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석 게임 20_계절의 순환
8라운드 내내 겪은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어둠에 들어가라 한다
그래, 그냥 그런 거다.
어두웠다 환했다. 어두웠다 어두웠다.
환했다 환했다. 환했다 어두웠다.
그냥 내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후~우'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내가 걷는 길 위에 해석의 결과를 남기면 된다.
일단 들어가자. 심호흡을 크게 했다.
'스으윽'
아무것도 안 보인다. 잠시 눈을 감았다. 고요하다.
그새 또 긴장했다. 심장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그 현상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
'찍, 찍'
"ㅇㅏ C. 깜짝이야!"
쥐가 집 천장에 돌아다닌다.
릴랙스, 릴랙스.
그래,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
어둠은 만나도 만나도 적응이 안 된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구신이 대문을 열고 다시 따라오는 것만 같다.
'후~우'
눈을 뜨고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다.
빛 한 줄기 봐서일까? 이 어둠이 더 짙어 보인다.
차라리 아까 어둠만 지속될 때가 마음이 덜 두려웠다.
그래, 마음 다잡으면 된다.
어둠이라고 꼭 나쁜 것도, 빛이라고 꼭 좋은 것도 아니다.
'휘~청'
양팔을 벌려 벽을 짚고 가고 있는데,
왼손이 움푹 파인 곳에 쑥 들어갔다.
"ㅇㅏ C"
식겁했다.
왼손으로 벽을 휘저어보는데,
작은 홈이 아니라 제법 큰 공간이었다.
조심스레 더 깊숙이 넣어봤더니, 벽이 느껴졌다.
이거, 옆집 부엌문 같다.
'쨍, 챙, 우당탕'
부엌 안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문을 열어봤지만 안 열린다.
"또 헛 것이 들린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 '흐~읍......아 C. 깜짝이야! 뭐야?' ]
"이게 진짜 옆집 부엌이라면 길의 중간 정도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래, 가보자."
[ '이 사람 뭐라고 중얼중얼 대는 거야?' ]
25걸음... 27걸음 그리고 한 걸음 더 뻗는 순간,
눈앞에 뒷마당이 펼쳐졌다.
그 순간 몸을 얼른 빼내고,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숨을 몰아 쉬었다. 땀을 닦으며 저 어둠을 바라보았다.
저 칠흑 같은 어둠. 무섭다.
'흐~음'
저곳이 무섭지 않을 때도 있었구나.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내일이 절대 오지 않기만 바라다가,
온갖 구신이 내 영혼을 완전히 덮어 씌우고,
모든 감각과 판단에 이상이 생길 때가 그랬구나.
구신, 이것들 참 잔인하다.
본인들은 대문을 다 빠져나가고,
이 어둠 깊숙한 곳에 나만 남겨놓았다.
근데, 대문의 시계...
내게 포기를 말해주는 것 같다.
......
에이 모르겠다. 포기는 김장 때나 쓰라 하자.
'툭툭'
난 일어나 이제야 뒷마당을 둘러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초록초록하다.
잠시 쪼그려 앉아,
이 작은 텃밭을 바라보는데,
지렁이와 친구 되어 놀았던 기억이 난다.
일어나,
뒷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길도 없던 이 산을 올라간 적이 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장독대와 하늘을 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려나 보다.
우리 집 뒷 담벼락이 아직 산인 걸 보니,
재개발되기 전일 때이다.
여름 장마 때면, 어머니는 그렇게도 산사태를 걱정했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여름밤
난 세상모르고 자고, 어머니는 밤잠을 설치셨을 게 보인다.
곧이어 빨간 사르비아가 꽃피기 시작한다.
내 입가에 환한 웃음이 같이 피어났다.
한 입 따서 쪽 빨아먹었다.
딱 한 입만이었다. 추억 속 맛은 아니다.
어느새 뒤뜰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계절이 순차적으로 흐른다.
뒤뜰에 눈부터 내린 게 아니고.
초록한 봄에 여름햇살이 내리쬐더니 단풍잎이 쌓이고 있다.
곧이어,
사르비아 꽃잎들과 붉은 단풍잎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뜨더니,
방금 지나온 어두운 길로 날아 들어간다.
그리고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뒤뜰에 눈을 내려 덮고 있다.
난 무슨 신호라고 생각하고 다시 지나온 길 앞에 갔다.
여전히 시커멓다.
'펑'
갑자기 길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암흑이 되었다.
안내방송
9라운드를 시작합니다. 8라운드에서 술래에게 잡힌 플레이어에게 주는 마지막 회생의 기회입니다. 27걸음입니다. 이번 라운드는 플레이어가 술래입니다.
너무 놀라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추억에 빠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근데 뭘 잡으라는 거지?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27초
.
난 구신한테 잡힌 거였다.
.
어둠이 걷히고 이제 됐다 하는 순간,
나만의 생각, 자만의 어둠에 또다시 빠졌던 걸까?
구신에게 잡혀 눈에 뵈는 게 없다가, 내 내면에 갇힌 걸까?
.
9초
.
과거의 많은 날 동안,
걷는 걸 건너뛰고 달리려고만 했듯이,
지금도 무엇을 건너뛰고 있을 것이다.
.
8초
.
어제 한 걸음, 오늘 두 걸음, 내일 세 걸음
걷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고,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는 것들 투성이일 것이다.
.
7초
.
그래도 달라진 건, 이제 자신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있든, 없든
지금은 무조건 달려야 한다.
.
6초
.
난 신발끈을 꽉 묶었다.
한 번 달려보자 하기엔 날려버린 시간이 너무 많다.
지금부터 계속 달린다.
.
5초
.
"도중아, 학교 가자!"
너무 또렷하게 들린다.
이건 환청이라 해도 속을 자훈이 목소리다.
.
4초
.
'펑'
불이 켜졌다.
난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
3초
.
땅에 스며든 체념의 붉은 피가 솟아오른 듯,
대문까지 레드카펫이 깔려있다.
방금 날아든 사르비아 꽃잎과 단풍잎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붉은 조명을 내리 비추고 있다.
.
2초
.
내 집에 흙, 풀, 나무, 지렁이, 여름햇살, 눈, 하늘...
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들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내 내면의 집에도 많은 감정들이 많은 날 살아 숨 쉬었다.
난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려고만 했다.
그러나 감히 내가 죽인다고 죽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것이다.
.
1초,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두울 수도, 환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이 골목길을 지나다니지 못하면,
앞마당과 뒷마당을 못 다닌다.
삶과 죽음 사이 골목길 어딘가에,
모든 생명과 감정들이 머무른다.
.
0초
난 레드카펫을 밟았다.
'후다닥'
그 순간, 옆집 안방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
난 재빨리 뛰어가 좇아갔다.
앞마당에 도착해서 좌우를 살펴보는데 안 보인다.
우리 집 부엌창문이 아까 닫혀있었는데, 열려있다.
난 현관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때, 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