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숲
길을 걸었다.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봄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이 잎을 꺼내고 있었다. 새 눈을 뚫고 나온 새싹들이 세상에 무언가 말을 하고 싶다는 듯이 퍼져 나갔다.
나는 그 푸르름을 질투했다.
나무들은 다시 태어나지만 나는 늙고 언젠가는 죽어서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무들도 죽는다. 해마다 새롭게 태어날 뿐이다. 나무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과거는 죽은 것이다. 지금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라고.
나무는 잎을 흔들었다.
숲의 새들은 한가롭게 노래하면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짝을 찾는 수컷은 멋지고 강한 소리로 노래하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깃을 세워 암컷을 유혹하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쏜살같이 날아다녔다. 숲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은 바람과 어우러져 은빛 물결을 만들어냈다.
한적한 숲길의 고요함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큰 외침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길 위에 서서 귀 기울였다. 맞은편 골짜기에서 들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짐승의 소리는 아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섰다.
들려오는 외침은 점점 가까워졌다. 사람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혼자 큰 소리를 내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산속에서 왜 소리를 지르는지 궁금했다.
언덕을 넘어서 비탈진 외길을 내려갔다. 긴 나무의자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의자가 가까워졌을 때 소리를 지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든 남자가 길을 벗어나 바위 위에서 건너편 산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듯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을 반복하여 외치고 있었다. 절규하는 듯했지만 그 소리에는 애잔한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는 외침을 멈추고 바위에서 내려와 나무 의자 옆에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묻지 않았는데 그 남자는 먼저 말을 꺼냈다. 자신이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매일 산속에 들어가 몇 분 동안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그러면 기분도 한결 좋아지고 암세포도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잠시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구미에서 장사를 하다가 어느 날 암이 몸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던 사업을 모두 접고 항암화학치료와 자연치유의 방법을 병행하면서 치료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항암 주사를 맞을 때만 하루 이틀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온다고 했다. 이곳에 산지는 1년이 넘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나의 표정을 보고 남자는 웃었다. 이곳에서 장기적으로 기거하는 분이 여럿 있다고 했다. 아주 여기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대학 교수직을 마치고 암이 찾아온 것을 알고 난 뒤에 부인과 함께 몇 년째 살고 있는 분도 있다고 하면서 이곳이 몸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적합한 장소라고 했다. 자기도 많이 좋아졌는데 얼마 전에 다시 재발의 기미가 보여서 당분간 더 머물 거라고 했다. 그는 자연치유력을 높이고 싶다면 자연과 친해져야 하고 그 속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 번 내 몸에서 자리를 잡은 암세포는 부위를 잘라내는 절제 수술적 치료로는 완벽하게 암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재발률이 높고 다른 부위로 전이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항암치료로 몸과 마음의 면역력이 바닥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선 먹는 것이 어렵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과 어울려 살면서 자연치유의 힘을 기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남자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분은 우연히 마음 수양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가 따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매일 산을 오를 때마다 하루에 두 번씩하고 있다고 했다. 감사함과 간절함이 있다면 훨씬 빠르게 치유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내 몸이 생명력을 되찾고 모든 기능들이 활성화되어 면역력이 강해지면 암세포라는 놈도 힘을 잃고 숨죽여 있거나 항복하고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 말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을 두루 여행하던 어느 현자가 시골마을을 지나다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현자에게 매달리며
"제발 저의 집으로 가서 병든 아들을 좀 봐주십시오. 당신은 현자이니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현자는 여인의 집으로 갔다. 아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소식은 빠르게 마을로 퍼져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이 여인의 집으로 몰려왔다.
현자의 기도를 듣고 있던 한 남자가 불쑥 말했다.
"약초도 소용이 없었고, 무녀도 다녀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거늘 당신의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그 말을 들은 현자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당신은 기도를 모르지 않소, 바보 같은 놈!"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분개했다. 욕을 퍼부을 찰나 현자는 조용히 말했다.
"내 말 한마디가 당신을 그렇게 분노하게 만들었다면 이 기도도 치유의 힘을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마음속에서 하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어도 자기 자신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시키고 어떤 단어는 기도처럼 마음의 이랑에 떨어져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부패와 발효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해로운 물질과 이로운 물질로 나뉜다.
그분의 외침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가끔씩 숲에서 마주쳤다.
늘 밝은 얼굴로 다가와 먼저 몸 상태를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분에게서 에너지를 받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사랑합니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그분의 외침은 주변의 공기를 진동하고 파장을 일으켜 숲 속을 울렸다. 그 울림은 숲을 지나 내 마음까지 와닿았다.
그분의 순수하고 맑은 마음은 자연에게 받은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그분이 자연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멀리 숲 속에서 들려오는 그분의 외침은 아름다운 대지의 향기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나도 외쳤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고요 속에서 외치는 사람과 이 매혹적인 숲과 그리고 나에게.
<제목 배경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