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수다쟁이의 노래
벽이랑 대화하는 날이 있더랍니다
뜨거운 가을 볕 아래 단전에서부터 스멀거리는 관념이 타들어 갈 것 같이 목이 마른 날이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답답함이 조금 해소가 되나 싶었는데 이내 갈증의 골은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반가울리 없는 그의 모습에 체념해버린 한숨만이 깊게 비워졌다.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인간은 갈증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내보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대기 시작한다. 이게 뭐람?
PC 전원을 슬며시 누르고 운동복으로 환복했다. 이 날은 퇴원 후에 재활운동으로 피티를 시작하고 세번째쯤 되는 날이였다. 트레이너가 무게를 올릴때마다 징징거리며 오늘은 준비가 안되었다는 말로 둘러댔다. 제발 이것이 재활운동임을 잊지 말아주세요. 이 운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트레이너와 수강생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모호해 지는건 유쾌하지 않아서 대신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덮어버렸다.
한 세트 뒤에 1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날은 썩어가는 자아를 구출해 내느라 도저히 제동이 걸리지 않는 수다로 1분 30초는 훨씬 지나서야 컷을 당했다. 말을 중간에 끊을 수 없었던 트레이너는 초시계와 나를 번갈아 보며 초조한 눈빛을 숨길 수 없었고 영혼없는 리엑션을 해대느라 식은땀 한방울 정도는 흘리지 않았으려나. 정석을 벗어나 있던 루틴에 지친 그의 입에서 소심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회원님 운동하셔야죠"
아 맞다! 재활운동이 이 운동의 본질임을 어필하고 싶었던 말 대신 벽이랑 얘기했던 내면의 목마름을 여기에서 애꿎은 사람에게 쏟아내고 있는게 아닌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자 그가 감정쓰레기통의 희생양이 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갈증이 조금은 해소되고 났을 즈음 약간의 영업방해죄, 운동불성실죄, 감정배출죄 쯤으로 나에게 옐로카드를 선언했다. 경고!!
가끔 우리집 벽은 그 어떤 리엑션도 없고 반감도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내 얘길 들어주는 벗이 되어준다. 그와의 대화는 일방통행이지만 작은 사고의 위험도 존재하지 않기에 독백을 하기엔 이만한 친구가 없다.
하지만 종종 리엑션을 해줄 수 있는,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어른사람을 만나야 할 때가 필요하다. 계속 벽이랑만 베프하다간 위로받지 못한 내면의 혼들이 정처없이 떠돌며 목말라 할게 뻔할테니 말이다.
해를 거듭할 수록 말수가 많아지는 이 모습은 낯설지만 참으로 바람직하고 건전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의 티타임 또는 브런치 약속을 종종 기약하는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 있다.
구름 몇점 얌전히 머금고 있는 옅은 파란빛 하늘이 눈부셔하는 홍채에게 강아지 모양의 솜사탕을 선물로 주었던 날이다. 반려견들과 남은 이야기를 나누러 집으로 가야겠다. 가는 발걸음이 이전보단 조금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