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안 Mar 09. 2024

진고개 신사의 화양연화

 진고개는 명동에 있었던 고개로, 옛 중국 대사관 뒤편에서  세종호텔  뒷길까지 이어지는 고갯길이다.


 그 어르신이 약국에 들어섰을 때, 난 왜 진고개 신사가 떠올랐을까.  어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진고개 신사라는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던 모습 그대로였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고급 수제 양복에 안에는 더블 버튼 조끼까지 입고  중절모를 쓴 멋쟁이 신사였다.  성품도 자상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분이다.  약간 절룩이는 다리만 아니면 환자라고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민 대학병원 처방전에는  파킨슨 환자의 약목록이 적혀 있었다. 


 약을 조제하는 사이 그는 자기가 큰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고 했다.   5공, 6공 때 연분이 있던 인사들이 사업권을 주어서 용인에 큰 건물을 짓고 있다고 했다.  완공되면 약국 자리도 알아봐 주겠노라 한다. 남자들의 허세에 이골이 난 나지만 혹 진짜로 저 연세에  비즈니스를 해서 저렇게 풀 정장을 차려입을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약을 타러 올 때마다  정장을 차려입고 당신의 잘 나가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나 유복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서울의 명문대학과 미국의 유학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사업비로 하룻밤에 수천을 썼다는 둥, 아파트가 몇 채라는 둥, 이 사업만 잘 되면 당신의 자제들은 앞날 걱정 없이 살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허언인 줄뻔히 알면서도 그가 행복한 상상을 하는 게 보기 좋았다.


 처방전 약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그는 점점 말없이 약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막내아들과 같이 사는데 며느리가 어려 집에 있는 시간이  불편하다고 한다.  연세 많은 시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야 하는 어린 며느리는 또 얼마나 힘들까.  병세가 깊어질수록 말수도 줄어들고 그의 걸음걸이는 점점 균형을 잃고 느려져갔다.


 그의 늙고 쇠락한 모습을 보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생각이 났다.  출판사 사장이던 시절, 멋진 양복을 입고 우리에게 선물을 안기시던 그 당당한 모습,  회사가 부도나자 풀죽고 쇠약한 모습으로 노후를 보내던 나의 가여운 아버지....  시간과 함께 덧없이 흘러간  아버지와 그의  화양연화 앞에서  인생의 모든 생로병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하고 슬펐다.


 약국에 오실 때가 지나서 약국의 환자 프로그램에  이름을 입력해 보았다.

      

        보험자격을 상실했습니다.

      보험공단에 문의 후 조제하십시오.


마치 그의 조의 문자라도 본 양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상실 일자를 보니 지난번 약국에 들른 지 며칠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  수없이 겪는 환자와의 이별이지만  유독 마음이 쓰였던 환자분이라 더 애틋하고 가슴 아팠다.  


지금도 가끔은 그가 멋진 양복을 차려입고 약국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 같다.  배경음으로 옛 노래 진고개 신사의 음악이 깔리면서.....     


https://youtu.be/rIszEV_v8zg? si=Xpda0 L6 ZmatMvdnm

진고개 신사

         정말 오래된 노래죠?



이전 04화 개떡같이 말해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