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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hbluee Oct 28. 2024

남대문 아동복 골목에 우리 딸 공주님 만들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갈치를 먹을까? 칼국수를 먹을까?를 곁들인...

우리 집에는 공주님이 한 분 계셨드랬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공주님이시긴 하시지.(물론입죠 후...) 현재는 얌전히 파자마로 갈아입고 주무신다면, 그때는 실내복으로 드레스를 고집하셔서, 잠자리를 봐 드릴 때 가끔 애를 먹게 되기도 했드랬다.


 프릴과 레이스가 그녀의 정체성이시던 그 시절.

 유치원 체육복 웃두리에 'thl'스루(시스루.띠스루라고 읽어주세요) 자수레이스 스커트를 곁들여 입으시는 코디를 시도하시기도 하셨다. 생각해 보니 유행을 나름 선도하셨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스웻셔츠에 망사스커트가 유행하기도 했으니까. 뭐, 그날 그 옷을 입고 체육을 하셨다는 게 조금 단점이긴 했다.(좀...일까?) 당시 유치원 선생님들께는 심심한 사죄의 말씀 올려본다.(보실리가 없으시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공주님께 건의를 안 한 건 아니라는 점. 하지만 본인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으셨다는 점.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 입죠.



사진: UnsplashCate Bligh


점점 왕국의 드레스가 소진되어 가서, 공주님이 차려입으시기가 어렵게 되어, 

일등시녀인 내가 직접 나서서 의복을 구하러 갈 지경에 이르렀다. 

백화점에서 구해드리려니 기둥뿌리 제대로 뽑힐 가격이라, 알음알음 찾아낸 보세 브랜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보세브랜드들의 대다수는 남대문아동복골목에 입점해 있었다.


문제는 아이 등원과 하원사이,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점.  잠시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허겁지겁 아이를 등원시키고 바로 출발한 터라, 아침은커녕 물한 모금도 못 마신 상태로  몇 바퀴씩 돌면서 매의 눈으로 쇼핑을 마치고 나면...


아. 배가 고프다.




이쯤 되면 고민이 된다. 뭘 먹지? 오늘 가장 중대하고 신중하게 내려야 할 결정이다.


진정해 인간 초집중을 해라

사진: UnsplashKido Dong


 아동복 골목에서 나와 가방 팔고, 그릇 파는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 길을 지나고 나면 약국들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영양제를 저렴하게 팔아서 인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그 맞은편에 귀여운 갈치그림이 있고 갈치골목이라고 쓰여 있는 좁은 길이 있다. 그쪽으로 쏙 들어가면 구불구불 미로가 펼쳐져 있다. 

 

 입구부터 고소한 냄새에 홀릴 것이다. 가스 탁탁탁 하는 소리. 고소한 기름 냄새. 


라떼는 말이야. 갈치가 엄청 저렴한 생선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맨날 해주시던 게 갈치구이였는데, 부드러운 갈치살에 미원을 뿌린 것처럼 감칠맛이 자르르르 돌아서 자꾸 입에 넣고 싶었다. 꽤나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는데도 따가운 줄도 모르고 조막손으로 야무지게 살을 발라먹는 그 모습을 아버지가 엄청 귀여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갈치구이나 조림 한 번 사 먹을라 치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용기 내서 사 왔다가 요리를 실패하면 많이 슬퍼할 가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갈치조림 1인분에 12000원 정도. 게다가 조림을 시키면 갈치튀김이 따라 나온다. 얇아서 과자처럼 바삭하게 부서지는 게, 두툼한 살이 잔뜩 있는 갈치구이보다 나는 이게 더 맛있다. 바짝 튀긴 거라 뼈째 아작아작 씹어먹을 수도 있다. 게다가 위로 폭삭하게 올라온 계란찜도 서비스다. 진짜. 내가 마실 수만 있다면 소주 한 병 뚝딱. 할 상차림인데. 양은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갈치 두 토막에 빠알간 양념, 그리고 갈치 밑에 깔린 무 두어 조각 정도. 아. 그 새빨간. 정말 새애빠알간. 하아. 새빨간 냄새가 코 끝에!!!

