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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Mar 23. 2024

할머니는 힘이 세다 2

   나의 할머니를 기리며



   약국문이  힘겹게 열리며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온다. 반쯤 굽은 허리의 할머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가쁜 숨을 고르며 마스크를 내린다.  얼굴 거의 전부가 시퍼런 멍으로 뒤덮여 있다.  징그러운 뱀이 얼굴을 감싼 듯 처참해 보였다.  할머니는 거의 울상이다.

할머니, 어디서 넘어졌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약사님, 나 좀 살려줘요,  언덕에서 넘어졌는데, 하필 얼굴이 엉망이야.

닷새 후에  손녀딸 잔치에 가야 하는데 이 얼굴로 어찌 가누,

결혼식 못 간다 하니 손녀딸이 울고불고 난리야, 할머니 없으면 결혼식 못한다고...


  거의 실성상태인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소염제와 당귀수산 오일 치를 드렸다.

이 약 드시고 멍크림 꼭 자주 발라주세요, 그리고 당일날엔 비비크림 바르고 가세요, 그러면 멍도 많이 풀려서 사진 꼭 찍을 수 있을 거예요.

약국 밖을 나가는 할머니를 보고 든 생각은 요즘 저렇게 기특한 손녀가 있을까?  였다.

내리사랑이라고  손녀를 키운 할머니는 꼭  결혼식에  가고 싶을 거다. 하지만 요즘 MZ세대인 손녀가 할머니가 안 오면 결혼식을 안 올린다고?  할머니의  착각이 아닐까?  할머니에게 받을  유산이 많을까?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할머니가 환한 낯빛으로 약국에 들어선다.

약간은 수줍어하는 얼굴에 맛있어  보이는 곶감 세 알을 내 손에 쥐어 준다.

감사합니다.   손녀 결혼식은 잘 다녀오셨어요?   

약사님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아이들이 화장 곱게 해 줘서 하나도 흉하지 않았다오.

사진도 잘 찍고 손녀딸네  신도시 구경도 잘하고 왔네요.  

손녀딸이 할머니를 참 좋아하네요, 많이 이뻐하셨나 봐요.



   서산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한가한 오후,   할머니가 말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우리 손녀가 똑똑한데 대학 갈 때 지 아비가 부도가 나서 전문학교 밖에 못 갔어요.

늘 마음이 아팠지.  회사에서도 허드렛일만 하고 영 성에 차지 않았나 봐.

하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더라고.  물어보니 단기 해외연수를 다녀오면 좋은 기회가 있는데 연수 다녀올 돈이 없다고....      부모 형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가슴이 아팠지.

그러다 내 전세 보증금이 생각났다오. 내가 집을 줄여가면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살면 얼마나 살려나.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내 손녀 앞길을  터주어야지.

보증금이 오천 만원인데  절반을 손녀에게 내밀고 난 방 한 칸 작은데로 옮겼어.  손녀딸이 눈물을 글썽이며 연수를 떠났다오.     이년 후 돌아와선 좋은 데 취직하고 적금 들어 내 돈을 다 갚았지.  그리고 직장에서 좋은 신랑 만나 결혼도 하고....      그러니 내가  제일 사랑하는 손녀지.  이번에 가니 "할머니, 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하더라고.  이 늙은 할미가 무에가 좋다고....    


     할머니 이야길 들으니 얼굴도 못 본 손녀 얼굴이 보고 싶었다.  지원금을 받은 뒤 열심히 공부해 할머니의 사랑을 되갚은 속 깊은 손녀가 대견해 보였다. 거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손녀의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퍼주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왔다.  유산 때문에 가족 간에 칼부림도 나는 삭막한 세상이 아닌가. 약국문을 열고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당당하고 보기 좋았다.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몸이 약한 엄마는 동생이 태어나자  날 외할머니댁에  맡겼다. 추운 겨울날 허리 굽은 할머니는 따뜻한 대야에 더운물을 방으로 가지고 와 세수를 씻겨 주었다.  코도 풀어주고 양치도 해주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겨주었다.  그리곤 작은 소반에 흰 밥과 계란말이와 잘 씻은 하얀 김치를 먹기 좋게 잘라 가지고 오셨다.  난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할머니가 주는 밥과 사랑을 병아리처럼 야금야금 받아먹었다.  그렇게 날 사랑해 주신 할머니는 위 할머니처럼 내 결혼식을 보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가끔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이 마음이 황량하고 서글플 때,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받아먹은 할머니 밥생각이 난다. 세수시켜 줄 때 나던 할머니 냄새도 난다. 머리 빗겨 줄 때 느껴지던 할머니 손길도 생각난다.  그러면 서글픈 생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힘이 난다.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갈 때 어릴 때 받은 무조건적인 할머니의 사랑은 얼마나 힘이 센 걸까.  오늘따라 나도 내 할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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