바닥이 김장의 흔적이 아니라,
체념이 무릎을 질질 끌며 지나간 핏자국으로 보인다.
나오려고 했던 이 컴컴한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썩 내키진 않지만,
뒷마당을 가려면 이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한다.
어둠에 한 걸음을 집어넣었다.
난 놀라서 발을 얼른 뺐다.
땅이 돌 느낌이 아니다.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었다. 바닥을 만져보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푹신한 카펫 느낌이다.
잠시 더 가기가 망설여졌다.
한 발 물러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연탄더미에 눈이 쌓여있다.
시계는 어느새 또 2시간이 지났다. 2시 정각이다.
수도꼭지를 보니, 얼지 말라고 옷이 감겨있다.
계절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이 시계...
시간이 아니라 해당월이다.
일단 이 생각을 확인하러 연탄광에 다시 들어갔다.
검은 연탄이 꽉 차있다.
신문지 날짜를 봤더니, 1987년 2월, 1월이다.
다시 나와 시계를 보니 12월이다.
계절이 거꾸로 가고 있다.
다시 뒷마당 가는 길 앞에 섰다.
잠시 한줄기 빛을 봤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만 착각했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 나...
3(삶)의 문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