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한 달만의 귀가다. 사달이 난 것은 어버이날 이틀 후인 토요일 아침이었다. 집에 좀 와보라는 장모님 전화에 아내와 함께 처가로 갔다. 장인은 창백한 얼굴에 신음을 하며 침대 위에 엎드린 자세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엊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육포 몇 조각을 먹은 후 밤새 구토와 화장실을 들락거렸다는 말에 위경련인가 했다. 침대 시트와 얇은 홑이불, 방바닥에 묻어있은 흔적들이 지난밤의 상흔처럼 남아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119에 도움을 청했다. 구급차를 뒤따르며 내일을 알 수 없는 나이를 감안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스쳤다.
의료대란의 후유증 때문인지 가려던 큰 병원은 응급환자를 받을 여유가 없다 하여 동네 병원 응급실로 갔다. 하얀 액과 투명한 수액이 담겨있는 비닐주머니를 손등 정맥 혈관에 꼽은 후에야 겨우 잠에 드셨다. 잠시도 환자의 곁을 비워선 안된다는 간호사의 말에 아내와 교대로 주말 이틀을 꼬박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월요일, 의사는 소장 폐색이라고 했다. 소장은 위를 대장에 연결하는 길고 꼬임이 많은 장기다. 직장암, 위암 수술로 인한 흉터 조직 때문에 음식이 원활히 장을 통과할 수 없어 복통을 유발한 것이며 자칫 폐색 된 장이 파열되어 복부 내부를 감염시키는 경우 사망할 수도 있으므로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다시 구급차로 한강변의 국내 최대인 대형병원으로 갔으나 응급실 앞에는 인근 지역과 지방에서 먼저 온 구급차 일곱 대가 대기 중이었다. 언제 차례가 올지 알 수 없어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결국 성남의 의료원에 입원하였다. 도떼기시장 같았던 대형병원과 달리 도착 즉시 응급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병실도 여유가 있어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실감하였다. 입원 첫날, 아내는 병원에 남고 나는 처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 혹시 하는 생각에 국물이 있는 음식을 포장해 갔다. 식탁에 멍하니 앉아계신 장모님은 귀가 어두워 주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셨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어찌 됐노?' 하며 물었다. 필담을 하며 경과를 설명하자 그제야 안심하며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며 가져간 음식을 허겁지겁 드셨다.
처음 입원 후 2,3일 지났을 때와 정반대 모습이었다. 성격이 급한 데다 식성이 까다롭고 소식에 수시로 먹을 것을 찾기에 온종일 수발하느라 평소에도 쉴 짬이 없는 장모님이었다. '걱정되시죠'라는 말에 '아니다. 세상 편해서 좋다' 하던 그 표정은 찾아볼 수 없다. 온갖 수발에 귀찮기만 했던 남편이지만 큰 병원으로 옮긴다니 예삿일이 아니라 짐작한 것이다. 이송 소식을 들은 후 가을에 있을 외손자 결혼식은 보고 가도록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다고 하셨다.
입원 2주 차에 병문안을 가셨다. 약 기운인지, 식사를 제대로 못한 탓인지 섬망 증상 속에 남편이 죽는지 사는지 관심도 없고 한 번도 안 온다는 말에 다녀온 것이다. 아내는 장모님이 병원에 가는 날, 아침부터 립스틱을 바르는 등 화장을 하고 장롱 속의 팔찌, 시계 등을 꺼내 차고 옷도 이것저것 바꿔 입으며 어느 게 좋으냐고 묻더라고 했다. 남편을 보러 가며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을 하고 장롱 속의 팔찌며 목걸이를 꺼내 차고 고운 옷차림에 신경 쓰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구십 중반이어도 여자이기 때문인가? 화장대 앞에서 공들여 화장하는 장모님 모습을 그려보며 과연 어떤 마음인지 궁금했다. 2000년대 초반, 인기가요 정상을 차지했던 '왁스 Wax'의 '화장을 고치고'라는 노래 한 구절이다.
'세월에 변해버린 날 보며 실망할까 봐,
오늘도 나는 설레이는 맘으로 화장을 다시 고치곤 해..'
헤어진 연인을 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못하고 언제라도 다시 만나면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화장을 고친다는 순애보 적인 마음 같은 것이라 생각되나 정확히 헤아리진 못한다.
위험성은 있으나 수술을 권하는 병원장의 최종 판단에 따라 수술일자를 잡고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러나 수술을 불과 두 시간을 앞두고 막힌 장이 뚫려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선하게 살아온 두 분에게 주는 하늘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콧줄을 통해 미량의 음식물을 장으로 투입면서 점차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러나 식성이 까다롭기에 병원 식사가 입에 맞을 리가 없다. 집에 가자는 아우성과 성화에 의사는 일주일 정도 경과를 지켜본 다음 판단하겠다고 했다. 약 기운 또는 치매 증상의 진전 때문인지 섬망譫妄 증세가 반복되어 걱정이 앞섰다. 집에 가면 누가 이 수발을 감당할 것인가. 처남도 얼마 후 홍콩으로 귀국해야 한다.
퇴원하는 날, 처남이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아내는 병원용 침대를 임대하는 등 집에서 장인 맞이에 바빴다. 그날 아침부터 장모님은 화장대 앞에서 또 화장을 하셨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집에 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일에 제일 먼저 화장을 하신 것이다. 그 마음을 알듯 모를 듯했다. 그 옛날, 과거 시험 보러 한양 갔다 돌아오는 지아비를 맞이하는 아낙의 마음 같은 것일까? 수술을 앞두고 장인과 통화를 하며 '살아만 온나. 내 맛있는 거, 먹고 싶은 거 다 해줄게' 하셨던 장모님이다. 수술 없이 퇴원한다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지난 한 달간 마음 졸이며 무사생환을 기원했기에 탈없이 돌아오는 남편이 고맙고 감사하여 고운 모습을 보답하려는 것인가? 그런 장모님의 마음이 애틋하기 조차 했다. 평소 집에서는 틀니도 빼고 지내신다. 그런 모습으로 맞이해도 이상할 게 없으련만 정성으로 남편 맞이 화장을 하는 장모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귀가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때 화장을 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밤낮 없는 장인의 예측불허, 감당불능 처신과 그 치다꺼리에 아내마저 편안한 날이 없다. 시간제 간병인으로는 한계가 있다. 예전의 일상을 조심스레 기대했던 바람은 진작 접어야 했다. 화장하던 마음을 지니거나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95년의 세월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