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욕일의 해후

by 애기타

“오랜만이요.” 목욕을 마치고 나가던 영감님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순간 '그래, 그분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근 5년 만의 해후였다.

매주 토요일 이른 아침, 차로 십 분 거리인 이웃 구리시의 대중목욕탕에 간다. 십수 년째 지속하고 있는 토요일 루틴이다. 열탕의 찌릿한 열기로 온몸의 무뎌진 신경과 잠자는 세포를 깨우고 혈행血行을 촉진하여 몸의 활력을 되찾고, 뭉친 근육과 뻣뻣한 관절 부위를 이완시켜 몸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스트레칭을 한다. 한 주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가뿐한 몸 상태로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기 위한 나만의 건강관리법이다.


열탕에서 몸을 충분히 예열한 후, 온탕과 열탕의 경계턱에 앉아 호흡을 고른 후 다리를 쭉 뻗은 상태로 상반신을 굽히는 동작을 반복하며 척추와 허벅지 뒤쪽 근육을 스트레칭하던 중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온 것이다. 입욕 전 탈의실에서 잠깐 마주쳤었다. 나 역시 긴가민가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스님 같은 민머리는 예전과 다름없었으나 얼굴과 체형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또 누구시라고, 먼저 알아 뵙고 먼저 인사드려야 했는데….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성함이나 나이,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 물은 적도 없지만 그런 대화를 나눌 만한 기회나 여유가 없었다.


노인을 처음 만난 것은 코로나 전이었다. 매주 토요일 이른 아침, 목욕탕에서 몇 차례 마주쳤기에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목욕탕에 도착하는 시각은 다섯 시 반에서 여섯 시 사이다. 이른 시간의 번잡하지 않고 깨끗함이 좋았고 또 코로나 시절에는 감염 예방을 위함이었다. 더러 첫 번째 손님이기도 했으나 대부분 세 번째 이내였다. 비슷한 시간대에 오는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어느 토요일, 늘 하던 대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퇴직 전 배운 우리 고유의 전통 선법 '혈기도' 동작을 한 시간쯤 한다. 허리 굽히기 동작을 비롯하여 목에서 발끝까지 신체 부위별로 관절과 근육을 이완하기 위한 동작을 오십 회에서 삼백 회 정도 반복한다. 양다리를 곧게 펴고 상체를 숙이면 가슴은 허벅지에 머리는 정강이에 닿는다. 들고 내쉬는 혈기도 호흡법에 따라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영감님이 “나이도 있는데 몸이 어찌 그리 유연하오? 지금 하는 게 무슨 운동이요? 요가요?” 하며 물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면 대부분 말없이 바라보거나 일행이 있는 경우 그들끼리 수군거리기는 하나 말을 걸어온 것은 영감님이 처음이었다. 그 후 다시 만나면 인사와 함께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영감님은 올 때마다 세신사(때밀이)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항상 음료를 사주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다. 그런 노년의 여유와 후덕함이 좋아 보였다.


코로나 기세가 확산하고 다중이용시설에서 감염 사례가 발생하자 보건 당국은 목욕탕 이용을 자제해 줄 것을 권고했다. 목욕탕 손님이 급감하였고 덩달아 영감님도 뵐 수 없었다. 면역력이 떨어진 고령이라 감염 예방 차원으로 목욕탕 출입을 자제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후, 코로나 기세가 꺾일 때까지 목욕탕은 한산했다. 어떤 날은 나 혼자인 경우도 있었다. 목욕탕 주인에겐 미안한 일이나 나로선 그런 조용한 분위기와 깨끗한 물을 이용할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영감님이 생각났으나 별일 없길 바랄 뿐이었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그를 볼 수 없었다. 많은 노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보았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와중에도 매주 목욕탕 가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 영감님에 대한 생각도 점차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하루의 상쾌함을 위해서라면 목욕을 하고, 일주일을 위해서는 이발을 한다고 했다. 둘 다 하고 난 다음의 상쾌함에서 비롯된 표현이리라.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는 목욕을 몸 안 체액의 균형을 맞추는 일종의 의료행위로 여겼으나, 중세 유럽에선 목욕은 더운 공기를 통해 열린 모공으로 나쁜 공기가 몸에 들어온다고 믿어 오히려 불결하고 두려운 행위로 여겼다고 한다. 내 경험으로는 전자에 공감한다. 코로나 확산 초기에 자신이 감염된 줄 모르고 목욕탕에 다녀간 손님으로 인해 일시 폐쇄되었을 때,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 무렵 직원과 함께 점심 먹으러 식당 갔다가 동시에 감염되어 일주일간 집에서 머물렀던 그 두 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목욕탕 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지속해온 습관으로 토요일은 나에겐 목욕일이었다.


영감님 생각도 희미해져 갈 무렵 다시 만난 것이다. 외형상 변한 모습 때문에 먼저 알아보진 못했으나 걱정과 달리 ‘코로나 시국을 잘 이겨 내셨구나’ 하는 마음에 무척 반가웠다. 앞으로 자주 뵙겠다는 인사로 다음 목욕일의 재회를 기약했다.


반가운 해후였다. 오늘 월요일인데도 벌써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이번 토요일엔 더 일찍 나서야겠다. 영감님은 늘 같은 시간대에 목욕탕을 이용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다소 피곤한 일터 사정으로 인해 그동안 예전보다 늦은 시간에 목욕탕을 이용했기에 못 뵌 것일 수도 있다. 오는 토요일엔 목욕탕 개장 시간에 맞춰가리라. 이번에 만나면 얼굴과 뱃살이 많이 빠진 이유도 물어보고 “등 좀 밀어 드릴까요?” 하며 친밀감도 건네야겠다. 5년 만의 해후를 기념하고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영감님과의 추억을 좀 더 두텁고 다양한 모습으로 저장하기 위해 더 일찍 나서야겠다.






keyword
이전 14화멍에와 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