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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20. 2023

쌤은 자존감이 높아서 좋으시겠어요.

엥? 내가?

언제부턴가 종종 듣던 얘기 중 떠오르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자존감'이었다.

단 한 번도 골똘히 고민해 본 적도 없는 키워드 '자존감'.




내게 이 이야기를 했던 친구는 이제 막 고3이 된 친구.

그 친구는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다리는 껄렁껄렁하게 떨고, 얼굴은 하얗고, 아이라인은 매우 두껍고, 껌은 쫙쫙 씹으며 말 끝마다 욕을 붙이는, 소위 말해 '까진' 고3이었다.

다른 학원을 다니다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얘기할 테니까.


"어디까지 배웠는지 기억해?"


"코드 위에 멜로디 쓰는 거 까지 했어요."


"아, 곡 쓰는 거 말고 화성학은 따로 안 했었어?"


"그런 거 안 했는데요? 자작곡은 있어요."


까칠해서 말 한마디 걸기가 무서웠다.


"음.. 그렇구나. 그럼 자작곡 한 번 들어볼까?"


"지금요?"


"응, 연주하면서 불러봐."


"틀려도 돼요?"


"당연하지. 편하게 불러봐.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피아노를 하나씩 누르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친구를 짝사랑했다는 노랫말이었다.

고3이 불러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풋풋하고 귀여웠지만 두꺼운 아이라인을 보면 귀엽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는 어려웠다.




"오래 배운 거 같은데?? 얼마나 했어?"


"3년 좀 넘게?"


"짧은 시간은 아니네.. 이거랑 다른 스타일 노래도 있어?"


"아니요. 이게 끝이에요. 어차피 이걸로 대학 못 가니까 재수 하라던데요. 쌤 저 대학 보내주실 수 있어요?"


갑자기 더 무서웠다. 저 눈으로 자길 대학에 보내줄 수 있냐니. 못한다고 하면 잡아 먹힐 기세였다.

그 학원에서 나오게 된 이유를 자연스레 알게 됐다. 3년이 넘는 시간 배웠지만 또 재수를 하라니..


"보내 줄 수 있는데 너가 그 가면을 벗어야 하겠는데? 시켜서 하는 노래도 좋지만 너가 하고 싶은 노랜 이게 아닌 거 같아. 모든 게 부자연스러워 너무나도. 보는 내내 너무 불편해. 넌 어때?"


"잘 모르겠는데요. 안 불편한데요."


"그렇구나. 너가 불편하지 않다면 다행이야. 화성학부터 해보자."


화성학 수업부터 시작했다. 나는 이 친구에게서 알 수 없는 불편함, 불안함을 느꼈고 살얼음판 같은 수업 시간이었다. 화성학도 잘 따라왔고 피아노도 곧 잘 치는 친구여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3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그 친구가 먼저 얘길 시작했다.


"쌤은 왜 과목마다 돈 안 받아요?"


"나?? 가르치는 사람이 나 하나인데.. 과목마다 돈을 다 받을 필요가 있나?"


"학원은 똑같은 쌤이라도 과목 추가하면 돈 더 내잖아요."


"아~ 학원은 그렇지. 근데 어차피 우리는 개인레슨이니까. 괜찮지."


"쌤은 좀 이상한 거 같아요. 돈도 더 안 받고, 틀려도 나가라고 안 하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맛있는 거 사줘서 좋다는 말 하고 싶은 거야? ㅎㅎ"


"쌤은 자존감 높아서 좋겠어요. 이상하다고 말하는데도 웃고. 저는 그냥 다 싫거든요"


"엥? 내가? 나 자존감 높은지 전혀 모르는데?? 자존감 높은 게 뭔데?"


"그냥 쌤 같은 거요."


"너가 나보다 자존감 높은 부분이 있고, 나도 너랑 다르게 어떤 부분에선 높을 수도 있고, 컨디션에 따라 또 다를걸? 오늘은 떡볶이 먹을래??"



우리는 그 이후로 정시 실기 시험을 볼 때까지 무한으로 달렸다. 그 친구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보일 때마다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가보자며 끌고 나갔다.

그 친구는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20대 초반에 캠퍼스를 누비벼 연애도 하고 음악도 하며 지냈다.

우여곡절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만났고, 떡볶이를 먹었던 화려한 봄날을 회상하곤 했다.


실용음악과에 진학을 하려면 꽤나 개성이 강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어딘가 모르게 유니크해 보이고, 약간은 신비로우면서 나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며 어릴 때부터 훈련을 시킨다. 아이가 자기를 잃고 어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자라다 보니 어떻게 병들어가는지 모르는 채 어른이 되어간다.


이 친구는 더 이상 음악을 하지도 않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다니는 20대 후반이 되었다. 그때도 예뻤지만 지금은 더 예쁘다. 얼굴도 마음도.


무언가에 미쳐서 성취를 한 사람을 느낄 것이다. '자존감'은 그냥 그날의 나의 컨디션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_ Colos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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