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휴직생활
그다지 간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대학원 낙방의 후폭풍은 예상보다 조금 크게 다가왔다. 앞으로 독일에서의 남은 2년의 시간동안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휴직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의미있게 사용하고 싶은데, 이 갈길 잃은 방황은 결국 깊은 심연의 우울감과 무기력함으로까지 번져버렸다. 밤에는 잠들기 어려웠고, 그래서 아침엔 일어나기 힘들었다. 점점 더 우중충해져가는 독일의 날씨와 함께 몸은 움추려들어 운동을 하는 날이 적어졌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겨우 간단한 집안일만 할 수 있었다.
동기부여를 위해 괜히 독일 구직 사이트에서 취업 공고를 뒤적여 보았다. 휴직 중 겸업금지 조항으로 인해 독일에서 취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지금 나의 상황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지 않은지 벌써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내 직장은 안정성이 최고의 장점인 곳으로, 웬만한 사고로도 잘릴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어찌보면 특수 직종으로 다른 업종이나 타사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기 때문에 고용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것이겠지만, 이 장점은 독이 되기도 한다. 더 발전하지 않아도, 의욕적이지 않아도, 도태되어 있어도, 그래도 정년까지 무리 없이 다닐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무 발전 없이 안이하게 업무를 보는 선배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런데 막상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려고 보니,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십여년 전에 작성하였던 과거 이력서에 달리 추가할만한, 업그레이드할 만한 내용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말로는 자기계발 열심히 하고, 회사 생활을 성실하게 한다고 설레발 치면서, 결과적으론 의미 있는 성과가 딱히 없었던 것이다. 대학원 낙방의 후폭풍은 그동안의 회사 생활 전체에 대한 후회로까지 번져갔다.
이렇게 인생에 의미도 없고, 목표 의식도 없다고 무기력하게 신세한탄하는 나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인생에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그래서 요즘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남편은 오히려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반문했다. 본인이 나를 바라보기엔, 독일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고, 한국에서보다 운동도 더 많이하고, 책도 많이 읽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냐는 것이었다. 본인이 나처럼 살고 있다면, 이미 충분히 의미있는 삶이라고 뿌듯해했을 것 같은데, 뭘 더 해야 만족할 수 있겠냐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경력 단절이 된 것이 싫고, 휴직기간에 커리어 개발을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이럴거면 그냥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것이 나았었을 것 같다고까지 우겨보았다. 남편은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도 내게 인생의 의미나 목표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 않았냐며 팩트 폭격을 날려주었다. 할말이 없어진 나는 의미는 없었어도, 적어도 돈이라도 벌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이 말과 동시에 내 인생의 의미와 목표가 돈이 되버린 것 같았다.
남편의 말이 사실 맞았다. (그래서 좀 더 심통이 나기도 했다.) 직장 생활 중에도 목표의식 없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고된 일과에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책 읽고, 운동할 수 있는 나만의 의미 있는 시간을 간절히 바래기도 했다. 그래서 휴직을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고된 나에게 나만의 시간, 휴식을 선사해주자고. 그런데 어느샌가 처음 휴직을 결심할 때의 마음은 사라지고, 이 시간동안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감이 점점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꼭 무언가 해야한다고, 성과를 이뤄야만한다고, 목표를 달성해야한다고. 아무도 나에게 뭘 하라고 압박을 주지 않았는데, 이 압박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인정 욕구'가 상당히 강한 사람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언제부터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어찌보면 인간의 본능으로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성취한 무언가를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내게는 약간의 문제가 된다. 인정 욕구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쓴다는 것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모범생 콤플렉스 또한 나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틀을 늘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해외에서 해방감을 누리고 싶었다. 이게 내 휴직의 본질이었고, 주재원 와이프를 선택한 이유였다.
휴직 결정 후 주위에서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휴직한 김에 전문 자격증을 따라, 석사를 해라, 부업을 해라... 등등, 다들 미래를 고민하는 나를 위해 해준 조언이었다. 그들의 선한 의도는 다 나를 위한 것임을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성 어린 조언들은 어느새 내 스스로 나를 압박하는 또 다른 타인의 시선이 되어버렸다. 3년동안 아무 자격증도 취득하지 못하면 남들이 날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요즘 친구들 다들 석사를 하는데 나만 학위가 없는 것이 아닐까. 다들 직장 다니면서 부업을 하는데, 시간도 많은 내가 아무 것도 안하는 건 낭비 아닐까. 내가 무언가 해야한다고 느끼는 압박감은 전부 타인의 기준에서 온 것이었다. 인생의 의미는 "내 안에서" 찾아야하는데, 계속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서 찾고 있었으니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별로 개의치 않는 성격의 남편은 내가 참 답답하다고 했다. 내 내면이 만족스러울 때 의미 있는 인생이 되는 것이지, 도대체 왜 남들의 인정까지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나는 나 혼자 만족스러운 것을 떠나서, '남들이 봤을 때도 멋진 나'여야만 의미있는 인생을 산 것 같은 이 성격을 어찌하란 말인가.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자 했던 내 휴직 목표는 벌써 1년이 흘렀지만,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이 인정욕구를 떨치지 못해서, 지금 내 스스로를 의미 없는 인생, 무기력한 인생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각심이 들었다. 남은 2년동안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정말 내 내면의 만족에 집중할 수 있는, 진짜 의미 있는 인생을 보낼 수 있을까.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려운 과제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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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아이펠 국립공원의 가을]