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건 지독하고 지순한 집중력과 좌절할 일 없는 지속력의 연속이다. 세상의 융단폭격에도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세속에서 탈피한 사람 같은 초월성, 부끄러움도 무릅쓰는 뻔뻔함이 요구된다. 적어도 겉으론 그래야 한다. 이 부분에서 난 자질 부족이다. 오프라인에서 브런치 주소가 공개됨을 겁내고 ‘우르르 쿵쾅’ 쏟아질지 모르는 세상의 융단 폭격을 피해 썼다가도 삭제하고 숨어든다. 진실의 모낭이 있다면 마주하기 불편하고 쉽게 집기 어려운 해삼이나 멍게 모양일 거다. 맛나지만 보기에는 불편하다. 동성연애에 대한 비판글을 쓰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보면 차별의 글이지만, 혀의 돌기가 동성애자를 비판한다고 이성애들조차 나와 함께 편도염을 앓을 필요는 없다. 동성애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주장하기전에 최소한 그들이 동성애를 경험하기 전의 리즈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노력만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따듯한 에너지가 넘치는 비판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모나고 뾰족해진 내 혀의 돌기는 새로운 맛을 찾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정신을 멍청하게 만드는 신념 체계들의 독재’에 맞서 고군분투할 것이며, 때때로 신성 모독을 부추기는 잘못된 일부 기독교 특유의 폐쇄성을 닳게 하는 사역을 감당할 거다. 때론 의사의 입장에서 과학적 이해라는 관점을 존중해야 하고 그 관점에서 본 세계 또한 신의 섭리가 풍요롭게 녹아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과학적인 증거와 종교적인 증거가 진리로 향하는 같은 길목에서 화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그것을 단편적인 글로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돈만 보던 시절엔 리스크, 모럴, 안정 속에서 복합적으로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끊임없이 내던져졌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돈을 초월한 다른 동기로 내 열정을 굴린다. 순수 미술을하는 순진한 미대생의 마음도 필요하지만 준비된 상업성도 요구된다. 3년 10억 만들기 칼럼니스트였던 내가 10년 뒤 치과의사로 재기 후 이제 작가에 도전한다. 희망을 증거하는 성공 신화로 꾸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유명한 작가나 영향력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되려는 것도 아니다. 아침부터 무언가를 부단히 시작하려는 새들의 기척처럼, 시작은 늘 설렘을 동반한다. 호감 가는 이성이 “우리 걸을까?” 할 때의 설렘, 그런 설렘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았을 때도 나온다. 잠재력을 알게 되면 미래가 낙관적으로 보이고 성공과 성취가 암시되는 위대한 나무로 성장한다. 성경에서도 기름 부은 자,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사람을 나무로 표현한다.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고 용기와 동기부여를 해주는 멘토링 욕심은 있다. 누군가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건 축복이자 행복이다.
많은 자기개발서 들을 읽어 보고 나서야 구상이 떠오른다. 새로울 건 없다. 삶의 큰 굴곡들을 시차적으로 나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로 채운다. 수많은 수정이 이어진다. “이 정도면 완벽해!” 하는 만족감은 요연하다. “이 정도면 될까?”와 “이 정도면 되지 않겠어?”의 딱 중간 정도. 면도 후 거울을 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찬미로는 충분치 않다. 책을 출간한다는 건, 일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확연히 다른 기획이다. 이 외수님은 글 쓰는 일을 “내게서 버림받은 낱말들은 모두 하늘로 가서 겨울밤 그대 잠든 머리맡 새도록 함박눈으로 쌓입니다”라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순수한 창작이란 없다. 인류의 아이디어는 늘 우주라는 코스모스 도서관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꽃들을 모아 꽃다발을 엮는 리본, 하지만 보다 예쁜 리본을 만들 필요는 있다. 나만 읽는 일기가 아니라서다. 언어의 순서를 바꾸고 이미지를 명료하게 묘사한다. 소설적인 묘사와 수필적인 간결함의 유지가 중요하다. 책을 쓴다는 건 쓰디 쓴 비판도 견뎌야 한다. 미술 작품 평처럼 때론 공간의 깊이를 표현했다고 칭찬받고, 때론 평면적인 단순함을 표현했다고 칭찬받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할 수만은 없다.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며 태양을 사랑한 작가 빈센트 반 고흐도 800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지만, 생전에 팔았던 작품은 소수였고, 노벨 문학싱의 노인과 바다도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다. 칸딘스키와 추상화의 선두주자인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그의 나이 68세에 제작되었다. 수능 실패는 인생을 흔들어 놓을 만큼 대단한 건 아니다. 긴 항해에서 먼지만도 못한 사건이다. ‘제정신은 통계학적이지 않다 (조지 오웰,1984)" 소수에 속해 있어도 확신을 고수한다면 미친 것이 아니다.
지혜를 주시고 능력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삶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주신 것과 나의 선택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신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포기하는건 자신들이다. 이제 작가에 도전한다. 그래서 다소 혼란을 겪고 있지만, 혼란일 뿐이지 재앙을 겪는 건 아니므로 행복하다. 이 책이 많은 제인(J)과 빌(B)들에게 횡재가 되기를 바란다. 먼 하늘이 우아한 낙엽 빛으로 타는 날이 지나고,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긍정적인 클릭들이 생기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