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시간 모기 네 놈에게 수혈당한 놀이터에서 급격히 차가워진 가을바람에 또 한 계절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일이 걸릴지 헤아리는 중이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적응해야 하는 일이 점점 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감기처럼 한번씩 앓고 지나가는 일 따위 말이다. 이제 한번 가지고는 말도 못꺼낼 지경이다.
아침에 맞춰놓은 알람에 몸을 일으키는 일이 물한컵으로 시작하는 보통의 아침과는 사뭇 다른 날이다. 등을 기대어 앉아 자꾸만 떨어지는 고개를 수없이 가누기를 여러번. 이제 진짜 일어나야겠다. 두통으로 시작된 아침은 새로운 계절의 시작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카페인에 취약해 멀리하는 커피를 오늘은 조금 마셔주는게 좋겠다. 그녀를 몇달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다.
우리의 인연은 조금 특별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본 그녀는 오빠의 대학 후배였는데 살뜰히도 챙기는 그녀가 경황없는 와중에도 눈에 들어와 있었더랬다. 알고보니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았던 우리는 오빠가 이어준 인연으로 만나 '찐친구'로 발전했다.
일명 베스트 프렌드라고 부르는 나의 '베프'는 조금 수척해진 모습이였다. 친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나는 머리속에서 정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해 두서없이 튀어 나오는 언어들의 무질서를 막기위해 어떤 말을 먼저 꺼내볼지 말이다. 이미 우리들의 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한발 늦었군.
그 누구보다도 하루 빨리 그녀의 퇴사를 종용하고 있었다. 인생의 우선순위도 운운해 보고 무엇보다 그녀의 건강이 제일 걱정이 되었기에 "그만 두어야 해"라는 말을 수도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오지라퍼 1인자인 그녀는 이미 회사사정을 많이 봐주고 있었고 오지라퍼 3인자쯤 되는 나도 더 이상은 인내심을 발휘할 상황으로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인수인계서를 빽빽하게 작성해 놓으면 어떨까?좀 더 알아보기 쉽게 제목은 굵은 글씨로.
퇴사날짜를 정해서 통보하는 방식으로 하자. 대신 그 이상은 좋지 않아.
요즘 공공연한 개인주의를 우리도 조금 써먹을 필요는 있어.등등
온갖 잔머리를 굴려가며 그녀를 빼낼 궁리로 이말 저말을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기필코 너를 꼭 구출해 내고야 말겠어!
MZ에 살짝 걸쳐있는 우리는 기성세대를 닮아 있기도 했지만 MZ세대의 사상에도 근접해 있는 정말 '낀 세대'이기 때문에 이해와 포용력 또한 넓은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 세대의 가치관 또는 사상들을 다 이해하고 수용하려다 보니 쉽게 결정이 나지 않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플러스 거지같은 근무조건이 붙긴 했지만.
불합리한 조건의 근무환경을 감내해내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서글픔이 밀려왔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서글퍼해야 하는지 혹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는 아니였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살짝 남긴채 말이다.
기운빠지는 대화를 특유의 명랑함과 씩씩함으로 이겨내는 그녀의 모습이 '내가 널 만난건 정말 행운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속닥속닥.
얼음이 녹아버린 커피는 이제 더이상 쓴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카페인에 녹여보며.. 그녀들(아이들)이 오고 있으므로 긴장태세를 유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