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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Feb 24. 2024

할머니는 힘이 세다

약국의 육중한 셔터문은 내겐 늘 고역이다.  오래된 낡은 건물이라 힘든 건지, 나의 팔근육이 약한 건지 올리다가 다 올리지도 못하고 허리만 삐끗한 적이 많다. 그래서 약국직원이 결근이라도 하면 밀리는 약국일보다 셧터 올리는 게 더 큰 걱정거리다.


그날은 비도 온 뒤끝이라 뻑뻑한 셧터가 더  버티며 용을 쓴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며 올려도 물기 묻은 셧터는 올라가다 말고 서버린다.  


그때 뒤에서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올려줘?"

나보다 젊은 학생이거나 육중한 체구를 가진 남성을 생각한 나는 깜짝 놀랐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팔순 넘은 할머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 약국에 자주 오던 분이다. 할머니는  익숙하게 셧터 앞에서 두 팔을 벌리더니 헤라클레스처럼 단번에 그 무거운 셧터를 위로 드르르 올려버린다.  나보다 힘센 할머니를 보니  멋진 바디 볼더 같아서  우러러 보인다.  역시 할머니는 힘이 세다.  우리나라 할머니, 특히 우리 동네 할머니는 힘이 세다.


힘이 세다는 것은 육체적 근력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셔터를  올려준 할머니는 육체적인 힘이 세다. 힘만 세다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돕고자 하는 정신적인 마음도 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한 대한민국의 할머니다.  우리 동네에는  육체적 힘이 센 할머니 말고도  정신적 의미로 힘이 센 할머니도 많다

 



얼마 전에는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k가 약국에 왔다.  첫 월급 타서 할머니께 드릴 영양제를 사러 왔다고 했다.  할머니 영양제를 사러 온 k 가 대견하고 흐뭇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우리 약국에 오던 k는 늘 말이 없었다.  듬직하고 사려 깊은 눈매엔 남모를  우수가 있었다.

 

늘 말없이 앉아 있다가 조제받은 약을 들고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나갔다.  k의 할머니도 자주 약을 지으러 오셨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의 허약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위장이 약해 늘 처방약을 지으러 오셨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k에게 부모님은 없었다.  아마 고모네 식구들과 할머니와 같이 사는 듯했다.   한 자리에서 약국을 오래 하다 보면 남의 어려운 사연을 저절로 알게 되는 수가 많다.  k와 같이 사는 사촌동생들은 밝고 명랑해서 친형처럼 따르며 우애가 좋았다.   연로한 할머니의 건강이 걱정이었지 k는  열심히 공부하고  외면상으로는 잘 지냈다. 그런데도 난  k가 애잔해 보였고 마음에 걸렸다.   

 

늘 침착하고 밝지만 속 안에는 부모 없는 허전 감이 얼마나 클지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할머니와 고모가 잘해준다지만  저 아이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을 거라 짐작하며 잘 자라주기를 소망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이 지역에 위치한 보육원의 아이들을 본 뒤부터다.  소아과 옆에 위치한 우리 약국에 주로 오는 환자는 보통 아가들이다.  최소한 한 명의 보호자, 더 많을 때에는 서너 명의 보호자에 둘러싸인  소중한 아가들이  약국으로 온다. 그만큼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선생님 하나에 아기들 여럿이 오는 팀이 있다.    옷차림도 깨끗하고 청결상태도 좋아 보이지만 틀림없는 보육원 아이들이다. 번화한 서울역 근처 도심 한가운데 이리 많은 보육원이 있는데 놀랐다. 예전처럼 전쟁고아도 아니고 어디서 이렇게 많은 아가들이 버려지는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나라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어도 보육원 아이들은 늘 정에 굶주려 보육교사를 여럿이 손잡고 매달려 다니기도 했다.   늘 버려진 아이들이라는 선입관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같이 오던 침착한 k가 더  대견하고 흐뭇해 보였나 보다.   지푸라기처럼 늙고 가녀린 할머니의 손길로 k는 의젓하게 자라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것이다.  힘이 세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부모 없는 손주를 마음으로 키워내고 길러준 할머니들이  진정 힘이 센게 아닐까.


경찰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k 가  돌아가신 할머니 대신 다른 할머니들을 돕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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