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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내면의 집④ #③

결석 게임 20_계절의 순환

by 이별난

내면의 집

8라운드 내내 겪은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어둠에 들어가라 한다


어둠

그래, 그냥 그런 거다.

어두웠다 환했다. 어두웠다 어두웠다.

환했다 환했다. 환했다 어두웠다.

그냥 내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후~우'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내가 걷는 길 위에 해석의 결과를 남기면 된다.

일단 들어가자. 심호흡을 크게 했다.


'스으윽'

아무것도 안 보인다. 잠시 눈을 감았다. 고요하다.

그새 또 긴장했다. 심장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그 현상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


'찍, 찍'

"ㅇㅏ C. 깜짝이야!"

쥐가 집 천장에 돌아다닌다.

릴랙스, 릴랙스.

그래,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

어둠은 만나도 만나도 적응이 안 된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구신이 대문을 열고 다시 따라오는 것만 같다.


'후~우'

눈을 뜨고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다.

빛 한 줄기 봐서일까? 이 어둠이 더 짙어 보인다.

차라리 아까 어둠만 지속될 때가 마음이 덜 두려웠다.

그래, 마음 다잡으면 된다.

어둠이라고 꼭 나쁜 것도, 빛이라고 꼭 좋은 것도 아니다.


'휘~청'

양팔을 벌려 벽을 짚고 가고 있는데,

왼손이 움푹 파인 곳에 쑥 들어갔다.

"ㅇㅏ C"

식겁했다.

왼손으로 벽을 휘저어보는데,

작은 홈이 아니라 제법 큰 공간이었다.

조심스레 더 깊숙이 넣어봤더니, 벽이 느껴졌다.

이거, 옆집 부엌문 같다.


'쨍, 챙, 우당탕'

부엌 안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문을 열어봤지만 안 열린다.

"또 헛 것이 들린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 '흐~읍......아 C. 깜짝이야! 뭐야?' ]

"이게 진짜 옆집 부엌이라면 길의 중간 정도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래, 가보자."

[ '이 사람 뭐라고 중얼중얼 대는 거야?' ]


25걸음... 27걸음 그리고 한 걸음 더 뻗는 순간,

눈앞에 뒷마당이 펼쳐졌다.


그 순간 몸을 얼른 빼내고,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숨을 몰아 쉬었다. 땀을 닦으며 저 어둠을 바라보았다.

저 칠흑 같은 어둠. 무섭다.


'흐~음'

저곳이 무섭지 않을 때도 있었구나.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내일이 절대 오지 않기만 바라다가,

온갖 구신이 내 영혼을 완전히 덮어 씌우고,

모든 감각과 판단에 이상이 생길 때가 그랬구나.


구신, 이것들 참 잔인하다.

본인들은 대문을 다 빠져나가고,

이 어둠 깊숙한 곳에 나만 남겨놓았다.


근데, 대문의 시계...

내게 포기를 말해주는 것 같다.

......

에이 모르겠다. 포기는 김장 때나 쓰라 하자.


'툭툭'

난 일어나 이제야 뒷마당을 둘러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초록초록하다.


텃밭

잠시 쪼그려 앉아,

이 작은 텃밭을 바라보는데,

지렁이와 친구 되어 놀았던 기억이 난다.


일어나,

뒷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길도 없던 이 산을 올라간 적이 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장독대와 하늘을 보았다.


장마

한참을 바라보는데,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려나 보다.


우리 집 뒷 담벼락이 아직 산인 걸 보니,

재개발되기 전일 때이다.

여름 장마 때면, 어머니는 그렇게도 산사태를 걱정했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여름밤

난 세상모르고 자고, 어머니는 밤잠을 설치셨을 게 보인다.


샐비어

곧이어 빨간 사르비아가 꽃피기 시작한다.

내 입가에 환한 웃음이 같이 피어났다.

한 입 따서 쪽 빨아먹었다.

딱 한 입만이었다. 추억 속 맛은 아니다.


어느새 뒤뜰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계절이 순차적으로 흐른다.

뒤뜰에 눈부터 내린 게 아니고.

초록한 봄에 여름햇살이 내리쬐더니 단풍잎이 쌓이고 있다.


곧이어,

사르비아 꽃잎들과 붉은 단풍잎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뜨더니,

방금 지나온 어두운 길로 날아 들어간다.


그리고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뒤뜰에 눈을 내려 덮고 있다.


난 무슨 신호라고 생각하고 다시 지나온 길 앞에 갔다.

여전히 시커멓다.


'펑'

갑자기 길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암흑이 되었다.


안내방송
9라운드를 시작합니다. 8라운드에서 술래에게 잡힌 플레이어에게 주는 마지막 회생의 기회입니다. 27걸음입니다. 이번 라운드는 플레이어가 술래입니다.

너무 놀라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추억에 빠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근데 뭘 잡으라는 거지?


달리기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27초

.

난 구신한테 잡힌 거였다.

.

어둠이 걷히고 이제 됐다 하는 순간,

나만의 생각, 자만의 어둠에 또다시 빠졌던 걸까?

구신에게 잡혀 눈에 뵈는 게 없다가, 내 내면에 갇힌 걸까?

.

9초

.

과거의 많은 날 동안,

걷는 걸 건너뛰고 달리려고만 했듯이,

지금도 무엇을 건너뛰고 있을 것이다.

.

8초

.

어제 한 걸음, 오늘 두 걸음, 내일 세 걸음

걷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고,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는 것들 투성이일 것이다.

.

7초

.

그래도 달라진 건, 이제 자신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있든, 없든

지금은 무조건 달려야 한다.

.

6초

.

난 신발끈을 꽉 묶었다.

한 번 달려보자 하기엔 날려버린 시간이 너무 많다.

지금부터 계속 달린다.

.

5초

.

"도중아, 학교 가자!"

너무 또렷하게 들린다.

이건 환청이라 해도 속을 자훈이 목소리다.

.

4초

.

'펑'

불이 켜졌다.

난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

3초

.

땅에 스며든 체념의 붉은 피가 솟아오른 듯,

대문까지 레드카펫이 깔려있다.

방금 날아든 사르비아 꽃잎과 단풍잎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붉은 조명을 내리 비추고 있다.

.

2초

.

내 집에 흙, 풀, 나무, 지렁이, 여름햇살, 눈, 하늘...

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들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내 내면의 집에도 많은 감정들이 많은 날 살아 숨 쉬었다.

난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려고만 했다.

그러나 감히 내가 죽인다고 죽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것이다.

.

1초,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두울 수도, 환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이 골목길을 지나다니지 못하면,

앞마당과 뒷마당을 못 다닌다.

삶과 죽음 사이 골목길 어딘가에,

모든 생명과 감정들이 머무른다.

.

0초

난 레드카펫을 밟았다.


'후다닥'

그 순간, 옆집 안방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

난 재빨리 뛰어가 좇아갔다.


앞마당에 도착해서 좌우를 살펴보는데 안 보인다.

우리 집 부엌창문이 아까 닫혀있었는데, 열려있다.

난 현관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때, 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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