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실 안에 아가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약을 지을 때 아가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빨리 약을 짓게 된다.
울음소리가 마치 빨리 약을 달라는 재촉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우는 아가를 절절매며 달래는 초보 엄마도 보기 안쓰럽다. 아가를 안고 둥둥해주기도 하고 장난감을 손에 쥐어 주기도 한다. 그래도 아가의 울음소리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이 우렁차다.
병원에서 귀나 코파기를 하는 괴롭힘을 당한 아가들은 억울하고 분한 얼굴을 하고 너무너무 서럽게 울어댄다.
이럴 땐 다 지은 약을 들고나가면서 아가의 손에 뽀로로 비타민을 쥐어 준다. 비타민을 손에 쥔 순간 찌푸렸던 얼굴은 금세 천사의 얼굴이 되고 사정없이 흘리던 눈물방울은 사라지고 환한 반달눈이 된다.
이런 환상의 마법 같은 약이 어디 또 있을까. 먹지도 않았는데 손에 쥔 것 만으로 아가의 울음을 달랠 수 있다니.....
아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을 하고 비타민을 쥐고 있다.
세상살이에 지쳐 위로가 필요한 어른들에게도 이런 환상의 약이 어디 없을까? 손에 쥐기만 해도 걱정거리가 다 사라지고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약....
'행복의 기원'의 서은국 저자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한다. 적지 않은 세상살이를 한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인이 된 내가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본다.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새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가족 여행을 할 때,
아이들이 명문대에 입학했을 때,
약사 문예에 내 글이 대상으로 뽑혔을 때.
성취로 이룬 행복의 강도는 높았지만 지속력은 그리 크리 않았다. 행복한 순간이 지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내가 가진 것들은 당연히 내 것이 되어 무덤덤한 보통의 그것이 되어버린다. 또 이런 일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오지 자주자주 온다면 그 기쁨이 반감될 것이다. 어른이 된 나는 일상에 매몰되어 더 강도 높은 행복을 위해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의 시간을 되돌려 유년의 내가 행복했던 시간을 되돌려 본다.
다섯 살의 내가 추워할 때 아빠가 넓은 품에 꼭 안고 체온으로 따스하게 나를 녹여주었을 때,
오색찬란한 회전목마를 아빠하고 둘이 탔을 때,
엄마가 새알 초콜릿을 사다 주었을 때,
예쁜 보온 도시락통에 엄마가 맛있는 계란말이를 담아 주었을 때,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있는 사과를 먹을 때.
유년에 느끼는 행복은 아가들이 뽀로로 비타민을 보고 느끼는 행복에 더 가깝다. 어른이 될수록 기대치가 높아져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즈음의 내게 뽀로로 비타민이 주는 마약 같은 위로는 무얼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로린이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로린이는 5살 된 장모 치와와다. 로린이는 내가 겉옷을 걸치면 산보 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면 코를 바름 발름해가면서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기 시작한다. 가슴줄을 채워주고 집밖으로 나가면 녀석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신이 나서 온 세상의 냄새를 다 맡고 다닌다. 겁이 많아서 자기보다 덩치가 큰 강아지를 보면 미리 짖어 버려 쫓아버리고는 날 위해 짖은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피톤치드 향 나는 봄 숲길에서 로린이와 하는 산책은 내게는 황금의 시간이다. 밤이 되면 수목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어슬렁 거리는 동네 고양이도 만나고, 밤늦게 퇴근한 아빠들이 아들과 다정하게 타는 자전거 소리도 들린다. 더구나 이런 잔잔한 행복은 매일매일 느낄 수 있다. 이런 일상의 행복이야말로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행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