 갈치 한점 무 한점 밥 한 수저. 삼박자가 입 안에서 사정없이 어우러진다. 바쁜 손놀림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궁채, 열채 삼아 굿거리장단 자진모리장단 다 쳐내고 한 상을 다 비워내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기도 한다. 손으로 스윽 닦아 내고 보면 어김없이 배가 튀어나와 있다. 미리  긴 웃옷을 입길 다행이지. 두리번. 두리번. 사람들 몰래 바지 단추 하나 푼다. 아무도 모를 거야. 음.


사진만 봐도 군침이 사악 도누. 그쥬?

자, 이번엔 아동복 골목에서 위로 올라가 큰길 따라 회현역 쪽으로 가보자. 5번 출구 언저리 즈음 만두 파는 가게들 사이를 잘 살펴보시길. 시력을 3.0 정도로 높여 초집중하면 칼국수 골목이라는 간판이 보일 지도. 무언가 수상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면  그곳이 맞다.


  비닐로 된 비밀의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면 양 옆으로 푸드코트처럼 좌아악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그렇지만 모두 같은 걸 팔고 있다. 테이블에는 알록달록이 야채들이 커다란 양푼에 터억 터억 시원하게 놓여있는데, 그 앞에 작은 바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묻고 분주히 식사를 하고 계신다. 자 이제 좀 얼굴에 뻔뻔함을 장착하고 들어가야 한다. 덩치 큰 아저씨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칼국수 하나요."


어라. 그런데 웬 냉면이 조금 담겨 나온다.


"어? 저, 냉면 안 시켰는데요."


 아주머니가 바쁜 손놀림을 하다 말고, 양념 묻은 손을 툴툴 터시면서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신다.

칼국수 시키면 냉면 공짜
보리밥을 시키면 칼국수+냉면 드립니다.


초보 티가 팍팍 나는 순간이다.

이어 소박한 칼국수 한 그릇이 나올 것이다. 금방 금방 나오니 얼른 해치우고 일어나기 좋다. 멸치 육수에 유부, 김가루 한 줌, 매콤한 다대기가 무성의하게 착. 부드럽고 쫄깃하고 넓적하지만 얄부당한 칼국수 면에 툭 툭 툭 올려놓은 고명들을 젓가락에 휘휘 감아 후후 불어 한입 한입 밀어 넣는다. 매콤한 맛뵈기 냉면도 한 입 먹고, 칼국수도 한 입 먹고. 가격은 8000원. 싸다!


적당히 조미료가 들어가 있는 바로 그 맛. 

입 안에 감칠맛이 사악 돈다. 


툴툴 털고 일어나 비닐문 열고 나오면 바람이 시원~ 하게 느껴진다. 물론 여름은 제외.

역시나 터질 듯한 바지지퍼를 간신히 채우고 배를 퉁퉁 두들기며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양반집 심부름 갔다가 일이 빨리 끝난 돌쇠가 시켜 먹던 국밥이 이런 맛일까. 

공주님이 기뻐하실 걸 생각하니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쇼핑한 드레스를 양손에 주렁주렁 들고 어깨를 활짝 편다. 어헉. 배꼽이 튀어나올 것 같다. 


자아. 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배가 아무리 불러도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야채호떡 노점. 시간이 모자라면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 기름기가 자글자글 하게 둘러진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호떡. 얼른 하나 받아서 바로 베어 물면? 당신은 하수. 엄청 뜨겁기 때문에 종이컵에 담아준 호떡을 호호 식혀야 한다. 이즈음 되면 애데렐라 시간이 촉박하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버스 안에서 한 입. 온도가 딱 알맞다. 호떡 안에는 꿀이 없다. 잡채가 들어 있다. 입 안에 기름지고 바삭한 겉면과 부드럽고 짭짤한 당면이 가득 찬다. 두 개의 맛의 조화를 자꾸 느껴보고 싶어서 부지런히 턱을 움직인다. 없어지는 게 아쉬운 맛! 


꽤나 분주했던 오전시간이 지나가고 공주님을 뫼셔야 할 오후 일정이 빡빡하게 기다리고 있기에 남대문 명물을 우물우물 입속에 넣은 채로 살짝 잠을 청한다. 입술이 바셀린이라도 바른 양 번드르르하다. 눈을 감으며 생각해 본다.


공주님이 만족하셔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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