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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pr 20. 2024

구토

   조제실에서 약을 짓다 보면 가끔  불쾌한 냄새와 함께 보호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미안하지만 휴지 좀 주시겠어요?    

아기가 토해서....

숙련된 직원은 비닐봉투와 함께 티슈, 물티슈를 재빨리 갖다 준다.  보호자가 아기를 진정시키고 어지러운 구토물을 대충 치우면 대걸레와 알코올 소독수를 가져온 직원이 마무리 청소를 한다.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놓다 보면 약국 내의 작은 소란은 가라앉고 다시 평화로운 약국이 된다.

   얼마 전에 오신 할머니 한 분은 직원의 빗자루와 걸레를 뺏다시피 하면서 "내 새끼가 어지럽힌 건 내가 치워야 해요" 하면서 걸레질을 수십 번도 더했다. 보는 우리가 죄송해서 걸레를 빼앗으려 해도 막무가내로 청소를 했다. 손주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할머니의 인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와는 다르게 아주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수년 전 중학생 여자 아이와 오빠로 보이는 고등학생이 들어와 처방전을 내밀었다.  처방대로 위장약을 지어주니 오빠가 느닷없이 화를 낸다.

동생은 알약 못 먹는데 왜 알약이 나며 가루약으로 해달란다.

다음엔 조제 전에 미리 말을 해달라며 다시 약을 조제해 주었다.  6세 미만 아기나 특별히 갈아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으면 보통은 정제로 조제를 하기 때문이다.

마침 오후 5시 무렵이라 약국이 제일 바쁜 시간이다.

첩첩이 쌓인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조제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오빠는 지금 약을 먹으라느니

동생은 구토가 나서 못 먹겠으니 이따가 먹겠다고 서로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오빠의 압박에 억지로 가루약을 먹은 동생은 구역질과 함께 토사물을 약국 온 바닥에 분수처럼 토하고 있었다.

옆에 같이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이 토사물을 피해 밖으로 나가고

직원은 토사물을 치울 비닐봉지와 휴지를 오빠에게 준 뒤

계산과 나머지 약국일을 하느라 청소를 같이 돕지 못했나 보다.


환자들이 다 빠져나간 뒤 그 직원은 문을 활짝 열고 약국 온 바닥을 청소하느라 퇴근도 늦어졌다.

어쩌면 속이 좋지 않은 동생에게 가루약을 억지로 먹이는 그 학생의 불손한 태도가   청소를 도와줄 마음이 없어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저녁때  중년 여자가 목청을 드높이며 따지고 들었다.

어제 우리 아이들이 여기서 토했는데 청소는 우리 아들이 다 하고 아무도 안 도와주었다고.

토사물은 약국에서 치워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간다.


  앞의 경우와 뒤의 경우의 차이는 무얼까?

여럿이 있는 대기 장소에서 환자가 토하는 불상사는  늘 있는 일이다.

만일 환자가 혼자 와서 자기 자신을 수습할 능력이 안되면 그 영업장의  직원이나 옆사람이  그 환자를 돌보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호자가 왔을 경우 그 처리를  보호자가 해야 한다고 본다. 토사물은 모두 혐오하는 배설물이고 보호자 외에는 모두 다 처리하기를 꺼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의 할머니는 내 새끼이므로 남에게 더러운 것은 내가 치워야 한다는 마음이다

반대로 집에서 먹겠다는 동생의 마음을 무시하고 억지로 약을 먹여 동생을 토하게 한 것은 그 학생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인 청소는 그 학생의  약을 먹이려는 의도가 아무리 선의라 해도 그 학생이 해야 옳다고 본다.




식당이나 택시 안 혹은 여럿이 모인 공공장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그 학생의 엄마처럼 맥락을 모르는 경우 아주 쉽게 그 영업장의 태도를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업 마인드가 갖춰진 영업장에서 직원들의 싸한 반응이 느껴진다면 혹 내 태도나 언행에 문제가 없었는가 뒤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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