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에서 근무하는 약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소통이라고 대답한다. 정확한 조제와 복약지도는 전문가로서 당연한 일이므로 논외로 한다.
약국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방문한다. 주로 처방전에 의해 조제약을 받으려는 환자나 일반약을구입하는 고객이다. 우리 약국은 도심 한가운데 있지만 쪽방촌과 일반 주택도 같이 공존하는, 빛과 그늘이 같이 존재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연령층도 한 살 아가부터 백세 노인까지, 직업군도 회사원, 상인 등 다양하다.
특이점은 서울 시내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처럼 삼세대가 사는 집이 많다는 것이다. 같은 집에 살지 않아도 근처에 친정이나 시댁, 혹은 형제들과 왕래가 잦아 마치 시골에서 느끼는 끈끈한 정이 흐르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만성 질환을 앓는 노인층 환자도 많은 편이다. 소통의 부재는 주로 이 노인층에서 발생한다.
코로나 시대 전에는 당뇨나 혈압약 같은 만성질환자 약은 먹기 좋게 약포지에 넣어 조제해 주었다. 약사의 손이 많이 가지만 환자의 복용편리성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투약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를 맞고 나서는 환자들이 감염 우려로 미국처럼 약통으로 받기를 원한다. 약사의 일손은 줄어들지만 복약지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할머니, 이 약 조제해 드려요? 아니면 통으로 드려요?"
"조제해 줘요 “
내가 열심히 조제한 약을 보자 역정을 낸다.
“아니, 약이 왜 다 이렇게 됐어요? “
"할머니가 조제해 달라고 하셨지요?"
"아 , 난 그게 조제인 줄 몰랐어. 그냥 통으로 줘요 “
분명 한 공간에서 같은 한국어로 물었는데도 소통의착오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 뒤로 난 처음 오는 노인 고객에게는 약포지를 들고 나와 자세히 설명하고 원하는 방법을 물은 뒤 컴퓨터에 기록한다.
젊은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어르신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분도 꽤 있다. 복용하는 약이 여러 종류라 봉투 표지에 한글로 써주어도 모르는 분이 많다. 이럴 때는 못 그리는 그림이라도 아픈 부위를 그려주면 찾기 쉽다고 좋아하신다. 무릎 관절염에는 다리 그림을, 중이염 약 봉투에는 귀 그림을 그린다. 심지어는 치질약 봉투에 엉덩이 그림을 그려 준 적도 있다.
약사는 약 광고 프로그램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 화장실을 며칠째 못 가는데 약 하나만 주세요."
변비약 종류도 수십 가지라 적당한 약을 추천해 주면 이러는 분이 꼭 있다.
" 텔레비전에 김영옥 할머니가 선전하는 약, 그거 없어요? "
"아. 메이ㅇㅇ요? "
환자가 지목하는 약이 증상과 너무 다르면 다른 약을 권해드리지만 광고에 민감한 환자에게는 빠르게 원하는 약을 준다. 유산균과 식이섬유가 많은 음식을 꼭 먹으라는 말도 같이 덧붙인다.
"비타민 하나 주세요"
아, 비타민은 제형 종류만 해도 정제, 액제, 산제, 츄잉제 여러 가지다. 머릿속으로는 수백 가지의 비타민이 떠오르지만 " 물약 비타ㅇㅇ 찾나요? " 하면 반 정도는 광고하는 그 드링크를 지목하는 게 맞다.
진짜 소통의 부재는 이럴 때이다.
" 머리도 아프고요,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되고..... 주절주절"
한 십 분간 언제부터 아픈지 어떤 사연으로 아픈 지 한 달 전 이야기부터 늘어놓다가 약사가 이틀 분 정도의 약을 권하면
" 아, 그냥 활명수 하나 줘요.." 한다.
뻘쭘해서 생각한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많이 아픈데 활명수 하나 먹고 날려나?
내가 권한 약이 신뢰가 안 가나? 나름 경력 수십 년의 약산데?
아니면 아픈 설움 다 이야기하다 보니 아픈 게 다 낳았나?
아니면 보험이 안 되어서 약값이 비싼가?
이제는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를 보면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 감이 잡힌다. 자주 오는 환자는 당연히 머릿속에 그의 처방전과 자주 구입하는 약이저장되어 있다. 처음 보는 낯선 환자라도 나름 대화하는 요령이 생긴 것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약사가 된 것이다.
이런 소통의 문제는 비단 약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모든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한다. 심지어는 매일 보는 가족 사이에도 소통이 안되어 느끼는 불행한 일이 많다.
약국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가장 큰 숙제는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