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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Feb 17. 2024

아이 어른

윤이는 빨간 뿔테안경을 쓴 여섯 살 여자아이다. 밑으로 쌍둥이 남동생 둘이 있는 맏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세 꼬마가 약국 문이 부서져라 뛰어 들어온다. 소아과 옆에 있는 우리 약국은 늘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이자 쉼터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느라 힘들었던 아이들은, 장난감 목마나 붕붕카를 보자마자 잃었던 환한 미소를 되찾곤 한다.

 

 약을 짓는 동안 세 꼬마는 장난감 차를 타고 이리저리 약국 안을 휘젓고 다닌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빠가 들어온다. 세 아이의 아빠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 그는 낮술을 했는지 불과한 얼굴로 아이들을 돌본다. 약을 전해  받고 나가려는 순간 아이들의 손에 꽤나 비싼 장난감 비타민이 하나씩 들려있다. 순간, 나는 아빠가 다른 흔한 부모들처럼 "안돼, 필요 없잖아" 하며 비타민을 뺏기를 바랐다.


윤이도 남들처럼 엄마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엄마는 보이지 않고, 어린 아빠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아왔다. 형편도 나빠졌는지 보험도 의료급여로 바뀌었다. 약국에 있다 보면 의도치 않게 환자들의 숨기고 싶은 어려운 사연도 저절로 알게 될 때가 있다.그런 형편에, 아이들이 고른 비타민은 가난한 아빠에겐 꽤나 큰 부담이다.

 

하지만 아빠의 마음이 여려서일까, 아니면 낮술을 해서일까, 아빠는 차마 거절을 못하고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벌써 한껏 신이 나서 들떠있다. 한참 주머니를 뒤져도 돈을 찾지 못한 아빠는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집이 가까우니 잠깐 다녀오겠다'라고 하고 나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약국 안을 내리비추던 희미한 겨울 햇살이 사라지고 사위는 어둑해져 갔다. 유아원 차에서 내리는 어린아이들은 찬바람을 피해 기다리던 엄마의 품으로 강아지처럼 뛰어 안긴다. 아빠가 오기만을 한없이 기다리는 아이들은, 모이를 물고 올 암탉을 기다리는 병아리같이 축 늘어져있다. 그가 늦어지자 고민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집이 가깝다고는 했으나 아직 안 오는 것으로 보아, 돈을 빌리러 다니거나 술김에 이 상황을 잊은 게 틀림없다.

 

 머릿속으로 복잡한 상념이 오고 가면서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 들었다. 사람은 크고 중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보다 오히려 사소한 일에 고민을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꼭 필요한 약이 아니면 외상은 안 주는 것이 나의 신조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대낮에 술을 마시고 온 어린 아빠를 믿기에 난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 이대로 비좁은 약국에 아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상처 입을까 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이야기했다.

"윤아, 아빠가 좀 늦나 봐. 너희들도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 하니까, 그 장난감 비타민은 아빠가 와서 다시 사주도 록 내려놓으렴. 대신 이 라바 비타민을 하나씩 줄게!" 의외로 아이들은 순순히 장난감 비타민을 내려놓고 내가 준 비타민을 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난 직원에게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주라고 했다.


 아이들의 축 늘어진 어깨와 풀 죽은 얼굴을 보면서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들에게 동정심을 베풀어야 했나 하는 자괴감과, 떳떳하게 물건 값을 치러야 한다는 교육론이 엇갈리면서 마음은 점점 시끄러워져 갔다.

 



간간이 오는 조제손님을 맞으며 약국 시계는 느릿느릿 흘러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윤이 아빠가 의기양양하게 양손에 아이들을 안고 개선장군처럼 약국 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직원 말로는 집으로 가던 길에 윤이 아빠를 만났다고 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의 손엔 어렵게 구했을 것 같은 지폐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지치고 피곤한 그의 모습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요즘처럼 물자가 풍요로운 시절에도, 가난하고 고단한 아버지의 삶은 그들의 초라한 어깨를 짓누른다. 시지프스의 돌처럼 힘든 가장의 의무를 가진 그가, 돈을 구하러 찬바람을 헤치고 다녔을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내려놓았던 장난감 비타민을 아이들의 품에 다시 안겨주었다. 아이들은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장난감을 품에 안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 순간 아빠는 루돌프 썰매를 끌고 온 산타클로스였다. 내가 선의로 그냥 주었다면 얻지 못했을 가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마음 밑바닥에 부유하고 있던 더러운 알갱이가 안개 걷히듯 사라지면서, 나 또한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함을 느꼈다. 그에게 감사하고픈 마음이었다우렁찬 합창으로 인사를 하며, 윤이네 가족은 약국 문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그런데 몇 발짝 가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며 윤이가 뛰어 들어왔다. 작은 손에는 아까 내가 준 라바 비타민을 그대로 쥐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윤이가 말했다.

 “동생이 세알이나 먹어서 이것밖에 안 남았어요. “하며 남은 27개의 비타민을 수줍게 돌려주었다. 그냥 준 것이니 먹어도 된다고 웃으며 말하자, 윤이는 초롱한 눈망울로 대답했다. "동생이 먹겠다고 하는 걸 내가 안 된다고 했어요." 뭘 더 설득할 사이도 없이 윤이는 뛰어나갔다.


약을 짓는 동안 흔히 쓰는 약인데도 찾지를 못하거나 실수를 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보니 그건 윤이에 대한 나의 미안함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여섯 살 꼬마가 값을 치르지 않은 비타민을 되돌려주는 올곧은 생각을 한 것이다 어른 중에도 서비스 비타민을 한 움큼 가져가는 몰지각한 인간도 있다. 결손가정의 아이니까 당연히 감사하게 받을 거라는 나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준 건 돌려받은 27알의 비타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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